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




기고만장 2009-11-11  

출처: 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6069
 

알라딘 관련기사. 한번 읽어보시길. 

 
 
 


기고만장 2009-11-10  

우리 고전 읽기 하는 데 이 개인블로그를 사용하는 건 한계가 많은 듯.   

내가 글 쓸 공간도 없고, 피드백도 리플 형식으로 밖에 안되고... 

블로그가 아니라 카페형식이 모임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훨씬 나은 공간이라고 생각되는 데. 

어떻게 생각해?

 
 
 


좋은날 2009-10-02  

인터넷 더럽게 안되네...-_- 

  내 생일 (10.02) 

1. 

 오늘은 내가 식기당번이라 식기를 닦으러 가는데 맞선임이 나한테 "미역국 나와야 하는데 안 나와서 어떡하냐"고 했다. 나는 내가 오늘 식기당번이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미역국이 나오면 식기 닦기가 어렵나?'라고 생각하면서 맞선임이 뭔소리 하나 했다. 잠시 주고 가는 눈빛 속에서 '아차, 오늘이 내 생일이구나.'   맞선임이 해줄 게 없어서 미안하다는 둥 별소리를 다하길래 "원래 별로 생일 신경 안 씁니다"라고 하면서 식기 닦으러 갔다. 속으로는 '내 생일을 위해서 뭘 해주고 싶다면은 니가 좀 식기 닦아줘...'  

 사실 나는 생일에 그리 민감하지 않다. 민감하지 않다기 보다는 '둔감하다'라고 강하게 말해야 맞는 것 같다. 특히 '내 생일'에. 누구에게나 365일 중의 한 번 있는 날이니 1년에 한 번쯤은 스스로나 주위 사람들에게 생일을 맞은 이의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법도 하건만, 글쎄 나는 그냥 관심 없다. 다른 사람들의 생일이라고 한다면야, 생일 축하 안 해주면 뭔가 내가 나쁜 놈 되는 것 같아서... 혹은 생일 파티하자는 분위기에 휩쓸려... 생일 파티에 눈에 비친 정도인 것 같다. 특히나 내가 올해 우리 형의 생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나서부터는 나의 이런 무관심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내가 그리 건강치 못한 사랑을 하고 있었을 당시, 상대방이 태어나준 것에 대해 정말 기뻐한 적이 있었다. 상대방이 태어나서 기쁜 건지, 상대방이 태어나서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기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태워나줘서 고맙다"라는 종류의 말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나는 갑자기 내가 '생일'에 민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나 자신 스스로에게 있어서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그저 무관심한 게 아닌지 스스로 반문해보게 된다. 생일이란 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소중한 날이 아닐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날'인데, 그런 날만큼은 생일을 맞은 이에게 축하를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내 자신의 생일날에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 혼자 축하를 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흔적들을 성찰하고 전정(前程)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켜야 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태어난 날(형식상으로 몇 주기마다 돌아오는), 어쩌면 태어난 게 아니라 태어났다고 하는 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참 이럴 때 술을 만든 옛 조상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2.  

 어제는 국군의 날. 국군의 날을 맞이해서 상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22시에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영화를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바람에 내무실에서 다같이 보게 되었다. 일부일처제와 빠지는 것 하나 없는 원더우먼 같은 손예진은 그렇다치더라도 나는 영화를 보는 도중 흥분 또는 광분하는 우리 궁 사람들이 보인 '순수성'에 대한 결벽증이 참 뻔뻔한 것 같다. 자신의 성행위 경험이 많으면 '유능'한 것이고 상대방 여성의 성행위 경험이 많으면 더럽고 추하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걸le'라는 용어까지 써 가면서 화내는 남성들을 보면 결혼을 통해 여성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성의 과거까지도 지배하려는 별 쓰잘데기 없는 소유욕의 추함을 볼 수 있다. 

3.  

 11월 14일 한자시험만 끝나면 좀 마음 편히 책을 읽을 수 있으려나. 휴휴. 그래도 이왕한 거니 잘 따보자!  

