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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검색을 하다가 문화일보에서 책 소개한 내용을 옮겨온다.

사회를 ‘소통체계’로 규정한 현대 독일의 대표적 학자인 니클라스 루만(1927~1998)의 이론을 설명한 책. 루만은 최근 국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 난해함 때문에 일부 전공자들 사이에서만 읽혀왔다. 이번에 번역된 책은 루만의 입문서로서 첫손가락에 꼽힌다.

사회를 인간 또는 주체의 의도나 행위로 환원해 설명하고자 했던 철학과 사회학의 시도들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맞았다. 루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사회가 인간들로 이뤄져 있지 않으며 인간의 몸이나 의식은 사회의 환경에 놓여 있다고 본다.

루만은 또 사회가 인간들이 아니라 소통들로 이뤄져 있으며, 소통은 인간이나 의식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소통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인간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보지 않고 생명체계인 몸, 심리적 체계인 의식, 사회적 소통자로서의 인격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규정한다. 현대사회도 국가나 영토로, 계급이나 계층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치, 법, 학문 등 다양한 코드의 기능적 부분체계들로 분화됐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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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북TV에서 책에 대한 동영상 소개를 볼 수 있다. 다음의 링크를 참조하면 된다.

http://search.pandora.tv/frame/outSearch.htm?ref=na&ch_userid=onbooktv&id=32105447&keyword=%B4%CF%C5%AC%B6%F3%BD%BA+%B7%E7%B8%B8%C0%B8%B7%CE%C0%C7+%C3%CA%B4%EB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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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 = 게오르그 크네어. 아민 낫세이 지음.

부정과 차이의 철학, 현상학의 의미이론, 구성주의 인식론 등 기능주의 사회학을 혁신해 종합한 체계이론가 루만의 사상을 소개한 책.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 지성계를 대표하는 학자였던 루만(1927-1998년)은 50권이 넘는 저서와 35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다.

이 책은 루만의 방대한 저서에 접근하기 위한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저자들은 사회가 점차 복잡해져 기존의 모델로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회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계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나눈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롯해 기존의 철학 이론들은 사회를 단순화했다는 측면에서 현대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포괄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루만 사상을 소개한다.

저자들은 루만이 복잡한 세계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생물학, 미디어, 법학, 정치학, 철학, 언어학, 심리학, 생태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가로지르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갈무리. 정성훈 옮김. 260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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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아직은 읽지 못했는데, 옮긴이가 쓴글을 보면, 옮긴이의 열정과 정성이 느껴진다. 일단은 옮긴이의 말을 살펴보자.

 이 책은 게오르그 크네어와 아민 낫세이가 함께 쓴 Niklas Luhmans Theorie sozialer Systems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옮긴이는 크네어와 낫세이는 루만 사후 체계적으로 사회학을 발전시키고 있는 학자들 중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루만의 이론을 다른 이론가들과 비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저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이 저자들이 함께 쓴 루만 입문서를 옮긴 것이고, 옮긴이는 이 사람들의 논문으로부터 루만을 공부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항고 있다.

옮긴이에 의하면,                                                                                                       이 책은 다른 입문서보다 왜곡이 덜하면서 매우 친절하게 루만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루만의 두번째 저작<사회와 사회>가 나오기 전에 쓰여졌고, 개정되지 않은 그 상태로이기 때문에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옮긴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한국의 루만 수용상황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루만 이론이 가졌던 복잡성 수준에서 이 책이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자기 생산 개념에 이르기까지 체계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 루만은 왜 심리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를 다른 창발적 질서 차원으로 보는가, 소통의 세 가지 선택은 어떻게 조합되는가 등 루만 체계이론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먼저 이해되어야 할 부분들을 매우 간명하면서도 친절학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옮긴이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옮긴이는 루만의 이론에 대해 핵심내용을 전달해주고 있는데, 루만은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상당히 다른 사회학 이론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루만은 사회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지 않으면, 인간의 몸이나 의식은 사회의 환경에 놓여 있다고 본다...'.루만은 사회를 소통체계로 규정하고, 소통의 자기 생산을 구조나 행위에 앞서는 사회의 작동과정으로 보면서, 행위와 구조간에 얽혀진 문제들을 해결한다. 바로 여기서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전환이 하로 사회가 인간들이 아니라 소통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소통은 인간이나 의식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소통 자신이 하는 것, 즉 소통의 자기 생산이라는 통찰이다.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루만은 행위를 소통의 자기관찰, 즉 소통을 통지행위로만 관찰하여 인격에세 귀속시키는 것으로 보며, 사회적 체계의 구조를 행위들에 대한 기대의 제약으로 본다.

