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도서출판 개마고원 블로그(http://blog.naver.com/kaema1989/220741050251, 2016년 6월 20일)에서 원본 복원 후 재등재한 것임.
2016년 6월 3일, 광주(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Ⅱ): 호남정치와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한국사회학회/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주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나는 '4·13총선과 호남정치의 변화'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내가 발제한 글은 총선 전인 지난 해 출간한 <아주 낯선 상식>과 이 심포지엄 전날 출간된 <아주 낯선 선택>의 요지를 요약·보완한 것이었다.
학회모임에서 이런 유의 글(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분석·주장)이 발표되는 건 거의 유례 없는 일이다. 호남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4·13총선의 아주 낯선 결과가 내 발표를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나는 그간 내 하던 얘기를 했고, 청중들은 그간 못 듣던 얘기를 들었다. 발제 요지와 토론자로 나선 고려대 정한울의 토론 요지는 녹취할 수 없으므로 <경향신문> 기사로 대신한다.
지난해 <아주 낯선 상식>(개마고원)을 출간해 큰 관심을 모았던 김 교수는 “5·18 정신이 현실과 단절됨으로써 신성화되는 것을 반대한다”며 “5·18 정신이 ‘세속광주’의 세속욕망을 담아낼 세속이념이기를 바라며, 그렇게 될 때에 진정한 호남정치가 시작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영남패권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호남 복수정당 체제와 독일식 비례대표 내각제 개헌을 제시했다. 복수정당 구도를 지켜야 호남이 자신의 지분을 지킬 수 있으며, 특정 계층이나 계급·지역이 정당한 정치적 지분을 넘어서 반민주적 패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정당지지율과 의석점유율을 일치시키는 독일식 비례대표 내각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를 상대로 토론자로 나선 정한울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지역주의 비판 담론의 불공정성에 대한 지적이나 지역 내 복수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지적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나 광주를 ‘신성광주’와 ‘세속광주’로 구분하는 데에는 모호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영호남을 이야기할 때 지역 엘리트를 가리키는 것인지, 일반 대중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명확하며, 수도권으로 모든 자원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 규모의 경제적 지배관계를 확대재생산하려 한다는 지적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다.
정 교수는 “영호남 엘리트 간 경쟁에서야 영남패권주의가 공세적 담론으로 역할은 할 수 있겠지만, 호남정치를 포함한 한국 민주주의 전반의 발전과 향후 과제를 논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사회학회 순회 심포지엄 - 광주」, 인터넷 『경향신문』, 2016년 6월 5일.)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엘리트 간의 이해관계로 치부하려는 것은 (선의로 해석한다 해도) 계급환원주의의 상투적 관점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예컨대 여성의 남성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도 남여 엘리트 간의 이해관계로 얼마든지 환원시킬 수 있다. 재벌 남성의 아내와 노동자 남성의 아내는 여성으로서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없으며, 언제나 문제는 계급으로'만' 환원될 뿐이다. 이런 식의 관점에 의하면 반영남패권주의 투쟁은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주된 투쟁인 계급투쟁의 초점을 혼탁케 할 뿐이다.
하지만 '남성/여성' 투쟁에 의한 여성의 권리향상은 여성이 각 계급적 지위에 속한 처지에 따라 각각 제 나름의 권리향상을 가져올 것이다. 이 세상의 모순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단일하지 않을 뿐더러 '제국/식민지'의 모순처럼 지역모순이 계급모순을 능가하는 지배적 모순의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지역모순이 패권적으로 존재하며 계급모순의 발현을 질식시킨다는 주장을 마치 계급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곡해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엘리트 간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건 사실관계에 눈을 감는 무능 혹은 왜곡이다.
사실 나는 정한울의 상투적인 질문보다는 종합토론에서 플로어 질문자로 나선 고려대 조대엽의 공격적인 질문이 훨씬 덜 지루했다. 그와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았다. 기억에 의존해 발언 취지를 조금 매끄럽게 옮겨 적는다.
조대엽: "발제에 의하면 호남은 민주, 법치 등등 세속이념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언제, 누가, 호남에 그런 세속이념이 아닌 신성이념을 강요했는가?"
