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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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인터넷과 핸드폰이 광범위하게 보급된 것은 약 1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정보화의 국면을 급속히 촉진시켰으며 더욱더 확장시켜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양식을 급격히 바꾸어가고 있다. 사람들 간의 소통관계와 협력관계는 상당히 긴밀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조건에서 사람들은 지식, 사진, 그림, 글, 만화, 동영상등 새로운 표현물과 정보물들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으며 바야흐로 우리는 시뮬라크르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이미 플라톤 시대부터 이야기 되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시뮬라크르, 즉 복사물로서의 예술을 이데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부정적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현재는 무엇이 진짜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미지와 기호들이 생산되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것이 변용되기도 하며, 혹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무엇이 진짜인가?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실재(reality)란 있는가?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기호들과 이미지들은 과연 누가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누구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등등

 시뮬라크르 시대에 진품(진짜)은 존재하지 않는다. 혼합되고 변용된 이미지와 기호등의 생산은 계속된 새로운 창조작업이 된다. 이러한 창조작업의 에너지는 바로 모두 생산자가 되고 모두가 소비자가 되는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에 있다. 기술의 발달은 작자와 감상자의 구분을 파기 시켰으며 누구나 다 작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감상자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인터넷에 네이버의 블로그, 싸이월드등에서 생산되는 사진과 이미지, 그림들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미지와 사진, 글등등의 표현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공간에 참여의 폭은 제한되어 있지않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스크랩 해가며, 퍼갈 수(?) 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1892~1940)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것을 이미 1936년에 예감하고 있었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1936년도에 쓴 글로서 기술의 발달이 삶의 양식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그리고 나아가 예술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한 글이다. 위의 현상을 벤야민의 용어로 말하면, 즉 시뮬라크르 시대는 진품의 사라짐이고, 아우라가 붕괴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킬 것이며 작자와 감상자의 구분이 사라질 것을 벤야민은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조건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다소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도 하였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이러한 현상을 대중기만으로서의 문화산업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한 것과 다르게)

이제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벤야민의 방법(관점)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가치가 있다. 어쩌면 벤야민의 이 글은 현재의 IT사회, 테크놀로지의 사회에서의 예술에 관한 교과서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니다. 이것은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예술의 관점으로부터 기인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뉘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사회적 조건과 관련지어서 탐구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경향’이라는 맑스의 방법론을 수용하여 예술에 적용시켰다는 것이다.‘경향’적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아직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더욱더 확장되고 있게 될 것이라는 가설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벤야민이 말한 ‘예술의 발전 경향 테제들’이다. 비록 이글은 우리에게 너무나 전통적인 것이 되어버린, 흑백영화, 라디오등이 출현하고 있을 때 서술되었지만, 기술이 미치는 영향을 포착하고 이것을 경향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이미 현재의 사회를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벤야민의 기술복제의 의미

 벤야민에 의하면, 예전에도 언제나 복제는 가능하였고, 복제는 행해졌던 일이다. 그것은 예술적 수련을 목적으로 도제들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때로는 작품의 보급을 위해서, 때로는 돈을 벌기 위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술이 등장하면서 복제는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다. 이것은 그 동안 손이 담당하였던 기능을 소멸시키게 된다. 이제 렌즈를 투시하는 눈이 혼자 영상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눈은 손보다 빨리 영상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영상의 복제과정은 급격히 촉진되게 된 것이다. 과거의 복제와 기술복제가 무엇이 다른지, 어떤 점에서 획기적인 전환인지는 기술복제가 전통예술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3/기술복제가 전통예술에 미친 영향(결과)
 1)아우라의 파괴(진품의 권위상실)
 벤야민에 의하면, 완벽한 복제라도 한 가지 요소가 빠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진품이 시간, 공간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현존성’이다. 원작은 딱 하나이기 때문에 원작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그것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 의미가 바로 ‘유일무이한 현존성’이며 혹은 ‘일회적 현존성’이다. 가령 우리는 화장실에서 용무(?)를 볼 때 마다 벽에 걸려 있는 걸작의 그림을 보곤 한다. 물론 이것은 사진으로 복사한 것이거나 그대로 뻬낀 그림이다. 아마도 이러한 복사물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빈치가 직접 그린 작품 모나리자가 서울에 와서 전시가 되었다고 해보자. 그것은 시간이 흘러 적당히 변했을 것이지만(탈색도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빈치가 직접 그린 모나리자를 보았을 때 느낌은 화장실 벽에 걸린 복사물 모나리자와 다르게 그것이 풍겨내는 분위기는 다를 것이다. 진품에서 풍겨 나오는 이러한 분위기가 바로 아우라(Aura)이다. ‘유일무이한 현존성’, ‘일회적 현존성’이 진품을 구성하는 것이고 이러한 진품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아우라이다. 그래서 진품은 모조품에 대한 권위를 갖는다. 아마도 모조품이 많을수록 진품의 권위는 더욱더 올라 갈 것이다.
  그러나 기술복제에서는 이러한 원작, 진품이 가지는 권위가 없어진다. 이것이 과거의 복제와 기술복제와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래서 진품은 별다른 아우라를 갖진 못한다. 즉 아우라 또한 붕괴(파괴)되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①기술적 복제는 (원작에 대해서 수공적 복제)보다 더 큰 독자성을 지닌다.
카메라의 줌렌즈의 기술, 시점의 변화는 자연적 시각을 배제하여 원작의 의도를 부각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그림의 풍경과 구도를 변화시켜 사진으로 재현할 수 있음

②기술적 복제는 원작이 포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원작의 모상(대상)을 가져다 놓을 수가 있다. (사진이나 음반)

③그 밖에 예술 작품의 복제품이 처하게 되는 제반 사정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을 수도 있  다.(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발터벤야민의 문예 이론』, 민음사, pp201~202.)