둘째, 루만은 체계이론적으로 볼 때, 인간은 지칭가능한 하나의 단위가 아니라고 본다.

셋째, 루만은 현대 사회가 국가나 영토로 나누어져 있거나, 계급이나 계층으로 나우어져 있지 않다고 본다.  

넷째, 루만은 현대 사회의 하위 체계들은 탈 도덕적이라고 보며, 이를 다시 도덕에 근거하도록 만드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옮긴이가 밝히고 있다시피, 루만은 전통적인 사고방식과는 상당히 달라서 나에게 아직 여러가지 개념들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소통이라는 테마와 자기생산이라는 테마가 관심가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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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네그리-하트의 <다중>의 한글본 역자들은 비르노의<다중(A Grammar of the Multitude)>과의 비교해 볼 것은 제안한다.

"다중 개념을 포스트 포드주의 문맥에서 새롭게 정의하는 빠올로 비르노의 <다중>은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을 정치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특히 빠올로 비르노는 네그리와 이탈리아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오랜 실천동지이자 옥중동지라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스피노자, 홉스 아렌트, 하이데거에게서 다중 개념을 읽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두권의 <다중>을 비교하며 읽는 것은 생산적인 사유공간을 만들어 줄 것이다." 다중, 510쪽, 역자후기)

그러나 비르노의 <다중>접근이 쉽지가 않다. 어려운 철학적 개념의 등장과 이것을 비르노가 전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그리-하트의 <다중>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지구촌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들에 대한 예시와 분석, 투쟁과 저항의 사례들, 역사적 사례들의 제시는 내용적 접근과 관심을 좀 더 쉽게 해준다.

-네그리, 하트의 <다중>과 비르노의 <다중의 문법>을 함께 읽으며 비교하면, '다중'에 대한 개념이 좀 더 부각되고, 각각의 저자들의 강조점이 무엇인지 분명이 드러날 수 있다. 

-비르노의 <다중의 문법>은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다중'이라는 주어에 어떤 술어가 있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일단, 이 책에서는 압축적인 철학적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음. 비르노가 다중의 언어적 능력(과 연결되는 개념인 것 같은 수행성개념)을 중요시한다는 것이  이미 책의 제목에서도 표현되어 있음 )
-네그리, 하트의 <다중>은 <제국>의 속편으로서 <제국>이주권의 현재적 구성형태를 그리는 것에 초점을 두는 반면, <다중>은 노동과 저항의 우선성의 관점으로 '다중'의 절대적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구성과 조직화를 그려보는 것이 초점이다.

그냥 생각하는 것들을 스케치해본다. 정말 이것은 근거 없는 인상과 스케치에 불과함.

다시 정리하면 올릴계획이다. (언제 하려나~~~)


네그리, 하트의 <다중>


비르노의 <다중의 문법>


노동과 저항의 우선성으로 고찰.

1부 2장까지는 지배적 관점(즉 역반란의 관점, 삶권력의 관점)으로 내용이 설명되다가 1부 3장에서 관점을 역전시킴

 


‘다중’을 위험하게 본 사람들의 논의를 추적하면서 이 논의를 전복시킴.

-홉스,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의 논의를 추적하면서, 이들의 접근 개념들 및 구분들이 현재는 무효화되었음을 보임.(민중, 특별한 장소, 공통된 장소, 잡담과 호기심)

 


-비물질노동은 네트워크적 형태를 띠며 삶정치적 생산이다.(거꾸로 말하는것도 가능)

(정보, 지식, 소통, 정동적 노동, 이미지....)

 


언어적, 지적능력에 강조점이 있음.

(언어적, 지적능력을 인간의 유적인 특성으로 보고 이것이 공통화되었다는 것을 강조)

->수행성(performance)


 

-삶정치(biopower)에 강조점이 있음. 

