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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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영하는 지적인 작가다.

'지하철 역사에서 먼지가 떠다닌다'는 문장이 그에게로 가면 '먼지가 브라운 운동을 한다'라고 바뀐다. 

작은 비유들도 다른 책의 내용 등과 연결되며, 읽는 재미를 쏠쏠하게 준다.

<빛의 제국>은 남파 간첩의 좌충우돌 하루를 다룬다.

기영이 좌충우돌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결국 '선택'에 있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남쪽과 선택의 여지는 없고 오로지 선택만 되어지는 북쪽.

그런 북쪽에서 남파된 지 21년이 된 기영에게 갑자기 중대한 결단과 선택의 순간이 온다.

북측으로 돌아갈 지 말지. 이 선택이 그의 모든 존재를 뿌리 째 흔든다. 가야하나? 남아야 하나? 

'선택'의 권한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 같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남한 태생 기영의 부인 마리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결국 자신의 선택과 인생에 좌절하고, 분개하고 후회한다. 

처음 대학 새내기 시절 '선택'한 압구정동의 워킹 강의는 사람들의 작은 배반이라는 쓴 맛만 본 채 포기해야 하고 결국 마리는 동향인 광주 사투리가 정겨운 NL 동아리를 '선택'한다.

북쪽에서 요원으로 길러져 철저히 '선택'을 차단 받아 온 기영에게는 오히려 '선택'이 배제돼 있어 후회가 적은 듯 하다. 

다들 인생의 작은 부분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나비효과처럼 엄청난 파장을 갖고 올 수 있다...는 '인생의 선택'에 대한 진부한 잠언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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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선생의 사랑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현송희 옮김 / 민음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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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 주위에는 피안 선생 같은 사람과 하다못해 그렇게 되려는 맹아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부적응자.

이 책이 재밌다고 했던 사람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피안선생은 몸으로 소설을 실천하고 삶으로 소설을 살아낸다.

결국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이 된다. 이런 삶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책 자체는 번역투의 문장 때문인지 어법에 어긋난 단어 등등이 읽는 흐름을 매끄럽지 못하게 한다.

풋나기, 풋내기가 혼용되고 제목에 나오는 <피안>이라는 단어부터가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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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마고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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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점호화주의, 썩 마음에 드는 개념이다.

일점호화주의란 이런 것이다. 이를테면 돈이 없으면 열흘을 바나나 우유만 마시면서 쫄쫄 굶다가 어느 하루 프랑스 요리를 푸아그라부터 샤베트까지 풀 코스로 맛보며 식욕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점호화주의가 필요하냐하면...

우리의 월급으로는 평생을 살아도 유명 여배우의 하루 술값도 안 나오기 때문이다. 뭐하러 낑낑대며 구차하고 치졸하게 사느냐는 것이다.

일점호화주의라는 조어도 상당히 적절한 것 같다. 

비루한 삶이 일탈을 향해 한 점으로 수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학 때 읽었으면 좋아했겠지만 서른을 코 앞에 둔 나는 어느새 보수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삶의 모험보다는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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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마고 / 2005년 8월
절판


나는 달만 쳐다봐도 눈물을 글썽이는 가련형의 여성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여성은 대체로 재수가 없다. 아무리 큰 재난이 닥쳐도 언제나 미소 짓는 여성들이 있다. 그런 여성에게서 진정한 슬픔을 발견할 때 진정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95p쪽

어쨌든 죽는 동기나 이유는 대부분 꾸며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적이며 허구적이다. 다자이 오사무처럼 기모노 한 벌로 예정이 바뀔 수도 있다. 자살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허구이자 우연이기 때문이다. -251p쪽

자살은 인생을 허구화시키는 의식이자 연출법이 바탕이 된 축제이며, 자기표현이고 성스러운 일회성이고 그리고 쾌락이다. 사는 자유와 죽는 자유에 동등한 가치를 부요하기 위해서라도 모방을 배척하고 엄격한 라이선스 규약을 만들어 특권계층의 점유물로 삼아야 한다.-260p쪽

만약 이것이(유행가) 오동가요나 합창곡처럼 연대감이나 신뢰를 바탕으로 불린다면 어떤 형태가 될까? 어차피 저를 속일 거라면 죽는 날까지 속여주세요. 수만 명이 이렇게 <도쿄블루스>를 합창한다면 이를 듣고 감동하는 사람은 정치인 정도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유행가는 혼자 부르는 노래다. 그리고 이것은 고독한 대중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처리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286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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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천년의 여행 - 신화에서 역사로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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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엄청 재밌는 책이다.

몇 년 전 잔혹동화라는 게 유행한 적이 있다. 나도 그 때 유행에 편승해 <잔혹한 그림동화>라는(제목이 확실한지는 가물가물하다) 일본 작가가 썼다는 책을 빌려 읽었었다. 그 책은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자기의 발을 잘라 억지로 구두에 발을 집어 넣고 나중에 새들에게 눈이 쪼여 장님이 된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실제로도 그림동화의 원본이 그렇다). 엄청난 흥분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다.상식을 뒤집는 것들에는 흥분하기 마련이다.

이런 책들이 유행을 휩쓸고 간 뒤 이제는 원래 동화가 잔인했다는 사실이 상식이 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왜? 왜 그런가이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가 왜 그렇게 잔인한 걸까. 또 왜 같은 이야기가 신기하게도 세계 이곳저곳에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신데릴라로 한국에서는 콩쥐팥쥐로, 필리핀에서는 언니들을 젓을 담그는 식으로 똑같이 전개되는 걸까.

단턴은 원래 이야기가 구성될 당시의 사회가 잔혹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정신분석학자들은 사회에 난무한 성과 폭력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아이들이 자라 부딪치게 될 사회는 성과 폭력이 난무한다. 이야기 속에서 방어기제를 습득하는 것이다.

또 레비 스트로스 등이 고안한 구조주의의 틀에서 보면 예쁘고 착한 아이가 하층에 못 생기고 나쁜 아이가 상층에 위치한 구조는 잘못된 틀이다. 그 구조를 바로 잡는 것은 결국 남성이다.

근친상간의 모티브로 이야기를 분석하는 시선도 있다. 이 설명에는 심청전이 혜성과 같이 등장해 머리를 때린다. 심청전을 근친상간의 모티브, 엄마와 딸의 경쟁관계로 분석하고 있다. 정말 입체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고대의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에 가서는 고개가 갸우뚱하기도 하지만 중동 지방에서는 실제로 '신발' 이야기가 들어있는 여성 의례가 있었다.

우연히 집어들었지만 정말로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책이다.

<고양이 대학살>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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