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센스 노벨
스티븐 리콕 지음, 허선영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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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헛웃음이 읽는 내내 터져 나온다. 잉글랜드 출신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활동한 유머 작가 스티븐 리콕의 단편소설 <난센스 노벨>은 각박한 현실을 너무나 쉽고 재미있게 풍자한 작품이다. 모든 단편은 마치 잘 짜여진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듯하다. 어쩌면 책 표지 그림에 표현된 것처럼 서커스 공연을 즐기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난센스 노벨>은 여덟 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됐다. 각 편의 제목과 부제부터 '난센스'라는 점을 기억하며 읽다보면 유머 작가의 의도와 편안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여기 해초에 묻히다(광활한 바다 위 대혼란)', '넝마를 걸친 영웅(히스가야 헤이로프트의 고군분투 생존기)', '어느 순진한 여인의 슬픔(마리 머시너프의 회고록)', '무너진 장벽(푸른 섬에서 싹튼 위험한 사랑)', '하일랜드 아가씨 해나와 오처라처티 호수의 지주', '누가 범인일까?(미궁의 살인사건)', '캐롤라인과 불사조 아기의 크리스마스', '석면 옷을 입은 사나이' 등 주인공도, 배경도 모두 다른 기묘한 이야기가 펼쳐 진다.


<난센스 노벨>의 유머는 첫 편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커다란 구레나룻, 무성한 턱수염과 두꺼운 콧수염만 빼면 깔끔히 면도한 얼굴'을 가진 선장'과 항해사 블로우하드의 보물을 향한 항해가 시작되지만 선원들의 연쇄 실종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혼란에 빠져든다.



기술도 능력도 없는 한 청년의 뉴욕 생존기를 그린 '넝마를 걸친 영웅'. 일자리를 구하던 그에게 벽돌공은 벽돌을 던지고, 길을 묻는 그에게 경찰은 옆통수를 후려친다. 심지어 말도 꺼내기 전에 귀를 물어뜯는 성직자까지 만나게 되고. 일자리를 향해 온 몸을 던지는 무모한 히스가야 헤이로프트가 마침내 비정함과 지독함으로 가득한 뉴욕에서 자리잡는 과정이 괴이하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모르겠다'. 결혼을 앞둔 한 처녀가 벌이는 너무나 철없는 애정 행각을 다룬 이야기 '순진한 여인의 슬픔', 여객선의 침몰로 만난 한 여인과 무인도 생활을 시작하는 '무너진 장벽', 그리고 원한관계에 놓인 스코틀랜드의 두 가문이 등장하는 '하일랜드 아가씨 해나와 오처라처티 호수의 지주' 등은 각 편의 주인공들이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사랑과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무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익숙한 대사가 등장하는 '캐롤라인과 불사조 아기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간난아기를 안은 여인을 집으로 받아들인 부부의 사연은 인물간 기막힌 연결과 의외의 결말로 큰 재미를 준다. 오래된 농장을 잃어버릴 위기에서 벗어난 남편이 아들들에게 새로운 인생관을 설파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자, 아들들아. 이제부터는 우리는 가늘고 길게 살자꾸나. 좋은 책에 이르기를 '직선은 양 극점 사이에 반듯하게 놓인 선이다'라고 하더구나." 그가 말하는 '좋은 책'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이다.



마지막편은 <난센스 노벨>의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느낌을 준다. 굉음을 내는 기계와 노동자 계층의 끊임없는 노역, 계층 간의 갈등, 빈곤 문제, 전쟁, 잔학 행위가 만연한 오늘날의 세상을 볼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끼는 작가는 먼 미래 다시 깨어나는 꿈을 꾼다. 마침내 '자연의 위대한 정복 시대'를 찾은 작가는 인간과 기계가 자연에게 승리를 거둔 세상을 경험하게 되고, 오래전 자신이 살았던 삶에 대한 값어치를 다시 생각한다.


여덟 편의 이야기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난센스 노벨>은 거침없는 설정, 더 거침없는 인물, 더더욱 거침없는 전개 속에 당황스러울 만큼 유머가 가득하다.(*)


* 리뷰어스클럽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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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라틴어 원전 완역본) - 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하여 현대지성 클래식 33
토머스 모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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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인물 라파엘 히틀로다이오가 말하고, 영국의 유명한 도시 런던의 시민이자 사법집행관 대리인 고명한 토머스 모어가 기록한 최상의 공화국 형태의 관한 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15~16세기 시대상을 배경으로 탄생한 '이상적인 공화국'에 대한 기록이다. 유토피아를 경험한 라파엘의 설명을 모어가 기록한 형태로 허구를 실제로 착각하게 하고, 미지의 섬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여 준다.