-삶정치는 노동의 우선성의 관점에서 설명되는 것인 반면

 


삶정치 개념은 애매하다. 그래서 ‘노동-역량(labor-power)로 접근해야 한다. 노동-역량이 삶정치의 전제이다.

-비르노는 현재의 생산형태 ‘포스트-포드주의’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자본의 관점임.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맑스(의 방법)에 중심점을 둠.

-스피노자(특이성과 공통성, 절대적 민주주의)

-마키아벨리?(공화주의적 전통?)

-맑스의 방법(경향, 실재적 추상, 적대..)

-푸코(훈육권력, 삶권력, 삶정치..)

...


맑스의 일반지성에 중심점을 둠.

(요강의 기계에 관한 단장)

-시몽동의 개체화 원리

-홉스(민중)

-아리스토텔레스(공통된 장소, 탁월한 기예)

-하이데거(잡담과 호기심, 편의주의 냉소주의)

.... 


특이성과 공통성의 나선형적 순환관계


목적론적 일자가 아닌 전제된 일자(언어적-지적 능력)의 분화-다소 유출적, 선형적?


삶권력과 삶정치의 적대구도가 명확함.

-삶권력의 행사형태로서의 전쟁

->제국과 다중의 적대구도 속에서 정치적 조직화의 문제(절대적 민주주의)를 제기함. 


적대구도보다는 다중의 양가성이 강조됨.

->비-대의적 민주주의와 엑소더스를 말하지만, 네그리, 하트의 <다중>과 같은 적대구도가 그려지는 것 같지는 않음. 정치적 조직화의 문제가 공백으로 남는 듯. 


잠재적 힘, 구성적 힘으로서의 다중


잠재적 힘으로 보는 것 같으나 다중의 양가성에 초점.

네그리-하트와 비르노가 내용적으로 대립되는 지점이 있다기 보다는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됨. <다중>248쪽에서는 비르노의 언어적 수행과 관련된 내용은 긍정됨.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권(권력:국가)-노동]의 삼각관계에서 보면,

맑스: [자본(시민사회:부르주아)-국가-노동]?

네그리:[제국-다중]: 삶 자체가 정치적이고 생산적임에 따라서, 주권권력도 삶권력이 됨. 다중이 네트워크적 형태를 띠기 때문에 제국도 네트워크적 형태를 띠게 됨. 그래서 권력과 자본이 한데 뒤엉킴? 맑스시대에 혹은 국민국가적 시대까지 자본(시민사회)와 국가의 어떤 매개적인 형태를 띠는 듯한 관계(물론 국가는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지만)가 제국적 시대에서는 통일됨? 더 이상 어떤 외부도 어떤 매개도 없는 제국과 다중의 적대, 삶권력과 삶정치의 적대.

비르노: 포스트-포드주의(자본의 꼬뮤니즘)과 다중의 대립구도. (이것이 네그리와의 차이점으로 대두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데), 주권 및 권력의 행사 문제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기 어려웠음. 맑스의 자본-노동의 관계가 포스트포드주의-다중의 관계로 대체됨. 비르노가 언어적-인지적 능력의 공통화를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생산형태의 변형을 경제적 영역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인상을 받게됨. 반면, 네그리와 하트는 삶정치적 생산이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는 강조점이 있음. 그래서 네그리,하트에게 삶정치와 삶권력이 중요한 반면, 비르노에게는 삶정치의 개념은 애매하고 노동-역량이 강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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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서문에 대한 노트에 가까우므로 조만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1/맑스의 자본론과 비교한다면..?-노동과 저항의 우선성을 파악해야 한다. 

