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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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들', 그리고 '사람의 아들'. 


이문열을 읽을 때, 특히나 <사람의 아들>은 긴 호흡이 필요하다. 무거운 주제만큼이나 진지한 사념이 행간에 무수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무려 다섯 번째 개정신판을 펴낸 우리 문학의 고전 <사람의 아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과 이유를 이야기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진짜 신'을 찾아 떠나는 여정과 자신-혹은 모든 인간-과의 치열한 내적 투쟁은 <사람의 아들> 전체를 뒤덮고 있다.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에 집중하려했던 칼릴 지브란의 노력도 어쩌면 이문열의 작품과 상통할 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런 삶을 이어가고 있던 대구 동부서의 남경호 경사는 까다로운 살인사건을 접하게 된다. 서 관할지역인 영지면 야산에서 사체로 발견된 민요섭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그가 남긴 노트를 통해 '신'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진행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신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낯설지 않다. 설익은 종교논쟁이야 누구든 한번쯤 벌여봤지않을까. 우리는 <사람의 아들>을 통해-남경호와 민요섭, 아하스 페르츠를 통해-보다 깊숙한 여행과 토론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에게 은혜를 입은 것은 그였고, 우리가 그에게서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선택하였다. 아니, 그 이상으로, 어쩌면 그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기행에 가까운 민요섭의 행적, 그를 좇아가는 남경호의 여정은 마치 아하스 페르츠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이혼한 장로 부부, 부산의 하숙집 주인과 아들의 사연, 그 아들의 동거인에 얽힌 이야기 등 각자가 그들만의 '진짜 신'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닮아있다. 남경호가 살인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과 절묘하게 연결된다.


"이제 저 거짓된 '사람의 아들'은 그가 온 곳으로 돌아갔고, 대지는 다시 너희들의 손에 붙여졌다.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비롯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


마침내 위대한 지혜가 '사람의 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고통과 결핍, 공포와 원망이 빚어낸 우상들로 인해 시달리는 인간의 절규에게 답한다.


<사람의 아들>은 1979년 제3회 오늘의 작가상에 선정됐다. "인간 존재의 근원과 그 초월에 관계되는 심각한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진지함이 그리 흔치않은 문학적 품성임을 상기하였다."는 선정 이유조차 그저 지나칠 수 없는 글귀로 남는다.


작가의 말대로 '인자(人子)'라는 옛날식의 한자 제목을 단 200자 원고지 400매 남짓의 중편, 어찌 보면 고색창연한 구도소설이었을 지도 모를 작품이 <사람의 아들>로 남아 여전히 읽히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영원히 풀지 못할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으로 느껴진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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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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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추리소설의 메인 트릭은 쌍둥이를 활용한 것입니다. 자, 이로써 출발점이 같아졌습니다. 그럼 추리의 여정을 시작해 주십시오."



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고전이자 교과서로 불리는 <살인의 쌍곡선(원제;殺しの双曲線)> 첫 장에서 저자 니시무라 교타로(西村 京太郎)는 '독자 여러분께'라는 짧은 서문에서 이같이 밝힌다. 영국의 추리소설가 로널드 녹스의 십계명(Knox's Ten Commandments) 가운데 열 번째 수칙에 의해 '독자에게 공정하게 도전하고 싶다'는 의미라고 한다.



자신만만한 저자의 공언대로 <살인의 쌍곡선>은 상당히 잘 짜여진 트릭과 탄탄한 스토리로 무장하고 있다. 등장인물 간 심리묘사가 그렇거니와, '사적 복수'에 대한 사회적 논란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저 미스터리물의 흥미를 넘어선 걸작의 느낌이다.



<살인의 쌍곡선>에 수차례 등장하듯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매우 유사한 플롯을 갖고 있지만, 공간적 배경과 살인의 진행 과정을 제외하면 독창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한 외딴섬에 초대된 사람들-서로 모르는-이 하나둘 살해되고, 그때마다 인디언 인형이 하나씩 사라지는 장치를 통해 독자들을 더욱 소름돋게 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크다. 드라마를 통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먼저 접했던 필자도 '인디언 노래'가 줬던 으스스한 전율을 아직 기억한다.



1970년대 일본 도쿄와 도호쿠 지방의 모습을 상상하며 사건을 따라가는 것도 흥미롭다. 약 50년 전 일본의 시대적 풍경과 생활상이 <살인의 쌍곡선>에 그대로 녹아난다.



