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평전
이태복 지음 / 동녘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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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자의 노력이 보입니다. 비교적 치밀하고 상세하게 도선선생님의 일생을 연구하였습니다.

허나 필력이 부족해서인지 책에 몰입하게는 잘 안되군요.

허나 도산선생님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어른이시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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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0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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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이라면 아리랑이 떠 오르고 아리랑하면 김산이 떠 오릅니다. 잘 알지 못하던 김산...

오늘 김산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 분은 장지락 의사이시며 조국독립을 위해 한 평생 초개처럼 살다가신 우리 한국의 영원한 투사이십니다.

그런데 이 책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저자이신 이원규선생이 사학자가 아니신 작가라 그러신지 한 편의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소설이라고 다 재미있지는 않겠지요? 허나 이원규선생의 필력이 대단하신것 같습니다. 정말 흥미진지하게 앉은 자리서 자세만 고치며 다 읽었습니다.

600p가 넘는 분량인데도 불과 6시간만에 다 읽었네요. 김산 열사, 정말 열사요, 의사요 투사입니다. 그분의 일생은 생사가 늘 함께 하였으나 늘 학문과 교양에 힘쓰시며 오직 조국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정말 15살의 어린 나이에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던 장지락 선생!

그 분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청아하셨던 언행에 실로 존경의 말씀을 아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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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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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을 존경합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고 단재 선생의 대쪽같은 기질과 일관된 선비정신을 흠모하였습니다.

 

성장하여서는 단재 선생이 담배를 즐기셨음을 알고 이상한 동질감도 받았습니다.

최근 방송 삼사에서 史劇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저는 이 사극들을 보면서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이제 알았습니다. 저 사극의 출처는 위대한 “조선 상고사”였습니다.

 

그럼 조선상고사가 허구이기에 사극이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위대하기에 드디어 21c에 빛을 봐서 우리의 곁에 돌아오게 된 겁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이리 배웠습니다. “주몽이 대소를 피하였고 졸본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니 고구려이다. 거기서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고 그 후 부여에서 본처와 유리 왕자가 오자 비류와 온조는 남하하여……. 중략” 허나 사실은 무엇이냐…? 드라마 “주몽”에서 나오듯 소서노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란 겁니다. 그것이 고구려 건국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살던 과부 소서노가 주몽과 결혼하였고 주몽은 그 발판으로 고구려를 건국하고 부여에서 본처와 유리 왕자가 찾아온 후 온조와 비류는 소서노를 모시고 남하한 것,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물론 MBC “주몽”은 조선상고사와 약간 내용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동안 다소 속고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진실이요, 진리라고 알고 있던 역사의 사실이 거짓이라 생각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약 1세 기전 돈도 없이 만주벌판을 다니며 철저한 고증과 현장 답사를 하였습니다. 또한, 북경에서 오래 사셨던바, 만주족, 몽골족 식자층과 깊이 있는 교류를 하여 많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고 증명하였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단재 선생은 산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사대 사관주의 내지 식민사관주의에 빠져 중국 고서나 삼국사기에 의존하여 역사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내려오는 역사를 그야말로 논리적으로 증명해 냈습니다.

 

단재 선생은 역사를 과학적으로 논리정연하게 서술하였고 그 증명방법도 과히 위대하였습니다. 단군이래 이런 사학자는 처음입니다. 단재 선생은 가난하여도 확실한 증거와 증명을 위하여 만주벌판을 헤매었고 돈이 없기에 서점에서 온갖 서책을 서서 읽었으며 필사하였습니다. 또한, 부족한 사료에서 살아있는 역사를 유추하고자 온갖 서적을 탐독하였고 연구하였습니다. 이런 단재 선생! 부러질망정 굽히지 않는 정신으로 양심과 정직으로 살아 있는 역사를 만들어 내신 선생은 바로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태양이 아니겠습니까?




단재 선생은 차가운 일제의 뤄순 감옥에서 서거하셨습니다. 일생을 참 양심의 지식인,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우리 민족의 혼과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깨우고자 일생을 살다 가셨습니다. 정의를 위해선 굽히지 않고 민족의 자존심을 위해선 개인의 최소한의 생활마저 포기하셨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가장 싫어했다는 단재 선생.




그는 비록 가셨지만 우리 역사의 참된 기상으로 우리 민족의 태양으로 우리의 절개요, 불멸의 자존심으로 영원히 살아 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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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11-25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trl + v 키를 쓰시면 될텐데요.
 