 맑스의 <자본론>은 자본이 영원하고 자연적이라는 것에 반대하면서 자본의 성격을 파헤친다. 그래서 자본이 실상은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에 의존하며, 잉여가치의 착취를 통해 자기증식한다는 것을 규명한다. 즉 자본은 가치를 증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서, 이 목적을 노동자의 잉여가치의 착취로 실현한다. 그리고 자본은 이러한 원리를 은폐하는 모든 수단들을 동원한다. 물론 맑스의 정치경제학 연구와 <자본론> 서술목적이 단지 자본을 규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과 그 정당성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었다. 즉 맑스는 자본주의가 기존의 전통(봉건주의)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사회형태, 즉 가치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가는 지배적 경향이었음을 주목하고, 여기에서 자본의 원리의 모순과 허구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것을 변혁할 수 있는 혁명적 주체성의 발견과  새로운 사회의 실현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래서 맑스에게는 자본을 파헤치는 것이 제 1차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고전파 정치경제학과의 이론적 대결의 목적을 갖는 것임과 동시에 현재(당시) 사회 변화의 형태변화를 경향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연구와 <자본론>서술은 이 목적에 부합한다. 그러나 <자본론>에서 서술은 고전정치경제학파들과의 대결과 자본의 원리를 규명한다는 목적에 혁명적 주체성의 문제가 간과된다. 즉 맑스는 분명 노동이 자본보다 우선적이고, 자본의 지배보다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우선적임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론>에서는 자본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어서 노동과 저항의 우선성이 잘 드러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본의 원리 해명의 논리적 서술이라는 목적에 이것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론>에서는 노동 (혹은 노동자 계급)은 자본에 착취당하는 '부정적'방식으로만 제시되고, 단지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사례만이 부분적으로만 제시될 뿐이다. 그리고 맑스는 자본론 1권을 출간하고, 나머지 자본론의 노트들만을 남긴 채 사망한다. 그렇다면, 맑스에게 공산주의의 가능성과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적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내용은 미완인 채로 남겨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물론 <공산당 선언>과 <독일이데올로기>,<고타강령비판>에서 그 문제를 찾아 볼 수 있지만, 맑스의 정치경제학 연구와 <자본론>에 비한다면, 그 중요성과 분석내용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고, 그래서 혁명적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과 공산주의 실현이라는 과제는 신비화된 채로 남겨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혁명에 대한 기획과 실현이라는 과제는 노동과 저항의 우선성의 관점에서 맑스의 독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노동과 저항의 우선성아래에서 현재의 생산(과 노동의 관계)과 주권형태(권력형태)를 해명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전복하는 혁명적 가능성과 힘을 찾아야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과 <다중>은 이러한 관점에서 위치지을 수 있다. <제국>에서는 현재의 전지구적 질서형태를 '경향'적으로 해명함과 동시에 다중의 기획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제국>에서는 주권형태의 분석과 생산의 형태분석이 중심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다중의 기획은 다소 부분적으로만, 추상적으로(혹 신비적으로)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다중>은 <제국>의 속편으로서 다중의 기획을 중심적 내용으로 다룬다.

2/<다중> '서문'-공동의 삶

 <다중>은 <제국>(2000년 출간, 2001년 한글번역본 출간-윤수종 옮김)의 속편이다. <제국>은 전지구적 질서의 경향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현재의 전지구적 질서의 형성은 기존의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제국주의 담론으로 해명할 수 없다. '제국'은 전지구적 질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 성공할 유일한 권력형식(이라는 맥락에서 일종의 '경향'으로서), 즉 새로운 주권형태이다. 즉 그것은 '네트워크 권력'으로서 기존의 국민국가들을 요소로 갖거나 마디들로 포함하는 권력형식이다. '제국은, 내부적인 구분과 위계에 의해 찢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전쟁에 의해 오염된 전지구적 질서를 지배한다. 제국에서 전쟁상태는 불가피하다. 그리고 전쟁은 지배의 도구로 기능한다.'(다중, 17쪽-한글본) 오늘날이 평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항구적인 전쟁상태에 기반하는 허위적 평화일 뿐이다.

 <다중>은 이러한 제국의 분석에 기반하여 '제국 내부에서 자라고 있는 살아 있는 대안에 초점'을 맞춘다. 지구화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는데, 하나는 통제와 항상적 갈등이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위계와 구분의 네트워크를 전지구적으로 확산하는 제국, 다른 하나는 국가와 대륙을 가로질러 무한히 많은 마주침을 가능케 하는 협력과 협동의 새로운 회로를 창조하고, 그래서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공통성을 발견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제국. 그래서 여기에서 다중은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차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표현될 수 있는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네트워크, 우리가 공동으로(in common) 일하고 공동으로 살 수 있는 마주침의 수단들을 제공하는 네트워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다중>은 다중의 기획에 관하여 다룬다. 다중의 기획은 ①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고, ②개방적이고 포괄적인 전지구적 민주주의 사회를 요구하고 그것을 성취할 수단을 제공해준다.