화자로 등장한 라파엘 히틀로다이오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말도 안되는 것, 시덥잖은 것'을 뜻하는 '휘틀로스'와 '나누어 주다'를 뜻하는 '다이오'를 합성한 말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자'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 라파엘이 모어를 통해 들려주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는 도무지 믿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는 풍자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책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장 완벽한 공화정이 실시되고, 모든 국민의 완전한 행복과 쾌락이 실현되는 섬, '유토피아'를 향한 인류의 꿈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토머스 모어가 당시 주요 위정자들과 주고 받은 서신, 라파엘과의 만남, 유토피아에 대한 라파엘의 설명, 그리고 모어가 쓴 <유토피아>에 대한 학자들의 평론과 칭송이 포함된 서신으로 구성돼있다. 실제 인물들 사이에 오간 편지는 '유토피아'와 '라파엘'이 실존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에서 '아니다, 없다'를 뜻하는 '우', 장소를 의미하는 '토포스'가 합해져 만든 이름으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이름이지만 말이다.


라파엘이 말하는 유토피아의 가장 큰 특징은 사유재산을 인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유재산이 없으니 모든 시민은 공동의 재산을 함께 누리게 된다. 그들의 집은 현재의 무상 공공임대주택과도 비슷하며, 직업은 근로의 의무이자 권리로 철저히 지켜진다. 노약자나 장애인을 위한 기본 소득 등 복지 정책도 시민들의 합의 하에 원만히 실시되는 유토피아.


"사유재산이 존재해서 돈이 모든 것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는 곳에서는 정의롭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가장 악한 자들이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는 곳에 정의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것을 극소수가 나누어 갖고, 대다수 사람은 궁핍하고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곳에 행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라파엘의 지적은 옳다.



토머스 모어의 기록한 유토피아라는 섬이 보여주는 도시, 관리, 직업, 가족, 종교, 전쟁, 양육, 학문 등 모든 형태에서 놀라운 평등사회를 그리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때론 전체주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1516년 출간된 <유토피아>는 사적 이익이 아닌 공공 이익을 지향하는 공화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준다. 플라톤에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상국가를 향한 꿈이 책에 집약돼있다.


유토피아의 결혼제도는 흥미롭다. 강력한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면서 어느 한쪽의 배우자가 죽은 때를 제외하고는 결혼관계를 끝내는 것이 대단히 어려울 정도로 아주 엄격하게 시행된다. 다만 간통했거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학대가 있었다면 이혼이 허용된다. 특히 이혼에 책임이 없는 배우자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새 배우자와 재혼하는 것이 허용되지만, 유책 배우자는 망신을 당하고 평생 재혼할 수 없으며, 간통을 저지른 자들은 가장 낮은 노예신분으로 강등돼 힘들고 가혹한 일을 해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유토피아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요즘 시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합법을 가장해 이런 저런 명목으로 도둑질하고 누군가를 압박해서 우려먹고 갑자기 공격하여 강탈하고 있다. 어떤 때는 법률의 은밀한 비호를 받으면서, 어떤 때는 법률의 직접적인 승인아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누군가에게서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든다."


법을 잘 아는 자들, 스스로가 정의와 공평의 수호자라는 견고한 생각을 갖고 '사기 치는' 공화국은 시민들에게 '배은망덕한 나라'일 뿐일 것이다. 프랑스 인문주의자 기욤 뷔테의 지적대로 끊임없이 분쟁을 조장하고 정의를 왜곡하고 혼란스럽게 하며 정의롭지 못하게 만드는 데 앞장서는 자들이 득세한 공화국역시 '가짜'일 뿐일 것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가장 오완벽한 공화국, 그곳에서 말하는 '정의'에 집중하게 한다.


라틴어 시인 코르넬리우스 데 슈레이버가 남긴 시는 <유토피아>를 읽어야할 이유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비참한 세계가 얼마나 헛된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에서 나온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읽고 줄 치고 마음에 담아두라."(*)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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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도노 하루카 지음, 김지영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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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쓰며 살고 있는 한 남자가 별 다른 이유없이 파국에 이른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도노 하루카(遠野遙)의 <파국(破局)>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지나칠 정도의 짧은 문체,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듯한 대사, 그저 보이는 대로의 묘사 등이 그렇다.