이야기는 1944년 8월 일본의 어느 지역에서 두 명의 남자아이 탄생에서 시작한다. 두 아이는 일란성 쌍둥이여서 부모도 못 알아볼 만큼 똑 닮았다. 말라리아로 인해 일찍 병사한 아버지탓에 어머니 손으로 키워진 두 아이는 생김새와 함께 어머니에게 강한 애정을 품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빠서 그래! 그러니 복수하는 거야!" 쌍둥이 형제는 다짐한다. 형제의 약속은 목숨을 걸 정도로 비장하다. "만약 한 명이 죽으면 죽는 쪽이 모든 죄를 안고 가기로 하자. 다른 한 명은 평생 모르는 척하며 살아가는 거야." 이제 20대가 된 두 남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들은 세간의 상식으로 보면 '악(惡)'으로 불릴 계획을 세우는데 몰두한다.



"갑작스러운 편지에 많이 놀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쿄 작은 회사에서 타자수로 일하는 도베 교코는 뜻밖의 초대장을 받는다. 결혼을 앞두고 잔뜩 허리띠를 졸라매야하는 교코에게 초대장은 '공짜 스키 여행' 초대가 갑작스럽지만 반갑다. 미야기현 K마을 관설장(觀雪莊)에서 날아온 초대장은 교코를 포함해 여섯 명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도착한다.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황홀한 스키여행이 아니라 호텔 오락실에 놓여진 볼링핀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한명씩 늘어가는 연쇄살인이다. <살인의 쌍곡선>은 엄청난 두뇌회전과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진 탐정에 의존해 사건을 풀어가기 보다 독자와 함께 사건을 객관적으로 이해면서 본질에 다가가도록 유도한다.



도호쿠 호텔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과 동시에 도쿄에서는 연쇄 강도사건이 발생한다. <살인의 쌍곡선>이 특이한 구조를 갖는 것은 이렇게 상당한 거리를 두고 두개의 사건이 함께 진행되면서도, 끝내 하나로 연결되는 스토리 때문이다. 어쩌면 '쌍곡선'이 그려내는 모습과 두 사건의 교차가 유사하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 이 세상이 나빠서 그래."



도쿄에서 강도사건을 벌이는 쌍둥이 형제가 내던지는 말은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누군가의 내면에 숨어있는 타인에 대한 증오, 세상에 대한 불만을 공론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작동한다. 쌍둥이 형제의 파렴치한 연쇄 강도 사건을 수사하는 구도 경사에게 범죄의 시나리오가 담긴 익명의 편지가 전해지면서 도쿄와 도호쿠의 사건은 가속페달을 밟으며 전개된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올드보이>에서 보아왔듯 사회적 규칙이나 법률을 떠나 시도되는 '사적 복수'가 과연 타당할까. 단순한 살인, 평범한 강도가 아닌 정당한 복수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계획은 오롯이 독자들에게 질문으로 남는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영국의 추리소설가 로널드 녹스의 십계명(Knox's Ten Commandments)은 다음과 같다.


1. 범인은 반드시 이야기 초반에 등장해야 한다.

2. 탐정은 초자연적이거나 불가사의한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

3. 비밀의 방, 비밀 통로는 단 하나만 허락된다.

4. 미지의 독, 또는 과학적 설명을 길게 덧붙여야 하는 장치를 사용해선 안된다.

5. 중국인이 등장해서는 안된다.(추론컨데 여기서 중국인은 말도 안되는 마법사처럼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캐릭터를 뜻하지 않을까 한다.)

6. 직감, 우연으로 사건을 해결해선 안된다.

7. 탐정 본인이 범인일 수는 없다.

8. 독자에게 드러나지 않은 증거가 탐정에게 독점적으로 제시돼선 안된다.

9. 탐정의 조력자는 모든 생각을 독자에게 공개해야 한다.

