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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최저임금 논쟁(이른바 소득주도성장논쟁)을 보면서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울려는 아이 뺨 치기)’는 속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는 이유가 뺨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를 가지고 각자의 진영논리를 동원해 유리한 사실만을 강조해가며 일방적으로 우기는 부질없는 사태가 속출한다.

 

 

어쨌거나 문재인 정부는 정부대로 여기서 밀리면 안 되는 거고, 반대당은 반대당대로 오히려 정부가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을 포기하면 허탈해 할 것 같은 느낌까지 준다. 그렇다면 한참 후의 막장을 확인할 때까지(어느 한편이 항복선언을 할 때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문재인 정부의 당찬 포부도 그렇고, (지지율 분포를 보면) 국민도 아마 그러기를 원하는 듯싶다. 따라서 이제 대한민국이 호랑이 등에 올라탄 셈이다.

 

우리 경제를 살리는 방법을 말하는 건 뛰어난 경제학자라도 겸손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최저임금 상황을 이해하는 것 자체는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크게 어렵지 않다고 본다. 실제로 통계적 사실 자체에 관한 다툼도 크지 않다. 말하자면 문제 해결의 어려움은 통계적 사실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물론 통계청장이 의심스런 이유로 바뀐 탓에 앞으로는 통계적 사실 자체도 쟁점이 될 수 있다), 통찰 혹은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통계를 보면, 우선 우리나라의 2016년 기준 노동소득분배율은 63.3%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67.0%보다 3.7낮은 하위권(28개국 중 21번째) 수준이다.(고용노동부,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부록)>(2018).) 그렇다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커지도록 뭔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래서 최저임금을 크게 올리는 건 어떨까? 하지만 '(2017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 대비 (2018년) 최저임금(7530)’으로 계산하면 이미 OECD 4위다.(인터넷 <매경 이코노미>, 2018727.) 주휴수당을 포함한 최저임금은 9045원으로 3위가 된다.(인터넷 <중앙일보>, 2018419.)

 

그럼 이렇게 높은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어떨까? OECD는 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일렬로 줄 세웠을 때 정확히 중간에 있는 값인 중위임금3분의2 미만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저임금 노동자로 정의하는데, 한국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016년 기준으로 23.5%나 된다. 미국에 이어 2위다.(고용노동부,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부록)> (2018).) 형편없는 상황이다.

 

이런 사태를 작심하고 극복하려는 듯, 고용노동부는 중위임금 대비 68.2%(경총 추산)의 내년 최저임금(8350원, 주휴수당 포함 시 10020원)을 확정 고시했다. 이는 OECD 회원국 중 3위에 해당하는 높은 수준이다.(인터넷 <중앙일보>, 201883일.) 한마디로 최저임금으로 우리 경제의 약점인 저임금 노동자 문제를 모두 일거에 해소해버리겠다는 의미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 볼 통계치다. 어쩌면 통찰에 가장 중요한 통계치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영향률은 어떨까? 중요한 사안이므로 인터넷 <중앙일보> 기사를 직접 인용한다.

 

내년 최저임금 대상자는 국내에서 일하는 근로자 4명 가운데 한 명인 501만명이다. 이런 영향률(25%)은 한국보다 경제수준이 높은 선진국을 크게 웃돈다. 프랑스의 영향률은 10.6%. 일본 11.8%, 미국 2.7%, 네덜란드 6.6%. 선진국에는 없는 주휴수당을 포함하면 영향률은 40%에 달한다. 국민 절반 가까이가 국가가 정한 임금을 받게 된다는 얘기다. 생산성과 회사의 수익 등을 따져 결정되는 임금의 시장논리가 사실상 무력화되는 셈이다.”(인터넷 <중앙일보>, 201883.)

 