3/다중(The Multitude), 민중(The People), 대중(The Masses), 노동계급(the working class)

 <다중>에서는 개념적 수준에서 다중을 민중, 대중, 노동계급과 같은 사회적 주체들과 구별한다.

 '민중'은 통일의 관점에서 파악된 것으로서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환원하며 인구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만든다. 즉 민중은 하나이다. 반면 다중은 다수이고 하나의 통일성이나 단일한 동일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내적차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문화들, 인종들, 민족들, 성별들, 성적 지향성들, 다양한 노동형식들, 다양한 삶의 방식들, 다양한 세계관들 그리고 다양한 욕구들(desires)로 구성되어 있다.

 '대중' 은 민중처럼 하나의 통일성이나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온갖 유형들과 종류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이 대중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본질은 무차별적이다. 모든 차이들은 대중속에 가라앉아 익사한다. 대중속에 인구의 모든 색깔들은 회색으로 바래고, 이 대중들은 회색으로 일치해서 움직일 수 있다. 이것은 대중이 무구별적인 동형의 집합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중은 다채색이다. 다중(개념은) 사회적 다양체가 내부적으로 다르게 남아 있으면서도 공동으로 소통하고 공동으로 활동하는 것이 성공적일 수 있음을 지시한다.

 '노동계급' 은 배타적이다. 노동계급은 소유주와 노동자를 구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좁게는 노동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구분한다. 즉 좁게는 노동계급은 산업 노동자만을 지시한다. 산업노동자는 농업노동자, 서비스업 노동자, 그리고 여타의 다른 부분 노동자를 분리한다. 넓게는 임금노동자만을 지칭한다. 이때는 임금노동자를 가사노동자, 빈민등 임금을 받지 못하는 여타의 모든 사람들(네그리에서는 이 사람들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을 분리시킨다. 반면에 다중은 개방적이고 포함적인(inclusive) 개념이다. 다중은 전지구적 질서(경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최근의 변화가 갖는 중요성을 포착하는 개념이다. 오늘날의 생산은 경제적으로 이해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산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다중은 (잠재적으로)사회적 생산을 하는 온갖 다양한 주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4/다중과 민주주의

 다중의 특징은 절대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제공해준다. 1) ‘삶정치적(biopolitical) 생산’. 소통, 협동, 협력은 공통된 것의 기반을 두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계속 확장하는 나선형 관계에서  공통된 것을 생산하기도 하다. 이 삶 정치적 생산은 엄밀히 물질적인 재화의 생산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것에 걸친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들을 생산한다. 이 삶정치적 생산과 이로 인한 공통된 것의 확장은 오늘날 전지구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지탱하는 하나의 강력한 대들보이다. 2)‘정치적 조직화’. 다중의 특징은 네트워크 조직으로 나아가는 더욱 민주적인 조직화를 향한 경향을 보여준다. 오늘날 국지적, 지역적 그리고 전지구적 수준에서 전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해방을 위한 저 많은 투쟁들과 운동들을 관통하는 공통적 흐름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다. 물론 이 열망이 실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전지구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가질 수 있는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많은 사례들을 제시하지만 구체적으로 실천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나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일차적 목표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기획이 정립될 수 있는 개념적 기초를 다듬어 내는 것이다.

 다중은 대안적인 전지구적 사회를 창조하기 위하여 제국을 관통해서 움직이고 있다. 다중의 탈근대적 혁명은 제국의 주권을 넘어서 앞을 바라본다. 부르주아지나 다른 모든 배타적이고 한정적인 계급형성체들과는 달리 다중은 사회를 자율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이것이 다중의 민주적 가능성의 핵심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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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31 0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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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고전적 공리주의,직관주의 비판