도노 하루카의 <파국>은 주인공 캐릭터가 전부다. 고교 럭비 동아리 출신의 요스케. 대학에 가서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고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한편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착실한 남자다. 심장과 근육이 터져버릴 지경까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한 덕분에 건장한 체격과 체력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요스케는 모든 면에서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 혹은 아버지가 알려 주신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한다. '왜 그럴까'보다 '그래선 안된다', '이래야 한다'는 잣대가 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파국>에 등장하는 요스케는 마치 인간 보통의 감정이 없는 듯 표현된다.


"그 기분 나쁜 여자는 잘 살펴보니 얼굴이 예뻤다."


친구의 마지막 공연장에서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한 여성을 마주친 요스케. 자신의 기분보다 눈에 들어오는 실체로 즉시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 그렇다고 해서 반사회성을 지닌 소시오패스와는 성격이 다르다. 요스케는 충실히 사회에 기여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길을 걷는 어린아이, TV뉴스 속 등장인물, 전철에서 만난 취객 등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요스케의 시선은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판단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무대 위에 있는 그녀를 보는 건 당연해도, 그 반대에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손으로 볼과 턱을 만져보고 앞머리의 상태를 점검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이런 식이다. 요스케는 머릿속 복잡한 생각에 젖어들더라도 곧바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다. 고생하는 학교 경비원을 향해 오늘 그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기를 빌다가도 '의미 없는 행위'라고 정리해버린다.



요스케가 자신의 감정을 대하는 방식은 새 여자친구 아카리와의 첫 여행에서 잘 드러난다. 갑자기 내린 비로 추위에 떨고 있는 아카리를 위해 요스케는 음료 자판기로 향한다. 그러나 따뜻한 음료를 찾지 못해 무척이나 아쉬웠던 요스케. 갑자기 눈물이 터져 흐른다.


"어쩐지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자친구에게 음료를 사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성인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이상하다." 


요스케는 하나의 가설을 세워 본다.


"어쩌면 내가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전부터 슬펐던 건 아닐까. 그러나 그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중략) 나는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건 즉, 나는 슬픈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유를 찾지 못했으므로 감정은 틀렸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래서인지 일본소설 <파국>에 '좀비 예찬'이 등장한다. 럭비 후배를 단련시키던 요스케는 더욱 강한 선수를 위해 이렇게 독려한다. "모두 좀비가 되어야 해. 지금부터 너희들은 좀비다. 좀비처럼 끝까지 다시 일어서야 이길 수 있다. 좀비니까 몇 번이든 다시 일어나는 건 당연하고, 통증이나 피로도 느끼지 않지. 공포도 사라져. 좀비는 무섭다는 감정이 없으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좀비를 무서워하지."


도노 하루카가 그린 요스케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우리 자신역시 누군가 정해놓은 질서에 갇혀 파국을 향해 그냥 달려가는 좀비와 같을 수도 있고.(*)


* 리뷰어스클럽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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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김현화 옮김 / 마시멜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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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죽었다. 그리고 나는 남편을 죽인 남자의 아내가 된다. 그녀의 삶이 한 여름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과도 같다.


아키요시 리카코(秋吉理香子)의 <작열(灼熱)>.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작품 전체가 뜨겁다. 한 여자를, 두 남자를 다 태워버릴만큼 그렇다. 배경이 되는 무더운 여름마저 사키코-혹은 에리-의 분노와 증오, 행복을 위한 갈증이 다 녹여버릴 듯하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뺑소니 사고로 잃어버린 사키코는 친척집을 전전하다 고교시절 운명의 짝 다다토키를 만난다. "우리는 젓가락(はし)같은 사이야. 떨어져 있을 때는 무의미하잖아. 한 짝이 모여야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고 할까."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 어느날 자신도 모르는 사연을 안고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유력한 신고자이자 용의자가 있었지만, 결국 남편은 사고사로 종결된다. 게다가 불우했던 과거에 사기죄라는 죄명까지 더해져 남편은 죽어서도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돼버린다.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키코는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얼굴과 신분을 바꿔 에리로 다시 태어나고, 남편을 살해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남편의 억울한 누명을 벗어내려면 스스로 증거를 찾아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키코는, 아니 에리는 그렇게 히데오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 인간은 숨 쉬고 있어.'


세상 유일했던 자신의 사람인 남편을 잃은 사키코에게 히데오는 분노와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누군가 죽어야만 끝나는 이야기처럼 사키코는 행여나 마음의 빈틈을 보일까 조바심을 내며 히데오와의 시간을 보낸다. 마치 행복한 주부처럼, 남편의 복수를 위해. 그러나 히데오 남매가 숨겨왔던 비밀이 점점 사키코를 향해 덤벼들면서 이야기는 반전을 맞게 된다.