10. 쌍둥이 혹은 1인 2역이 등장할 경우 독자에게 충분히 암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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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코를 위해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모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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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미스터리물 마니아라면 작가와 머리싸움을 벌이며 스토리를 음미하게 된다. 행간에 숨어있는 트릭, 캐릭터 사이에 흐르는 오묘한 복선 등 '완벽한' 미스터리를 위한 장치를 하나하나 발견하고, 저자-혹은 주인공-와 함께 본질을 유추하는 묘미가 미스터리 소설에는 가득하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노리즈키 린타로(法月綸太郎)의 <요리코를 위해(원제:頼子のために)>는 탁월한 매력을 갖고 있다. 피해자와 범인, 그리고 일단의 해결을 책 머리부분에 밝혀두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미리 던져진 사건의 줄거리에 숨겨진 이면을 분석하며 새로운 본질을 찾아가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1989년 8월 22일 요리코가 죽었다."


대학교수인 니시무라 유지는 어느날 사랑하는 외동딸 요리코의 죽음을 맞이하고 충격에 빠진다. 14년 전 교통사고는 아내 우미에의 척수에 돌이킬 수 없는 중상을 입혀 하반신의 모든 기능을 잃어버리게 하고, 동시에 세상 빛을 보기도 전 배 속에 있던 8개월된 아들을 함께 데려갔다. 남은 요리코마저 살해되자 니시무라는 살해범을 찾아 스스로 죄를 묻고, 자신도 자살하리라 계획을 세운다.


"나는 범인을 증오할 자격을 잃고 요리코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으로 유죄 선고를 받아야 한다."


<요리코를 위해> 전반부는 딸의 죽음을 맞은 니시무라의 심정, 작가의 표현대로 '이련의 명제와 추론, 하나의 확신과 하나의 결의'가 펼쳐 진다. 무려 80페이지 분량을 할애해 딸 살해범을 추적하고, 응징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뒤 스스로 자결하기까지의 수기다.


그러나 니시무라는 아내의 간병인인 모리무라 다에코에 의해 극적으로 죽음을 피하게 되고, 드디어 사건의 본질을 파헤칠 노리즈키 린타로가 등장한다. 추리소설 작가이자 탐정인 린타로는 니시무라의 수기가 갖고 있는 허점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단언해도 좋다. 형사는 뭔가 숨기고 있다. 경찰도 믿을 수 없다."는 니시무라의 결기와 완벽한 계획은 린타로에 의해 다시 해석된다.



"당신은 대체 어느 편이야?"

"진실의 편이죠."


여학생의 죽음으로 인한 학교 이미지 실추를 걱정하는 자본의 추악한 작업, 적의 상처를 다시 휘집어보려는 정치의 술수와 압력 속에서 린타로의 활약이 펼쳐진다. 실체를 무시한 채 황당한 살인극으로 치부될 뻔한 사건은 린타로에 의해 철저한 재조사가 시작된다.


억울하게 딸을 잃고, 딸의 명예와 아내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려한 아버지의 절규는 예상치 못한 엄청난 악몽을 안고 있었음이 서서히 드러나고, 마침내 '니시무라에 의해, 우미에에 의해, 그리고 요리코에 의해' 숨겨왔던 비밀은 모습을 나타낸다.



14년 전 사고에서 비롯된 가족의 비극. 그리고 남은 가족을 위한 니시무라, 우미에, 요리코에 대한 세밀한 심리 묘사가 돋보인다. 각 장마다 소개되는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가 책의 전개를 암시하고 있어 <요리코를 위해>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논리의 자기 중독'에 빠진 자, '관념의 괴물로 남은 자'의 대결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마침내 '누군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린타로의 결론이 섬칫한 여운으로 남는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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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오해
E, Crystal 지음 / 시코(C Co.)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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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전부 사실일까요?"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숱한 비밀과 오해 때문에 나는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비밀과 오해>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질문과 답으로 이뤄지는 짧은 한 문장이다. 세주, 유주, 비주 세 자매가 서로에게 던진 질문일 수도 있고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향한 물음일 수도 있겠다. 저자 E.Ctystal의 장편소설 <비밀과 오해>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풀어가는 과정이다.



맏언니 세주의 형부가 됐어야할 남자가 결혼식을 앞두고 몸을 던져 자살한 지 5년이 지난 시점, 세 자매는 각자의 시각에서 '그 사건'의 해답을 찾아 나선다. 본의든 아니든 의문투성이인 '그 사건'에 대한 서로의 '비밀과 오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침 비주의 급성 충수염은 세 자매가 가진 비밀을 더 숨길 수 없도록 상황을 전개한다. <비밀과 오해>는 어느해 3월 19일부터 4월 5일까지 보름남짓 동안의 세 자매에 대한 기록이다.