 

 
 
 


좋은날 2009-09-20  

1. 

 일병이 된 이후로 한자를 오질나게 공부하고 있다. 한자 2급(09. 11. 14일자 시험)에 도전해볼까, 했는데 사실 만만치가 않다. 2355자의 한자를 다 외우고 있어야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어 어휘가 '한자어'로 어떻게 쓰이는 지 명확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은 날이 60일 남짓 되는데 분발해야 겠다. 

 다행인건 한자 외우는 게 힘들어도 끈질기게 집중해서 하고 있다는 사실과, 어떤 순간에는 '쾌감'까지도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내가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지겨움과 당장의 귀찮음을 제쳐 두고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게 매우 고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고집이 생기게 되고 그 고집에 따라 하다보면 집중도 하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쾌감까지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자어를 공부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 크게 봐서 두 가지다. 우선은 '한국어'를 좀더 깊게 공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3학년 1학기 당시 전국시대인성론 수업을 듣고 난후 맹자, 순자, 노자, 장자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쓰고 가야겠다."고 했지만 내일 써야겠-_-   

 2.  

 내일이 내일 모레가 되어버렸군. 한자어를 공부하는 순간순간마다 깜짝 놀란다. 도대체가 '한자'가 아닌 한국어가 없다는 것! 물론 최근에 와서는 상상플러스와 같은 대중 매체에서 순한글을 한국인들에게 알려주어 인기를 한몫 톡톡히 챙겼지만, 그래도 역시 한국어 어휘의 대부분은 한자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순간'이라는 단어를 보자.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태껏 '순간'이라는 단어의 뜻이 '한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한자'로 되어있다고 쳐도 "아 한자는 저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어 색깔이 짙어져 '순간'이라는 뜻이 생겠겼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명백히 틀렸다. '순간'이라는 단어의 뜻은 한자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순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서 '한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순간'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구성되어있는지 보자는 것이다.)  

 순간이라는 단어는 瞬(눈깜박일 순)과 間(사이 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한자어를 풀어보면 어떤 뜻이 될까? 바로 '눈깜박할 사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순간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아닌가. '순간'이라는 단어처럼 일상용어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는 사실 한자를 몰라도 괜찮다. 한자를 몰라도 그 단어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어가 가진 추상성의 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한자'를 알아야 그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굳이 '자기계발식'으로 말하자면 한국어 어휘에 능통해질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세계철학자대회 뒷풀이에서 하버드대학에서 언어철학을 전공하신 강 교수님의 말이 참 기억에 남는다. 강 교수님은 나이가 젊기도 하고 젊은 학생들과도 어울릴 수 있을만큼 나름 센스를 가지신 분이라 우리들은 평소에 궁금하던 점들을 물어볼 수 있었다. (몇몇의 학부생들과 교수들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적다. 그런 점에서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이 대부분 인문학도였기 때문에 당연히 관심사는 '언어의 문제'였다. 그때 많은 이들이 젊은 나이에 유학을 마치고 온 강진호 교수님은 어떻게 '언어의 문제'를 해결했냐고 여쭤보았었다. 

그러자 강 교수님은 딱 한 마디 하셨었다. "한국어를 잘하면 돼."  

강 교수님의 지론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은 영어를 매우 잘하는 축에 들지도 않았었고 외국에 살다온 적도 없다고 말하면서 다만 '한국어를 무척 잘했고 항상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보기에 '언어 감각'은 국적을 불문한다는 것이었다. 언어는 비스무리해서 한 언어의 감각을 익히게 된다면 자연히 다른 언어에 대한 감각도 높아진다는 것. 이것에 용기를 얻고 우선 한자 앤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 중!  

 맹자, 순자, 장자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는 별 쓸거는 없는데... 자기수양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것과 동양 철학(동양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넌센스. 도대체 어떻게 불교와 유교가 같은 범주로 묶여질 수 있다는 말인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에 쏟아지는 비난들과 편견들- 동양철학은 비합리적, 비과학적, 신비적이라는 딱지-을 극복하고 싶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