 롤즈는 공리주의와 직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론적으로 세밀히 따져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롤즈의 주요한 목적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와의 비교를 통해서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더 나은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 원초적 입장을 통하여 정의의 원칙을 정당화하는 논의로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과 직관주의에 대한 한계점은 각각 일반적인 논의의 수준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비판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공리주의와 직관주의를 일반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하더라도 롤즈의 비판은 그 일반성으로부터 본질적인 핵심을 비판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롤즈가 비판하는 것으로서 공리주의의 종류는 시즈워크에 의해 가장 명료하고 접근하기 쉽게 정식화된 엄밀한 고전적 이론이다. 롤즈에 의하면, 이것은 한 사회의 중요제도가 그에 속하는 모든 개인이 만족의 최대 순수 잔여량을 달성하도록 편성될 경우 그 사회는 정당한 질서를 갖춘 것이며 따라서 정의롭다는 견해이다. 롤즈에 의하면, 이러한 고전적 공리주의에서 사회정의는 집단의 복지라는 집합적 개념에 적용된 ‘합리적 타산(rational prudence)’의 원칙이다. (60쪽) 이것은 일견 매력적인 것이며 또한 합리적인 것인 듯 보임에도 불구하고 치명적 난점을 갖는다. 이것은 ‘옳음’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기각하기 때문에‘좋음’과 ‘좋음’의 문제가 상충되었을 때 답변할 수 없는 난점을 갖는다. 그래서 윤리학의 지평에서의 ‘옳음’과 ‘좋음’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목적론이 갖는 일반적 성격을 비판함으로써 공리의 원칙을 비판한다.

 또한 직관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에서 롤즈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주의를 생각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롤즈는 직관주의는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여러 개의 제1 원칙들이 있으며, 그들 간에 어떻게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인지는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 비추어 상호간의 비중을 잼으로써 결정할 수 밖에 없다는 학설로 본다. 직관주의자들은 정의의 대등한 원칙들간에 적절한 우열을 가려줄, 보다 고차적인 구성적 기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도덕현상의 복합성으로 인해 여러 가지 상이한 원칙들이 요구되므로, 그들을 설명하고 그 비중을 가려줄 단일한 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실질적으로 다원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귀결되고 이에 대하여 롤즈는 단일한 구성적 기준을 보여줌으로써 논박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논의전개를 보여줌으로써 직관주의는 당연히 논박되는 것이라 보는 것이며, 또한 이를 통하여 자신의 논의를 더욱더 강조하고 있다.

 물론 롤즈가 직관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다원주의로 귀결되는, 어떤 하나의 단일한 기준을 거부하는 것을 포기하는 직관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롤즈 또한 ‘직감적으로 생각하건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원초적 입장에서의 직관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몇 가지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2-1.고전적 공리주의 비판

 윤리학에서의 두 주요개념은‘옳음(the right)’과‘좋음(the good)' 이다. 그래서 윤리설의 구조는 이 두 가지 개념을 규정하고 관련짓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그 중에서도 간단한 것은 목적론이다. 롤즈에 의하면, 목적론은 좋음을 옳음과는 상관없이 규정하고 그리고 옳음은 그 좋음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정확히, 옳은 제도나 행위란 쓸 만한 대안들 중에서 최대의 좋음을 산출하는 것이든가 아니면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다른 제도나 행위만큼의 좋음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론은 합리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직관적 호소력을 갖기 쉽다. 물론 합리성이란 어떤 것을 극대화하는 것이며 도덕에 있어서 그것은 좋음(선)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최대의 선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사회가 편성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문제가 발생한다. 즉 목적론에서는 좋음이 옳음과 상관없이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1)첫째, 옳음이란 이같이 이미 명시된 선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라는 가설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2)둘째, 이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옳음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사물의 좋음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 옳음이란 이미 명시된 선을 극대화시키는 것이거나, (2) 옳음 그 자체의 기준 없이도 좋음(선)으로서 가치평가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고전적인 형식에 있어서의 공리의 원칙은 좋음(선)을 욕구의 만족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러한 입장은 어떤 것이 사회협동체의 적합한 조건인가는 그 여건 아래서 개인들의 합리적인 욕구들에 대한 만족의 최대 총량을 달성해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의해 정해진다. 이러한 입장은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난점을 갖는데, 그것은 이러한 공리의 원칙이 원칙적으로 어떤 사람들의 보다 큰 이익이 다른 사람들의 보다 적은 손실의 정당화를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리의 원칙에 충실하다보면 다수가 보다 큰 좋음(선)을 명분으로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롤즈에 의하면, 여러 선을 분배하는 그 자체도 또 하나의 선으로, 어쩌면 보다 상위의 선으로 간주된다면, 그리고 이러한 이론이 우리들에게 최대의 선을 산출하도록 지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고전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목적론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분배의 문제는 옳음의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배의 문제는 옳음의 문제로 귀결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2-2.직관주의의 한계와 제한적 수용