김욱: "전 세계 어느 민주국가에서, 특정 지역 유권자에게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지 않으면 '역사의 죄'를 짓는다며 겁박하는 경우가 있는가? 복수정당제를 부정하는 이 이념이 세속이념인가? 이것이 바로 신성이념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최정운의 '광주정신=절대공동체' 이념에 도달한다. 그 경험은 자랑스럽지만,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스치듯 경험한 그런 '유령적 계기(데리다)=신성이념(김욱)'을 일상적 삶 속에서 선택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나는 <아주 낯선 상식>에서 하지 못한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를 <아주 낯선 선택>에서 했다. 그 대상이 호남에서 영남으로 바뀌었는데, 사실 같은 이야기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하지만 <아주 낯선 상식>보다 어쩌면 더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보지 않으려고 하면 눈앞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실감케 될 것이다.
나는 <아주 낯선 선택>이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 중의 하나는 어떤 주장이 자기 자신의 기득관념을 뒤흔드는 것이다. 꽤 유명해진 카프카(70쪽)의 '도끼' 발언은 현실적 독서가 어떠한가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 당위적 독서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피력한 것일 뿐이다. 어떤 주장이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느낌을 준다면 그런 주장에 기꺼이 귀 기울일 사람이 현실 속 어디에,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내 책이 누군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어떤 생각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나 혼자라 해도 좋다. 그러니 어디에선가 주입된 자신의 소중한 기득관념이 혹여라도 상처입을까봐 불안불안한 '정신적 19세 미만자, 정신적 노약자'에게 나는 이 <아주 낯선 선택>을 권하지 않는다. 그건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명백한 시간낭비일 뿐이다.
카프카의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누구나 아는 천기를 새삼스레 누설하겠다. 누구에게라도 어디에선가 주입된 자신의 기득관념만을 강화시켜주는 책이야말로 가장 매혹적인 책이 아니겠는가? 독서를 통해 좋은 기분을 망치지 않으려면 바로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 다행히 그런 정치관련 책은 주위에 널려 있다. 그러니 거의 아무 책이나 골라 잡아 읽으면 된다. (붓 가는 대로 글을 쓰다 갑작스런 우려가 밀려오는데, 이 블로그 글 전체 혹은 부분이 갑자기 삭제된다면 그건 순전히 출판사 대표의 검열 때문임을 미리 밝힌다.)
예정에 없던 '셀프 디스'로 급 우울해진 까닭인지, 상처입은 내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지젝의 냉정한 분석을 동원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낀다. 기왕에 내 책소개를 잘해보려는 소심한 스텝이 뭔가 꼬였으니 얄팍한 상술을 포기하고 계속 붓 가는 대로 과감하게 써보자. 얼핏 자기확신의 화신처럼 보이는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대해 지젝은 이렇게 도발한다.
테러리스트가 보여준 열정은 오히려 그에게 진짜 확신이 없음을 증거한다. 그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연약했기에 풍자 주간지에 실린 한심한 만화를 보고 위협을 느꼈겠는가! (…)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괴롭히는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가 그들을 열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확신하지만, 그 태도가 거꾸로 그들을 더 화나게 하고 복수심을 품게 한다. (…) 역설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진짜 '인종주의'다운 확신이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는 부족한 것이다.(19쪽.)
굳이 설명이 필요한 말인가? 한데 설명을 위해 난데없이 사족 같은 기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때 일이다. 갓 전근온 국어교사에게 한 친구가 (국문법에 관한) 질문을 몇 차례 계속했다. 불행하게도 그 친구는 갑자기 이성을 잃은 그 교사에게 그 일로 흠씬 얻어터지고 말았다. 그 교사가 쏟아낸 분노의 목소리에서 겨우 알아낸 구타의 이유는 '건방지게 자신의 실력을 시험했다'는 것이다. 설령 그 친구가 그랬다 해도, 그 교사는 자신의 실력을 자랑할 기회를 놓쳤거나 아니면 자랑할 만한 실력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마 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사한 영감을 주는 발언을 하나만 더 추가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일본인이 조선을 지배하며 느꼈던 가장 큰 어려움을 이렇게 전한 바 있다.
식민치하의 주종적 상호관계에 관한 어느 일본인의 발언을 들어 보자. "참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한인들은 우리를 마치 외국인같이 대한단 말입니다."