세 자매의 비밀과 오해는 '그 사건'에서 비롯됐다. '그 사건'은 세 자매를 서로 무엇을 드러내고 숨겨야 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자매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그 어떠한 것도 책임지지 않은 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스스로의 인생에서 도망쳐버린 남자. 그런 방식의 죽음은 남겨진 사람 모두에게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지옥을 선사한 것이다. 죽은 남자는 말했었다.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있다고. 그런데 빠져나올 방법을 모르겠다고.


서로에 대한 걱정과 불안, 염려까지도 감추는 데 급급했던 세 자매는 세주의 시어머니가 될뻔했던 여자의 등장으로 급격한 반전을 이룬다. 언제나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전부 별일 아닌 것처럼 지냈던 5년 동안의 '비밀과 오해'는 순간 막내 비주의 용기로 녹아내리게 된다. 그해 결혼 전날 밤 예비형부의 집에서 나오던 비주, 이를 발견한 유주, 그리고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치는 남자를 목격한 세주. 각자가 가슴에 품었던 '비밀과 오해'가 어떠한 까닭이었는지 덤덤하게 그려진다.


"아무도 내겐 묻지 않았어요." 막내의 외침은 왜 사람들이 숱한 오해를 품으면서도 비밀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지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또 세 자매 곁에 머물고 있는 세 남자에 관한 묘사는 <비밀과 오해>가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표현한다. 학원 강사로 일하는 세주, 작은 출판사 직원인 유주,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비주. 모델을 꿈꾸는 한참 연하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선한 마음을 가진 안정된 금융회사 직원, 한참 나이가 많은 이혼남 등 세 자매와 역설적으로 어울리는 세 남자가 가진 '비밀과 오해'도 책은 찬찬히 음미하게 만들어 준다.


엄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기전 40개의 발가락은 완벽한 가족이었다. 된장과 고추장을 진하게 풀어낸 찌개, 으깬 두부가 들어간 쑥갓 무침, 심심한 미역 줄거리 볶음, 달걀을 입힌 동그란 소시지 등 엄마에게서 비롯된 요리가 세 자매의 손끝에서 무심히 되살아나고 있듯 무지개 매니큐어를 바른 30개의 발가락이 허공을 향해 다시 꼼지락 거리는 마지막 장면이 무척이나 정겹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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뮬란 새로운 여정 디즈니 오리지널 노블
엘리자베스 림 지음, 성세희 옮김 / 라곰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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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힌 설원에서 훈족과의 전투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장 병사 핑은 동료인 야오, 링, 치엔포, 그리고 대장 리샹과 함께 전멸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기지를 발휘한다. 절대적 수적 열세를 뒤집기 위해 눈사태를 일으켜 적을 물리치는 것. 성공을 직감한 찰나 훈족 샨유가 휘두른 칼날을 미처 짐작하지 못하고, 샹 대장이 몸을 던져 핑을 대신한다.


핑의 새로운 여정, 다시 말해 뮬란의 또다른 모험은 이렇게 출발한다. 디즈니가 탄생시킨 엘리자베스 림의 <뮬란>은 애니매이션 원작과는 색다른 감동을 전해 준다. 웅장한 배경음악도 없고, 화려한 그래픽도 없지만 순수한 텍스트를 통해 만끽하는 장면만으로도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한다.

 


다친 아버지를 대신해 여성임을 숨기고 '핑'이라는 이름의 남장 병사로 전쟁에 참여한 뮬란은 자신을 지키고자 큰 부상을 당한 샹의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 다짐한다. 희미해져만 가는 의식, 엄청난 고열에 시달리는 샹의 목숨은 이미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뮬란은 작은 희망을 놓지 않고 그를 기꺼이 보살피며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전쟁이 끝났고 이 땅에서 나의 시간도 끝났다. 지금 내가 가장 안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너 같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야, 핑. 내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 샹의 따뜻한 말에도 뮬란의 자신으로 인해 대장이 다쳤다는 자책감과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은 점점 강해질 뿐이다.