 롤즈에 의하면, 직관주의적 이론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1)첫째, 이 이론은 특정한 유형의 경우에 있어서 상반되는 지침을 주는 상충하는 제1원칙의 다원성으로 이루어진다.

 (2)둘째, 이러한 원칙들의 순위를 가려 줄 명확한 방법이나 우선성 규칙이 없다.

 그래서 직관에 의해서, 가장 그럴 듯하게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의해서 조정점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우선성 규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얼마간 변변찮은 것이어서 판단을 내리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직관주의는 다원주의로 귀결될 수 있으며 그래서 직관주의를 다원주의라고 할 수도 있게 된다.

 직관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대한 판단에서 제1원칙은 다름 아닌 다수라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직관주의는 이러한 다원성을 일정한 방식으로 조정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런 다원성이 더 옳은 것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롤즈에 의하면, 직관주의자는 오히려 도덕 현상의 복잡성 때문에 우리의 판단에 대한 완전할 설명을 하려는 노력은 소용이 없고, 대등한 여러 원칙들이 있다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할 때 처럼 평범한 이야기가 되고 말거나, 모든 것을 공리의 원칙으로 해결할 때처럼 오류 내지는 지나친 단순화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79쪽) 그래서 롤즈는 직관주의를 논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러 원칙들이 합당하게 가려질 비중을 설명할, 인정받을 만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즉 ‘직관주의에 대한 반박은, 직관주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종류의 구성적 기준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롤즈는‘직관주의’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성 문제를 기각하고 다원주의로 귀결되는 직관주의에 대하여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롤즈에 의하면, 오히려 직관주의는‘숙고된 판단을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직관에 대하여 제한을 두고 있다. 롤즈에 의하면, 직관은

 (1)첫째, 그것은 정의의 원칙들이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되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들은 어떤 선택적 상황의 결과인 것인데, 합리적인 존재인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이러한 원칙들의 우선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정의의 원칙들은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선택될 것이라는 사실에서 그 정당성의 근거를 찾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받아들여지는 근거 속에서 그 경중이 구분될 어떤 지침이나 제한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둘째, 서열적 순서, 축차적인 순서로서 배열된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즉 제 1원칙이 충족되어야 제 2원칙에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직관주의와 다른 점은 한꺼번에 경중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열적 배열을 함으로써 모든 원칙들의 경중을 한꺼번에 가리지 않아도 되며, 그 순서상 앞선 것은 뒤따르는 것에 비해 이른바 절대적인 비중을 가지며 예외 없이 타당하게 된다. 그래서 롤즈는 특수 경우로서 실제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규제하는 원칙보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우선시킴으로써 이런 식으로 순서를 매기고자 한다. (82~85쪽)

 다시 롤즈의 논의를 정리하면, 롤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서 직관에의 의존이 두 가지로 집중된다고 밝히는데, (1)첫째, 우선 사회의 체제 내에서 그 체제를 판단하게 될 입장을 선정하고, 다음에 이 입장에 있는 대표적인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특정 체제의 기본구조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묻게 된다. 그렇다면 직관에의 의존은 직관주의적 입장의 총합-배분의 이분법에서와는 다른 성질을 띠게 되고 그 정도도 훨씬 줄어들게 된다. (2)둘째, 우선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직관적인 판단에의 의존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키는 일이다. 어떤 종류이든 간에 직관에 전부 의존하는 것을 피할 수 있거나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실제적인 목적은 공통된 정의관을 제시하기 위한 판단에 있어 합리적으로 믿을 만한 합의에 도달하는 일이다.(86~87쪽)

 다음페이퍼에서는 원초적입장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계약론적 설명방식과 반성적 평형을 살펴봄으로써 롤즈의 원초적 입장의 가상적 상황이 무엇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인지, 어떻게 찾아가는 것인지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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