한국의 부자인맥
이태규 지음 / 청년정신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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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들은 아주 호평을 하셨던데 나는 이 책을 몇 페이지 읽지도 않고 인상을 쓰게 되었다.

솔직히 저자가 바쁘셔서 대필하여 펴낸 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강하게 든다.  책의 19p를 보자.

 

"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것은 바로 쌀가게 종업원 시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쌀가게 주인은 빌려 주었던 돈 3,000환을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3,500환을 더 빌려 주기도 했다. 그들은 '정주영'이라는 사람 하나만을 보고 돈을 빌려 준 것이다.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열정과 신용만 있다면 돈을 빌려줄 사람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단 한도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 준 적이 없네네. 오직 신용만을 보고 빌려 주지. 그런데 신용만 보고 빌려 준 돈을 떼인 적은 아직까지 없네. 그게 내 자랑이야.'  잿더미 공장 앞에서 오직 신용만으로 돈을 빌려 재기한 사람다운 말이다."

 

아래는 정주영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이다.

 

복흥상회 생활 4년 만에 정주영은 감히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았다. 가게를 넘겨받으라는 것이다. 난봉꾼 아들에게 지치고 화가 난 주인 아저씨는 아들 대신 정주영을 택했다. 이로써 정주영은 단 한 푼의 자본금도 없이 신용만으로 한낱 쌀 배달꾼에서 쌀가게 주인이 됐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2세, 네 번째 가출에 성공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정주영은 가게 이름을 경일상회(京一商會)로 바꿔 달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려움은 뜻밖에 찾아온다.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한 기운이 온 세상을 뒤덮기 시작하던 1937년 일제 총독부는 전시체제령을 내렸다. 쌀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결국 2년 뒤 전국의 쌀가게가 모두 문을 닫게 됐다. 가게를 정리한 정주영은 7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논 2천여평을 사드리고 결혼도 한다. 소 판 돈을 훔쳐 달아났던 불효자의 축소판 금의환향이었다.


이듬해 다시 서울로 돌아온 정주영은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이때 우연히 예전의 쌀가게 단골을 만나 아현동 고개에 있는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매물로 나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단골은 마침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이라 자동차 분야에 눈이 밝았다. 문제는 인수자금이었다.


정주영은 쌀가게를 할 때 거래를 했던 삼창정미소의 오윤근(吳潤根) 씨를 찾아갔다. 오 씨는 신용을 담보로 선뜻 3천원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정주영과 자동차의 첫 인연이 맺어진다. 아도서비스를 인수한 정주영은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공장을 돌린 지 25일쯤 지났을 때 한 직원이 실수로 불을 내는 바람에 공장은 물론이고 손님들이 맡겨 놓은 자동차까지 몽땅 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외상으로 들여놓은 부속품 값에 변상해야 할 고객 자동차 값까지 얹혀지면서 정주영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도리가 없었다. 정주영은 다시 오 씨를 찾아갔다. 이대로 망하면 당신 돈도 갚을 길이 없으니 돈을 더 빌려달라고 사정했다. 오 씨는 “내 평생에 사람 잘못 보아 돈 떼였다는 오점을 안 남기고 싶으니 다시 더 빌려주겠다”며 3천5백원을 더 내놨다. 결국 신용이 정주영을 살린 셈이다.

 

 

 

결론

 

위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오윤근씨는 복흥상회(훗날의 경일상회)의 원주인이 아니다.

 

이 책을 보니 저자는 강의를 할 때, 준비하지 않고 그냥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과 다른 내용이 초반부터 등장하여 참 실망이 컸다. 윗 글의 파란색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정주영회장이 저 말을 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그 다음의 문제는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게 무엇이냐는 거다!!!

 

부자 되기 인지, 인맥 만들기 인지, 인맥 만들어 부자되기 인지, 행복한 삶 살기인지...

 

적어도 책을 내려면 많은 준비를 하고 작은 부분까지 신경써서 최소한의 정보전달에는 오류가 없기를 바란다. 오류는 더 많으나 지면의 관계상 생략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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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평전 -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강주상 지음 / 럭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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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학생 시절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었다.

그 이후 영화로도 관람하였고 이휘소라는 이름만 들으면 웬지 모를 아련함과 서글픔이 가슴을 눌려왔다.

약소국에 태어나 보다 큰 공부를 위하여 도미한 이휘소 박사,  천재 과학자로써 세계 최고 선진국 미국에서 대한민국의 위대함을 알리고 우리 국민에게 한 줄기 빛이요, 희망이 되었던 이 박사, 조국과 민족의  서러움을 외면할 수 없어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자주국방의 완성이라 생각되어진 핵무기 개발에 목숨을 바친 진정한 애국 과학자...