위 통계치만 꼼꼼히 살펴보더라도 왜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이 이렇게 큰지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위에서 최저임금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일 실업자 증가 부작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법에 정한 최저임금을 받지 못 하는 최저임금 미만율’, 말하자면 노동 암시장부작용도 거론하지 않았다. 앞으로 최저임금 충격이 초래할 이런 핵심적 부작용이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아울러 우리나라 임금노동자의 연간 근로시간은 2016년 기준 2,052시간으로 OECD 20개국 중 2번째로 열악한데, 이를 올해 7월부터 주당 최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크게 줄였다. 당연히 개선해야 할 노동시간이지만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탈출구없이 진행돼버린 셈이다. 법적 강제만 있으면 시장을 일거에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보인다. 이런 식이라면 왜 차제에 최고임금제도까지 함께 창설해 소득격차를 원하는 만큼 획기적으로 줄이려는 생각은 않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이제 우리는 나라의 미래 명운이 갈릴 퀴즈를 풀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OECD 하위수준의 허약한 경제체질과 복지부재를 안고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25~40%에 직접 영향을 주게 될 최저임금을 법적 강제를 통해 GNI 대비 OECD 최고수준으로 충격적으로 밀어올림으로써 분배율, 소득격차, 실업자, 그리고 산업구조조정 등 문제까지 그럴 듯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다행히 경제학자가 아닌지라 출구를 배려하지 않은 우리나라 경제 구조에 대한 법적 문책의 결과가 어떨지 경제학적으로 추론할 책무가 없다.

 

호랑이는 대한민국을 등에 태우고 이미 내달리기 시작했다. 올해에 더해 내년 최저임금도 급격한 인상이 확정됐으니 올해 상황은 아마 예고편에 불과할 것이다.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하면 그 과실은 누구보다 중하위 계층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실패하면 그 포퓰리즘의 대가는 전 국민이 치러야 할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어쨌거나 국민 스스로 호랑이 등을 선택했으니 이런 저런 뒷북들이 부질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에 그저 행운 있기를 바란다.

 

김욱, https://twitter.com/GhimWook, 2018.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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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핑을 하다 난민문제에 관해 날카로운 한 댓글과 마주쳤다. (제주도 예멘) 난민문제에 대한 찬반토론이야 흔하디흔한 논쟁거리인데, 내가 특별히 날카로운이라고 말한 건, 그 논리 전개 때문에 한 말이다. 사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드루킹 수준을 벗어난 댓글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편견 없이 읽어보기 바란다. 필자 ID‘Al Mohamed Salam; ㄷㆍㄱ로 돼 있는 댓글 전문을 (문장이 깔끔하진 않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만화가가 의도하는 바가 역지사지를 통해 난민을 받자 같은데 작가는 애초에 난민을 받지 않는 주장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게 문제. 난민을 왜 무조건 받아야 하는가? 물어본다면 현실적 문제 상황은 무시하고 과소평가하며 십중십은 불쌍하고 인류애로써라고 할 것임.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일관성 있게 일상생활에서도 인류애를 발휘하여 현실적 여건 문제를 무릅쓰고 고아를 입양한다거나 노숙자를 자신의 집에서 재워줄까? 한 명도 없다고 자신함. 이런 사람들은 난민에 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생각보단 사회를 공유재로서 인식하여 피해가 있어도 자신이 아니라 남이 볼 거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임. 결국 이런 생각이 바탕에 있기 때문에 쉽게 쉽게 난민을 받자고 주장하며 이런 모습을 통해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인간이란 척을 하고 싶을 뿐임. http://www.ziksir.com/ziksir/view/6601

애초에 난 난민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내 주장보다는 단지 관련 주제의 인상적인 논거를 마주한 단상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관련 주제에 대해 뭔가 코멘트하려니 우선 내 입장부터 밝혀두는 게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단지 난민문제에 대해, ‘인류애 정신을 실현하되, 국제사회에서 각국은 (제국주의가 원인이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원인이든) 난민발생 책임과 능력에 비례해 난민수용을 해야 한다는 법 이전의 원칙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위 댓글 이야기다. 댓글처럼 난민문제는 궁극적으로 인류애(헌법전문엔 인류공영으로 표현돼 있다)’의 문제가 맞다. 여기서 댓글은 찬성론자들의 이 인류애가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사용함으로써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1968년에 개릿 하딘에 의해 이슈화된 공유재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그 이전에도 인식하고 있던) 오래된 학문적 주제인데, 엘리너 오스트롬은 관련 주제로 2009년에 여성으로서는 첫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댓글의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한다는 명제는 아마도 대한민국 구성원이 사회체제나 복지제도를 (흔히 인용되는 개릿 하딘의 사례인) 목초지 공유재처럼 이용해 자신의 어떤 사익을 극대화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경우, ‘난민수용 찬성자들은 사회라는 공유재를 합리적개인적극한적으로 이용해 뭔가 사익을 극대화해야 하는데, 그 극대화되는 사익이 뭘까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댓글은 명쾌하게 도덕적 우월감이라고 대답한다. 즉 난민수용 찬성자들은 공유재인 사회를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자신은 1/n(5천만)의 대가만 치르면서 도덕적 우월감을 극대화시키지만, 이런 게임의 법칙이 장기화되면 공유재인 사회는 피폐화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난민수용 반대자들은 특이하게도 공유재의 피폐를 걱정해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내가 이 댓글에서 가장 날카롭게 느꼈던 건,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한다는 명제 자체보다는 그 논거였다. 댓글은 난민수용 찬성자들이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해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면, 공유재 아닌 자신의 사유재를 이용해 고아나 노숙자를 상대로 똑같이 자신의 그런 인류애를 실현해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 그렇다면 앞으로 (쟁점이 각각 상당히 다르지만 그만한 공통점도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귀화이민, 외국인 노동자, 난민인도적 체류 등의 관대한 수용이 정말 사회를 공유재처럼 이용하는 현상이어서 사회가 피폐화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 스스로의 필요(사회공동체 규모의 급속한 와해방지라는 이익) 때문에라도 불가피하게 지금보다 더 관대하게 그런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지, 이 고도의 지난한 숙제를 우리 사회는 풀어야 한다.