<작열>의 무대는 여름이다. 사키코, 다다토키, 히데오 세 사람의 삶이 뜨거워 차마 건드릴 수가 없다. 첫 페이지 사키코가 손에 든 큰 접시 두개를 깨뜨리면서 시작됐던 <작열>은 그들의 인생이 다 타버리고 나서야 이야기를 그만둔다. '본 차이나', 뼈를 담은 두 개의 접시가 비로소 <작열>의 마지막을 덮어준다. 화려한 캐릭터도, 완벽한 미스터리도 갖지 않았지만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열>은 제목 그대로 뜨거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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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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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장을 펼치다보니 커다란 메모지가 필요했다. 많은 등장인물과 함께 반복되는 시간과 사건의 교차 속에 빠져 엉뚱한 길에서 헤매지않고 무사히 책장을 덮을 수 있으려면 그래야 했다. 스튜어트 터튼의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은 영국의 한 고택에서 벌어지는 하루-어쩌면 여드레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를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통해 그려냈다.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의 가장 큰 매력은 타임 루프다. 파티를 주최한 하드캐슬의 딸 에블린의 죽음이 안고 있는 비밀을 밝히기 위해 시간은 계속 반복된다. 쉰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행동, 생각, 대화가 되감기면서 어질러진 퍼즐을 서서히 끼워맞춰 가야하는 방식이다.



한 남자가 기억을 상실한 채 숲 속을 방황하다 하드캐슬 하우스의 가장무도회가 열릴 블랙히스에 들어 선다. '애나'라는 이름 하나만 머릿속에 남겨놓은 그는 무수히 되풀이되는 루프에 빠져든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오늘, 그러니까 에블린이 죽는 그날 아침에 깨어나는 게임 속에 놓여 있다. 게다가 매일 다른 사람의 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마약상, 집사, 의사, 은행가 등 블랙히스에 초대된 사람 중 하나로 말이다.


사실 파티는 에블린의 동생 토머스 하드캐슬이 19년 전 살해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그날 그 손님들이 다시 그 자리, 블랙히스에 모여 파티로 위장된 추도식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


에이든 비숍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남자는 8일 동안 다른 사람의 몸으로 그날의 사건을 더듬어 가며 에블린을 죽음에 이르게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에블린이 죽는 바로 그날 자정까지. 마지막 여덟 번째 호스트가 돼서도 답을 찾지 못하면 그 간의 기억은 모두 지워져버리고, 게임은 다시 시작된다. 은색 권총을 들고 총구를 자신의 복부에 겨눈 에블린을 매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겁쟁이면 좀 어때요? 그보다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처럼 어둠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조립하려 하지 말아요. 그러지 말고 세상을 제대로 봐요. 주변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잘 추려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보는 거에요."


에이든을 향한 에블린의 말은 곧 게임의 법칙을 설명한다. 여덟 명의 호스트로 깨어날 때마다 각자 인물이 지닌 본성을 억제 또는 활용하면서 '에이든 비숍'은 에블린을 지켜내고 무사히 블랙히스로부터 벗어나야하는 것이다. 중세 흑사병 의사 옷차림을 한 남자, 애나라는 이름의 여인 등 그를 도와주거나 혹은 방해하는 사람뿐 아니라 구석구석 숨겨진 메시지에 대한 이해와 기억을 조합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메모지'가 필요하다. 앞서 밝혔듯 말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소개된 등장인물 페이지를 수도 없이 들락날락해야하는 수고도 당연히 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작가가 만들어놓은 시간과 인물의 무한 루프에 빠져 허덕이게 되리라 장담한다.



모두의 운명을 짊어진 내면의 존재 에이든, 그리고 파티에 초대된 모든 인물의 개성과 그들 안에 숨겨진 비밀이 정교하게 얽혀 있다. 각기 다른 사람의 눈으로 같은 사건을 매일 관찰하며 해답을 찾아내야 하는 게임이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속에서 치열하게 벌어 진다. 책 속의 시간의 흐름마저 자칫 잃어버리기 쉽상이다. 오늘이 어제가 되고, 오후는 아침이 된다. 어제 의사였던 에이든은 지금 은행가지만, 잠시 후 그저께 집사의 몸에서 깨어난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일어나는 반전은 읽는이에게 혼란과 재미를 함께 제공한다. 그리고 8일 간의 반복이라는 미로에서 벗어날 즈음이면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은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그림을 독자 앞에 내놓을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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