황제를 향한 긴 여정 속 지친 병사들이 하룻밤 머물기 위해 마련한 천막. 대장 샹 곁에서 잠시라도 쉴 틈이 없었던 뮬란도 얼핏 잠으로 빠져든다. 그 사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새로운 여정'이 뮬란 앞에 열리게 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녹청색 빛을 뿜어내며 샹을 바라보던 리 장군의 영혼을 만난 뮬란은 대장을 구할 방도를 듣게 되고, 그를 위한 목숨 건 여정을 다짐한다. 샹을 살려낼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지옥에 있는 염라대왕의 마음을 바꾸는 것. 뮬란은 리 가문의 수호신 쉬쉬-엄청난 몸집의 돌사자-와 짧은 만남과 동시에 곧바로 함께 지옥으로 향한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그러나 절다 돌아갈 수 없을 지 모르는 마지막 길 '무원의 다리'를 건너 뮬란과 쉬쉬는 염라대왕 앞에 선다. 주름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불그레한 두 뺨, 불타는 듯이 붉고 노랗게 깜빡거리는 두 눈, 버드나무 몸통처럼 두꺼운 목, 쉬쉬의 갈기 못지 않게 빽빽하고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염라대왕은 뮬란에게 거역할 수 없는 내기를 건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승의 기억을 버리고 있을 샹의 영혼을 찾아 동이 트기 전에 지옥을 벗어난다면 자유와 샹의 생명을 되찾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뮬란은 염라대왕의 죄수로 영원히 지옥에 남아야 한다.


다리들이 공중에 떠있고, 강물이 구름 사이로 흐르고, 강력한 마법이 도처에 일어나고, 거울들이 영혼 깊숙이에 말을 걸며, 여러 사연을 지닌 악령들이 곳곳에서 덤벼드는 곳. 뮬란은 '핑'이 아니라 '뮬란'이라는 본래의 모습으로 위대한 모험을 펼쳐나가게 된다.



<뮬란>은 디즈니 애니매이션 캐릭터 가운데 가장 주체적인 여성상을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책에서도 뮬란은 끊임없이 중국이 요구하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깨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 함께 그려진다. 날카로운 칼로 뒤덮힌 '검의 산'을 오르는 순간 뮬란은 또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자신의 오랜 자아에 묶여 있던 끈들을 잘라내고 뮬란에서 핑으로, 신붓감에서 병사로, 순종적인 딸에서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여성으로.


'검의 산'을 벗어날 즈음 뮬란의 눈에 들어온 빛바랬지만 여전히 황금빛을 발하는 명검. 검에 새겨진 첫 글자는 퓰란의 성과 같은 글자 '파'였다. '꽃'을 뜻하는 '파'다.


"꽃, 역경을 뚫고 피어난 그 꽃이 가장 귀하고 아름답다." 검의 글귀는 저승에서의 모험, 이를 넘어 <뮬란>의 삶을 관통한다. 지옥에 어울리지 않는 영웅의 검은 "총명하고 용감하며 친절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샹이 원하는 비밀의 여성, 즉 뮬란과 절묘히 부합한다.


뮬란은 지옥의 악령과의 전쟁 속에서 자신의 기억, 깊은 내면과의 싸움도 함께 벌여 나간다. 망각의 여신 멩포의 유혹역시 멈추지 않고 뮬란을 괴롭힌다. 가마솥 지옥에서의 불의 악령 '훠과이을 물리치고, '거울의 지옥'을 벗어난 뮬란은 더이상 남장 병사 '핑'이 아니다. 자신의 본모습으로, 진짜 여자의 모습으로 검을 치켜든 뮬란은 가면을 벗어 던진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과 맞설 용기가 생겼으므로.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자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자유도 갖고 싶어. 비록 내게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해도 말이야. 이젠 두렵지 않아. 내가 핑이든 뮬란이든 중요하지 않아. 내가 나 자신에게 진실하다면 진짜 내가 누구인지 드러날 테니까."



"나는 파뮬란이다. 가족과 중국을 위해 목숨을 거는 소녀,죽어가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온 소녀. 마침내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전투에 전투를 거듭한 소녀."


다시 만난 멩포는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는 힘과 용기와 회복력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꽃', 목련을 뮬란에게 선물한다. 사모하는 샹 대장과 세상에 맞설 비밀을 간직하게 된 뮬란은 '영웅의 심장' 그대로를 안고 새로운 여정을 다시 떠난다. 애니매이션 원작을 떠올리며 <뮬란-새로운 여정>을 음미한다면 책의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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