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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도노 하루카 지음, 김지영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11월
평점 :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쓰며 살고 있는 한 남자가 별 다른 이유없이 파국에 이른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도노 하루카(遠野遙)의 <파국(破局)>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지나칠 정도의 짧은 문체,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듯한 대사, 그저 보이는 대로의 묘사 등이 그렇다.
도노 하루카의 <파국>은 주인공 캐릭터가 전부다. 고교 럭비 동아리 출신의 요스케. 대학에 가서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고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한편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착실한 남자다. 심장과 근육이 터져버릴 지경까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한 덕분에 건장한 체격과 체력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요스케는 모든 면에서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 혹은 아버지가 알려 주신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한다. '왜 그럴까'보다 '그래선 안된다', '이래야 한다'는 잣대가 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파국>에 등장하는 요스케는 마치 인간 보통의 감정이 없는 듯 표현된다.
"그 기분 나쁜 여자는 잘 살펴보니 얼굴이 예뻤다."
친구의 마지막 공연장에서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한 여성을 마주친 요스케. 자신의 기분보다 눈에 들어오는 실체로 즉시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 그렇다고 해서 반사회성을 지닌 소시오패스와는 성격이 다르다. 요스케는 충실히 사회에 기여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길을 걷는 어린아이, TV뉴스 속 등장인물, 전철에서 만난 취객 등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요스케의 시선은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판단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무대 위에 있는 그녀를 보는 건 당연해도, 그 반대에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손으로 볼과 턱을 만져보고 앞머리의 상태를 점검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이런 식이다. 요스케는 머릿속 복잡한 생각에 젖어들더라도 곧바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다. 고생하는 학교 경비원을 향해 오늘 그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기를 빌다가도 '의미 없는 행위'라고 정리해버린다.

요스케가 자신의 감정을 대하는 방식은 새 여자친구 아카리와의 첫 여행에서 잘 드러난다. 갑자기 내린 비로 추위에 떨고 있는 아카리를 위해 요스케는 음료 자판기로 향한다. 그러나 따뜻한 음료를 찾지 못해 무척이나 아쉬웠던 요스케. 갑자기 눈물이 터져 흐른다.
"어쩐지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자친구에게 음료를 사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성인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이상하다."
요스케는 하나의 가설을 세워 본다.
"어쩌면 내가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전부터 슬펐던 건 아닐까. 그러나 그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중략) 나는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건 즉, 나는 슬픈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유를 찾지 못했으므로 감정은 틀렸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래서인지 일본소설 <파국>에 '좀비 예찬'이 등장한다. 럭비 후배를 단련시키던 요스케는 더욱 강한 선수를 위해 이렇게 독려한다. "모두 좀비가 되어야 해. 지금부터 너희들은 좀비다. 좀비처럼 끝까지 다시 일어서야 이길 수 있다. 좀비니까 몇 번이든 다시 일어나는 건 당연하고, 통증이나 피로도 느끼지 않지. 공포도 사라져. 좀비는 무섭다는 감정이 없으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좀비를 무서워하지."
도노 하루카가 그린 요스케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우리 자신역시 누군가 정해놓은 질서에 갇혀 파국을 향해 그냥 달려가는 좀비와 같을 수도 있고.(*)
* 리뷰어스클럽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