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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이 추리소설의 메인 트릭은 쌍둥이를 활용한 것입니다. 자, 이로써 출발점이 같아졌습니다. 그럼 추리의 여정을 시작해 주십시오."
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고전이자 교과서로 불리는 <살인의 쌍곡선(원제;殺しの双曲線)> 첫 장에서 저자 니시무라 교타로(西村 京太郎)는 '독자 여러분께'라는 짧은 서문에서 이같이 밝힌다. 영국의 추리소설가 로널드 녹스의 십계명(Knox's Ten Commandments) 가운데 열 번째 수칙에 의해 '독자에게 공정하게 도전하고 싶다'는 의미라고 한다.

자신만만한 저자의 공언대로 <살인의 쌍곡선>은 상당히 잘 짜여진 트릭과 탄탄한 스토리로 무장하고 있다. 등장인물 간 심리묘사가 그렇거니와, '사적 복수'에 대한 사회적 논란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저 미스터리물의 흥미를 넘어선 걸작의 느낌이다.
<살인의 쌍곡선>에 수차례 등장하듯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매우 유사한 플롯을 갖고 있지만, 공간적 배경과 살인의 진행 과정을 제외하면 독창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한 외딴섬에 초대된 사람들-서로 모르는-이 하나둘 살해되고, 그때마다 인디언 인형이 하나씩 사라지는 장치를 통해 독자들을 더욱 소름돋게 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크다. 드라마를 통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먼저 접했던 필자도 '인디언 노래'가 줬던 으스스한 전율을 아직 기억한다.
1970년대 일본 도쿄와 도호쿠 지방의 모습을 상상하며 사건을 따라가는 것도 흥미롭다. 약 50년 전 일본의 시대적 풍경과 생활상이 <살인의 쌍곡선>에 그대로 녹아난다.

이야기는 1944년 8월 일본의 어느 지역에서 두 명의 남자아이 탄생에서 시작한다. 두 아이는 일란성 쌍둥이여서 부모도 못 알아볼 만큼 똑 닮았다. 말라리아로 인해 일찍 병사한 아버지탓에 어머니 손으로 키워진 두 아이는 생김새와 함께 어머니에게 강한 애정을 품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빠서 그래! 그러니 복수하는 거야!" 쌍둥이 형제는 다짐한다. 형제의 약속은 목숨을 걸 정도로 비장하다. "만약 한 명이 죽으면 죽는 쪽이 모든 죄를 안고 가기로 하자. 다른 한 명은 평생 모르는 척하며 살아가는 거야." 이제 20대가 된 두 남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들은 세간의 상식으로 보면 '악(惡)'으로 불릴 계획을 세우는데 몰두한다.
"갑작스러운 편지에 많이 놀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쿄 작은 회사에서 타자수로 일하는 도베 교코는 뜻밖의 초대장을 받는다. 결혼을 앞두고 잔뜩 허리띠를 졸라매야하는 교코에게 초대장은 '공짜 스키 여행' 초대가 갑작스럽지만 반갑다. 미야기현 K마을 관설장(觀雪莊)에서 날아온 초대장은 교코를 포함해 여섯 명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도착한다.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황홀한 스키여행이 아니라 호텔 오락실에 놓여진 볼링핀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한명씩 늘어가는 연쇄살인이다. <살인의 쌍곡선>은 엄청난 두뇌회전과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진 탐정에 의존해 사건을 풀어가기 보다 독자와 함께 사건을 객관적으로 이해면서 본질에 다가가도록 유도한다.
도호쿠 호텔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과 동시에 도쿄에서는 연쇄 강도사건이 발생한다. <살인의 쌍곡선>이 특이한 구조를 갖는 것은 이렇게 상당한 거리를 두고 두개의 사건이 함께 진행되면서도, 끝내 하나로 연결되는 스토리 때문이다. 어쩌면 '쌍곡선'이 그려내는 모습과 두 사건의 교차가 유사하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 이 세상이 나빠서 그래."
도쿄에서 강도사건을 벌이는 쌍둥이 형제가 내던지는 말은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누군가의 내면에 숨어있는 타인에 대한 증오, 세상에 대한 불만을 공론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작동한다. 쌍둥이 형제의 파렴치한 연쇄 강도 사건을 수사하는 구도 경사에게 범죄의 시나리오가 담긴 익명의 편지가 전해지면서 도쿄와 도호쿠의 사건은 가속페달을 밟으며 전개된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올드보이>에서 보아왔듯 사회적 규칙이나 법률을 떠나 시도되는 '사적 복수'가 과연 타당할까. 단순한 살인, 평범한 강도가 아닌 정당한 복수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계획은 오롯이 독자들에게 질문으로 남는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영국의 추리소설가 로널드 녹스의 십계명(Knox's Ten Commandments)은 다음과 같다.
1. 범인은 반드시 이야기 초반에 등장해야 한다.
2. 탐정은 초자연적이거나 불가사의한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
3. 비밀의 방, 비밀 통로는 단 하나만 허락된다.
4. 미지의 독, 또는 과학적 설명을 길게 덧붙여야 하는 장치를 사용해선 안된다.
5. 중국인이 등장해서는 안된다.(추론컨데 여기서 중국인은 말도 안되는 마법사처럼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캐릭터를 뜻하지 않을까 한다.)
6. 직감, 우연으로 사건을 해결해선 안된다.
7. 탐정 본인이 범인일 수는 없다.
8. 독자에게 드러나지 않은 증거가 탐정에게 독점적으로 제시돼선 안된다.
9. 탐정의 조력자는 모든 생각을 독자에게 공개해야 한다.
10. 쌍둥이 혹은 1인 2역이 등장할 경우 독자에게 충분히 암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