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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법원 10대 논쟁 ㅣ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는 저자가 대법관으로서 판결을 내렸던 사건 중 10개 판결을 추려 다시 곱씹어보는 책이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 삼성 경영권 승계 문제, 표현 및 종교의 자유, 성적 소수자의 권리 등 굵직굵직한 이슈들을 다룬다. 대법원 판결 과정에서 나온 다수의견, 소수의견, 별개의견, 보충의견들이 어떠한 논의과정을 가지고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핵심적인 논쟁 지점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10개 이슈를 읽으면서 관심이 갔던 주제도 있었고, 관심이 가지 않았던 주제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관심이 갔던 주제는 삼성의 탈법적인 경영권 승계였다. 교과서에 조달 전략으로만 소개되었던 전환사채, 신주인수권부사채 등이 어떻게 증여수단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살펴 볼 수 있었다. 막연하게 알고만 있었을 뿐, 법적인 쟁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몰랐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깔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재무 및 회계 비전공자들은 다소 힘들 수도 있다) 경영권 승계 전략이 불법적이고 탈법적인 걸 떠나서 그 방법이 워낙 교묘해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삼성이 먼저 연구하고 법이 뒤늦게 쫓아간다'라는 항간의 속설잉 사실일 수도 있다라는 무서운 생각을 갖게 한다. 자신의 경제적 이득이 연결되어 있으면 그만큼 간절 지는 걸까?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을 추진한 사람도 또한 법조인일지언데, 법의 허점을 이용한 그 명석함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경이롭기도(?)하고 두렵기도하고, 무섭기도 하다.
다음으로 관심 가는 주제는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이슈였다. 아무래도 04~05년도에 K군 단식 농성 문제가 불거졌고, 논술 및 면접 문제로 많이 출제되어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라. 면접 문제에서도 해당 사건의 견해를 질문 받았는데, 교수들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해당 전형에 합격하긴 했지만 그 찌뿌등함이 남아있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왜 교수들의 반응이 그랬는지 이해가 되었다.
면접 문제가 직접적으로 K군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 문제란 간단했다. 해당 학교는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사립대학이었는데, 수업으로서 종교행사 참석을 강요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전태일 평전과 K군 사건에 심취해있어서 그런지 다양한 관점을 사고하기보다는 격정적인 분노의식과 저항의식에 사로잡혀있어서 그런지, 단순하게 대답했다. 대답인 즉, 헌법은 인간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교수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던 거 같은데, 그에 대해 앵무새처럼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만 읊었었던 거 같다. 교수들의 반응이 싸늘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일거다. "아우, 얘는 힌트를 줘도 못 주워먹네"
왜냐하면 K군이 다녔던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는 자신이 자율적으로 선택했다고 말하기엔 무리인 측면이 있었던 반면, 대학은 국공립학교와는 달리 종교 교육또는 종교선전을 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가 있으며, 헌법상 자치권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대학이 종교 교육을 할 수 있는 권리와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충돌하고 있었고, 대법원은 이 경우에 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마 그 면접 문제의 모범답안은 이 내용이었을거라 추측된다.
헌법을 포함해서 모든 법은 이해관계의 각축장이다. 법이 일관성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헌법에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 또한 담고 있다. 갑 아무개의 권리와 을 아무개의 권리가 충돌한다. 판결에서의 문제는 결국 법적 논리를 어떻게 구성할지가 가장 중요해진다. 이익형량을 매겨 누구의 권리가 더 우선시되어야하는 가를 판결하는 것이 법조인의 몫이다. 열정,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법조문, 상황, 증거들을 모아 사실 관계들을 구성하고 이에 따라 경우의 수를 나누고, 단계 별로 법적 쟁점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어떤 권리와 의무들이 충돌하는지 심사숙고하여 따지는 과정이 바로 판결이다. 어떻게 보면 수학과도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전제와 상황 속에서 세세히 따져서 답을 도출해내는 수학과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조금은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다. 법조인의 화법으로 글이 씌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일까? 물론 사례를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안 보였던 것이 아니지만, 법조 판결문들이 그렇듯 문장의 호흡이 너무 길어 읽는데 힘겨웠다. 또한 다소 전문적인 용어들로 등장하여 읽는 내내 흐름이 뚝뚝 끊기곤 했다. 주석이 미주로 달려있어 일일이 찾아보기도 힘들었던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판사가 어떻게 글을 쓰고, 어떻게 사고하는지 거르지 않고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훌륭한 책이다. 자신의 법학 적성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갈등해결 방법에 있어서 법이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필요하다. 그러나 법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전문적인 분야고, 잘 모르는 분야이다. 앞으로 이런 책이 많이 출판되어 법이 대중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기도하여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대중들이 법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법에 대해 좀 더 관심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