주인이 종속자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분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긴요하다. 종속자는 다르고, 저열하고, 폭력에 순종해야 되[며], 자립적으로 사물을 처리하지 못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식민지적 관계에 어떻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단 말인가? 타인을 지배하는 자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이러한 비안간적 망상은 필요한 것이다. 어떠한 합리화든지 보다 고상한 동기를 내세우지 않고는 타인을 지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지배자들을 그들의 인간성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수단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지배자들이 마음속으로 이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사실의 인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게 된다. (108쪽.)
지배하기 위해 우월'해야' 하는 자들이, 지배하면서도 우월'하지 못함'을 스스로 느낄 때 얼마나 정신적으로 불안·피폐해지겠는가?! 그런 그들에겐 '정신적 언어' 대신 '정신적 폭력'이, '소통하는 논리' 대신 '주입된 이데올로기'가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주 낯선 선택>을 자기 확신이 부족한 나머지 정신적 테러(혹은 인터넷에 범람하는 테러수준의 공격적 댓글)에 중독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슬람 테러리스트 같은 사람들에게 권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 책은 그런 '그들과 그 친구들'을 설득하기 위한 무모한 시도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한 일도 결코 아니다.
내 언어와 논리는 각자가 갖고 있는 기득신념의 정당성을 검증해보고 싶은 최소한의 자신감과 호기심, 심지어 이데올로기적 우월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혹은 세상을 직관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예컨대 <아시아경제> 기자 최대열 같은 사람이다. 그에게 <아주 낯선 선택>은 이런 책이었던 같다.
학교 다닐 때 여권신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지인과 술자리에서 논쟁한 적이 있다. 시간이 흘러 다소간 왜곡된 기억은 있겠지만 요지는 단순했다. 나는 성별간 갈등을 부각시켜 문제해결을 강조하는 게 정작 중요한 계급 혹은 계층 갈등 자체를 흐릿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차별과 억압ㆍ폭력을 거론하며 나의 주장이 가진 한계를 짚었다.
현실정치에 관심이 더 생겨나 지역갈등을 바라볼 때도 나의 사태인식에 대한 구도는 비슷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지역문제를 맨 앞에 둬서는 안 된다고 봤다. 김욱 서남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아주 낯선 선택'을 읽고 나서는 머릿속이 좀 복잡해졌다.
그는 책 머리말에 "어떤 경로로든 머릿속에 주입된 이상적(?) 분석틀인 계층ㆍ계급만이 세상을 진짜로 설명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다고 꼬집었다. 뜨끔했다. 현실의 지역정치를 다룬 책으로 치부하고 스쳐 지나려다 페이지를 넘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간의 피상적인 접근에 대한 반성과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하나'라는 질문을 되뇌이게 됐다.
「[최대열의 體讀]오른쪽은 쳐다보지 않는 민주화의 함정」, 『아시아경제』, 2016년 6월 13일.
나는 내 책에서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했다. 추측컨대 실현 가능성이야 어떻든 내년 대선 전까지 개헌논의도 폭풍처럼 한 차례 정국을 휩쓸 가능성도 있다. 어떤 경우라도 일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는 그 다음 문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토대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적 낭만은 사회과학을 도덕적 훈계 혹은 맹목적 기도로 대체할 뿐이다.
![](http://image.aladin.co.kr/product/4922/57/cover150/8932916810_1.jpg)
<아주 낯선 선택>의 머리말엔 돈키호테와 산초가 누군가 머리 위에 뒤집어 쓰고 있는 번쩍거리는 저 물건이 무엇인가를 두고 언쟁하는 장면이 인용돼 있다. 돈키호테는 맘브리노의 투구라고 우기고, 산초는 감히 눈에 보이는 대로 세숫대야라고 응수한다.(291~294쪽.) 누구라도 소설 속 그들의 언쟁을 읽을 땐 맘브리노의 투구와 세숫대야를 구별하는 건 누워서 식은 죽 먹기처럼 보인다. 바보들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걸 구별 못해 진지한 언쟁을 벌이다니, 아 놔….
하지만 장담컨대, 현실 속에서 맘브리노의 투구와 세숫대야를 구별하는 건 암병아리와 숫병아리를 구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의 '셀프 디스' 때문에 이 글의 삭제를 요구할지도 모를 출판사 대표를 의식해 나름 반전의 결론을 남긴다.) 결코 많은 이들은 아니겠지만, 이 책이 관념의 모험을 떠나 맘브리노의 투구와 세숫대야를 구별하려고 시도하는 '담대하고 자각적인' 독자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8571905(원문), 2016년 6월 19일(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