2)지각방식의 변화-의식가치에서 전시가치로의 이행
 이러한 아우라의 파괴를 벤야민은 현대인의 지각양식이 변화고 있는 사회적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요하게는 삶에서 날로 커가는 대중의 중요성과 관련이 있다. 두 가지로 나누어 보자면, 첫째 ‘대중은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오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대중이 바라마지 않은 열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 ‘현대의 대중은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성향’을(204p)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중은 가까이 있는 대상들을 모사와 복제를 통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예술작품의 분위기적 존재방식은 한번도 의식적인 기능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 즉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종교적 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복제의 예술작품은 종교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즉‘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작품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종교적 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게’(206p)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사라지는 순간, 예술이 담당하였던 사회적 기능도 변화를 겪게 된다. 종교의식적인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던 예술의 사회적 기능의 자리에 다른 사회적 실천, 즉 정치에 근거를 둔 다른 사회적 기능이 대신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작품의 수용중점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종교적 예술생산물은 의식가치에 중점이 있고 전시에는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예술적 생산은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형상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들이 보여 진다는 사실보다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라스코 동굴벽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지기도 하지만 더욱더 중점을 두었던 것은 그것들이 존재함으로 인해서 신에게 바쳐진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복제에 따라 이러한 의식가치는 전시가치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이행한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의 다양한 방법이 생겨남에 따라 전시 기회가 엄청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의 중점은 전시가치에 주어짐으로써 예술작품은 전혀 새로운 기능을 가진 형상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라고 말한다.

3)사진과 영화
 벤야민에 의하면, 전시적 가치가 의식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 것은 사진이다. 이러한 새로운 단계의 정확한 이정표를 세운 사람이 앗제(Jean Eugene Auguest Atget1856∼1927)이다. 앗제의 예술적 의의는 그가 1900년경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 파리의 거리를 포착했다는 점에 있다. 앗제의 사진은 마치 범행현장을 찍듯 거리를 찍었다는 것인데, 보통 범행현장의 사진은 증거 확보를 위해서 찍어둔다. 그래서 앗제의 사진에서 비로소 사진이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이 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식적 가치를 전시적 가치로 전환시킨 지점이라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영화에 대한 논의를 (실제로 벤야민은 사진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있다.) 배우와의 비교를 통해서 설명한다. 연극에 무대배우가 출연한다면, 영화에는 영화배우가 출연한다.
 무대배우의 연기는 연기자 자신을 통하여 관객에게 직접제시되는 반면, 영화배우의 연기는 카메라를 통하여 제시된다. 영화배우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첫째는 영화배우의 연기를 관중앞에 제시하는 카메라는 연기를 통일적인 전체로서 간주할 필요가 없다. 둘째는 영화배우는 무대배우에게 주어져 있는 연기의 조정가능성을 상실한다. 즉 관중은 카메라의 태도를 취한다. 이 둘은 종교의식적인 가치가 드러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종교에서는 제사지내는 사람이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피시험자의 입장인데 반하여 영화에서의 카메라는 관중이 보고 있는 것이요, 곧 관중이 시험하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연극에서는 배우 주위에 감돌고 있는 분위기와 분리되지 않는데, 반면에 영화 촬영시에는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서기 때문에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사라지게 마련이다. 

4/기술복제의 혁명성(역할)
 그러나 기술복제가 전통적인 의식가치 및 아우라를 파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업화와 관련해서는 부정적이다. 벤야민은 영화배우가 카메라 앞에 있다는 것은 관객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며 관객은 시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곧 구매자와 관계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영화배우는‘그가 시장을 위한 연기를 하고 있는 순간은 마치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상품’(216p)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또한 ‘영화는 분위기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스튜디오의 밖에서 유명인물이라는 인위적 스타’(216p)를 만들어낸다. 즉‘영화자본에 의해 장려되고 있는 스타숭배의 마력은 실제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상품화된 타락한 마력 속에서 겨우 그 명맥’(216p)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현실에서도, 영화는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시키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 영화가 특수한 경우에는 이를 넘어서서 사회적 상황이나 심지어는 소유관계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촉진할 수도 있다고 까지 벤야민은 말한다.
 또한 기술복제가 전통예술의 아우라를 파괴하고 각각의 복제물이 창조성과 독자성을 갖는다는 이러한 긍정적 의미부여는 대중의 확대와 작자와 감상자의 명확한 경계를 허무는 역할까지 나아간다. 즉 기술적 복제에서 필자와 독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기능상의 차이로 전락했으며 누구든지 필자와 독자가 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공동 소유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것은 또한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는데. 이전에는 관습적인 것이(전통적인 것이) 무비판적인 것으로 수용되었다면, 영화관에서는 관중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가 일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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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treG 2008-03-05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개인소장용으로 트랙백주소 제 블로그에 주소만 링크할게요^^

thankyou 2013-12-0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자료인용좀 할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