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 이미령의 위로하는 문학
이미령 지음 / 샘터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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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윌리엄 포크너」


책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나의 서점 장바구니는 또 그 책에서 나온 책들로 가득 찬다. 예전에 박웅현 작가의 《책은 도끼다》 를 읽고 나서 그 책에 나온 거의 모든 책들을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그 저자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경험을 똑같이 느껴보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땐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책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던 시절이라 《책은 도끼다》에 나오는 책들은 거의 다 모르는 책들 투성이었지만 무작정 따라샀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나도 고전이라는 것에 눈을 떴던 것 같다. 책을 읽는 속도보다는 사모으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에 그때 사모은 책들 중 아직 절반도 다 못 읽었다. 하지만 그동안 다양한 책에 관심을 가진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면서는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익숙했기에 반가웠다. 물론 읽은 책보다는 어디선가 들어봤거나 집에 소장중인데 안 읽는 책이라던가 줄거리만 알고 있는 책들이 훨씬 많긴 했지만, 저자가 책에 대해 설명하면서 각 책들에 대한 줄거리를 워낙 재미나게 소개를 해놓아서 안읽었지만 읽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는 저자 이미령이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한 감상을 모아놓은 책이다.  총 서른권이 넘는 책들에서 느낀 감상들을 읽으면서 내가 읽었던 책에서는 저자와 느낀점을 비교해보고, 안 읽은 책에 대해서는 정보를 얻고 어떤 책인지 가늠해보면서 읽을 수 있어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의 책장엔 어떤 책이 꽂혀있는지 항상 궁금한 법이니까.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책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이라는 책에 대한 내용이었다. 쉰 다섯살의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는 고독하게 혼자 살아가는 노인이다. 가족도 없이 혼자 황무지 같은 벌판에 살아가는 그에게 희망이란 없어보인다. 하지만 그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하는 일이 있다. 바로 도토리 100개를 가지고 나가서 쇠꼬챙이로 집어 황무지 땅 깊숙히 심는 일이다. 그 땅은 자신이 소유한 땅도 아니며, 누구의 땅인지도 알 수 없지만 10만개의 도토리를 심으면 적어도 만개쯤은 장차 떡갈나무가 되지 않겠냐며 매일 그 일을 지속한다. 그를 지켜보는 책 속 화자는 노인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후 시간이 지나고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정신없는 전쟁을 겪는다. 화자는 전쟁터에서 정신없는 5년을 보내고 다시 그 동네로 돌아오게 되는데 돌아온 순간 대기의 알수 없는 빛깔을 느끼게 된다. 바로 노인이 심어놓은 도토리 들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서히 싹을 틔워 푸른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중에도 노인은 멈추지 않고 도토리를 심었으며 그렇게 시간이 지나 그 도토리들은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를 천연 떡갈나무 숲으로 변모시킨다.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하자 자연이 되살아나며 다시 시원한 냇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마을에 정착하여 채소를 키우고 꽃을 가꾸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도 이 거대한 숲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노인도 말하지 않는다. 

이 내용을 보면서 《나무를 심은 사람》을 직접 읽은 것이 아님에도 가슴 찡한 기분이 들었다. 그 노인은 아무 희망 없는 현실에서 장차 몇십년 앞을 내다보며 현실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나무를 심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숲을 만들어냈고, 또한 그것을 자신이 해냈다고 떠벌리지도 않는다. 심지어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고 하니 더 놀라웠다. 노인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 수많은 도토리를 심었을까. 당장에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일에 대해 꾸준한 노력을 지속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실제로 눈에 보이는 푸른 숲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웠다. 

예전에 고양이에게 주려고 귀리를 작은 화분에 심어놓고는 하루에 한번씩 들여다보며 왜 싹이 안나냐며 성질급한 불평을 해댔던 기억이 난다. 몇일 뒤 싹이 올라오자 신기하다며 물을 주며 키운 것도 잠시, 몇일 지나자 너무 많은 풀들이 작은 화분에서 왕성하게 자라자 어찌할바를 모르다 결국에는 몇 일 못가 시름시름 노랗게 변하더니 다 죽고 말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 조차도 꾸준히 관리하고 보살피는데에는 노력이 필요한 법인데 몇 십년 뒤의 미래를 바라보고 꾸준히 나무를 심은 그 노인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보다 훨씬 더 대단해 보인다. 그동안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아 읽어보지 않은 책이었는데 조만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시대에 걸친 경험과 희노애락이 들어있다. 어릴 때는 동화를 읽으며 자랐고, 어른이 되어서는 문학과 드라마, 영화등 을 통해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이 타인의 삶을 엿보고 싶어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그건 타인의 삶에서 내 삶에 대한 공감을 얻거나, 희망을 얻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타인의 삶과 그의 생각에 가장 깊숙이 접근할 수 있는 매체인 듯하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저마다의 공감점을 찾아 자기 삶에 견주어본다. 그러면서 위로를 얻기도 하고, 공감하며 함께 울기도 한다. 

예전에는 이야기가 주는 재미가 박진감 넘치는 책을 좋아했다면 요즘엔 사람의 심리를 깊이 잘 파고드는 이야기가 좋아진다. 책을 읽으면서 그만큼 사람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땐, 책에 대한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어차피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읽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어보며 감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라는 제목도 참 절묘하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살면서 슬픔과 고난을 겪기 마련이고, 수많은 책 속에서 나와 비슷한, 혹은 나보다 훨씬 심한 슬픔도 마주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문학은 타인의 슬픔을 마주하기 위해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슬픔을 대하는 법, 인생이라는 슬픔에 어떻게 대항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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