이것이 내가 알던 이휘소 박사였다.

 

그런데 오늘 이휘소 교수의 직계제자인 고려대학교 강주상 교수님의 평전을 읽으니 이것은 모두 허구요, 창작이었다. 강주상 교수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기엔 너무나 정확한 자료와 이 박사의 가족들이 취한 행동및 이박사와 강교수의 관계는 철옹성과 같다. 이휘소 박사는 도미 후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 되어 갔다. 결혼에 홀어머니의 승낙을 바라는 편지가 아닌 통고의 편지가 갔었고 일부러 찾아온 대학동기에게 "HI"라고 인사하며 집으로 들어오게 하지도 않았다. 처음만난 사제지간으로 미국에서 처음만난 강교수와는 영어로 시작해 영어로 대화를 끝맺었으며 조규석이라는 학생에게 학위지도를 하다 너무 힘이 들어 한국학생을 배제하는 마음까지 가졌고 이 박사의 아내와 자제들은 한국말을 전혀 몰랐으며 된장찌개 조차도 결혼 후 한참이 지난 후 한국 유학생에게 방법을 배워 조리했으며 기어코 한국국적마저 버렸으니 그는 겉은 가난한 한민족이나 속은 위대한 미국인이었다.

예전에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1950-60년대에는 국내의 최고 실력파를 국비로 유학보냈다. 특히 이공계 분야에 많이 보냈는데 그것은 내일의 조국발전을 위한 초석이었다. 그 시대에는 비행기를 탄다는것이 영광이었고 미국에 간다는 것은 지금의 우주여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허나 실제로 귀국하여 조국에 봉사한 이들은 10%가 되지 않는다. 가난한 조국의 배려와 눈물을 잊고 그들은 보다 나은 연구환경과 조건을 들어 조국을 배신한 것이었다."  결국 이휘소 박사도 위의 90%의 인물이 아닌가? 일신의 안위와 연구를 위해 가난한 조국을 열악한 연구환경이라는 이유로 저버린것이 아니냐 말이다.

미국 시민권자니 한국인도 아니요, 미국인이다. 우리는 한민족이기에 그를 한국인으로 보지만 미국인이 영국 국적을 취득하여 사망했다면 우리는 그를 미국인이라 보겠는가?

나는 이 책에서 과연 그는 천재였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는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던 성웅, 진정한 애국자, 영원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大韓의 과학자는 아니었다.

이것이 진실이니 그 동안 소설에 의해 잘못된 사실을 안고 살아온 15년의 세월이 실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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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열정사이 2006-09-0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저도 감수성이 예민하던, 어린시절에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를 보고,
이휘소박사님에 대한 마음속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었죠.
당신의 리뷰를 보고, 나도 그렇구나, 내가 알고있던 이휘소의 이미지가
거기서 끝났었구나를 책을 읽기전에 느낍니다.

무소속 2008-08-2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왜냐하면 애국보다 물리학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가족, 내 나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는 한 존재의 실존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실제로 이휘소는 한국의 '입자물리이론' 대학원 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물의 이론을 추구하는 자연 철학자로써, 독재정권의 비합리성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유신체제가 시작되자 한국에 대한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기대마저 거두어버렸습니다.

지식과 감성 2010-09-2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책을 보면 이휘소박사가 미국유학을 가기 위해 받았던 장학금은
한국 정부나 한국의 어떤 장학회가 준 것이 아니라
<미국 공군 장교 부인회>가 준 것으로 나옵니다
만일 그 장학금이 한국에서 나왔다면
이휘소박사가
어떤 갈등을 했을지 여러 갈래 생각이 듭니다만 ..

2. 저는 그 분을 <한국의 물리학자>라는 카테고리에 국한 시키지 않고
<세계의 물리학자> 또는 <세계인>이라는 시각으로 본다면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그가 안타까우면서도
충분히 그의 입장이 이해되던데요 ...

만일 그가 한국에 돌아왔다면
열악한 연구환경 속에서
그가 제대로 연구해서
물리학 소립자 이론의 황금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요?
(현재 2010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한국의 연구 환경은 좋지 않습니다
미국의 페르미 연구소의 가속기
유럽 CERN의 입자가속기 강입자 가속기 등 ..
한국은 90년대 초반 포항에
작은 규모의 방사광가속기를 겨우 건립했을 뿐입니다 ㅠㅠ

기초과학을 보는 한국의 시각과
투자는 지금도 형편없습니다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