 

위에서 나는 각국의 난민수용은 난민발생 책임과 능력에 비례해 난민수용을 해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만을 제시했지만, 더 구체적인 생각이 있더라도 짧은 지면에 자세히 언급하긴 힘들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댓글의 지적처럼, 이런 문제를 단순히 선악의 문제로 재단하는 건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문제가 아닌 경제주체의 입장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경제주체가 취하는 각각의 상이한 태도를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각 경제주체가 (귀화 이난민합법불법체류자를 포함해) 외국인 노동자 유입문제를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들과 일자리를 경쟁하는 노동자가 반대하는 건 결코 악은 아니다. 당장 일자리를 경쟁하지 않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중산층의 경우 자신들의 복지비용 증가와 소비지출 감소가 균형을 이룬다면 (댓글의 주장처럼) 찬성론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한편 상호주의 없는 자본과 상품의 무관세 무한 개방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자본가가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에는 관대한 반응을 보여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차원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찬반주장자들의 도덕적 우월감 획득 성향보다 우선 계급계층적인 물질적 이해관계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렇게 따질 때는 국내적 복지(확대)논쟁도 사회의 공유재 인식과 도덕적 우월감 획득이라는 정신적 차원보다는 계급계층적인 이해관계와 착취제도의 안정적 유지라는 물질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게 우선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가장 뜨거운 논쟁일수록 가장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위 댓글의 주인공이 남긴 화두를 열심히 더 연구해봐야겠다. 사회적 논쟁이 합리적 결론으로 이끈다 치고,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사회적 이득을 얻는다면 논쟁이라는 골치 아픈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건 공공재의 무임승차일 수도 있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든다. 읽고 싶은 아무 책을 읽기도 힘든 무더운 여름, 알지도 못 하는 댓글러의 무뚝뚝한 댓글까지 운 없이 눈에 띄어 그 화두를 덤터기 쓰려니 더 무더운 여름이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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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월드컵 기간에 좀 황당한 한국 관련 작은 소동이 두 차례 있었다. 마라도나가 자신에게 환호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눈 찢기 제스처로 화답(?)한 것과, 미국 라틴계 방송 텔레문도의 두 멕시코계 방송인이 한국 덕에 16강에 진출하자 기쁨에 들떠 역시 눈 찢기 제스처를 했는데 주위에서 단체 웃음으로 이에 호응한 사건이다. 이후 마라도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고, 두 방송인은 사과를 했지만 무기한 출연정지 처분을 받았다.

 

어쩌다 가끔 이렇게 남미인들이 우리를 향해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된 비하 제스처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맞으면 어떤 감정이 생기는가? 내 경우, 감정보다는 (다소 의아할 수도 있겠는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도입부(37)에 나오는 이 구절이 우선 연상된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5백 년 동안 한국을 통치해 왔으며 스스로를 일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해 온 관료제도의 통치자들을 포섭, 매수 혹은 파멸시켜야 했었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그들의 통치를 강요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유럽국가들이 그들의 식민지에 대해 겪었던 것에 비하여 보다 많은 곤란을 겪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제국의 침략자들이 원주민을 그나마 순조롭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원주민이 생각하기에도 자신들보다 침략자들이 뭔가 우월하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한데, 제국 일본은 강점지 조선으로부터 그런 암묵적인 내심의 인정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유럽국가들이 주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 식민지를 지배하면서 겪은 어려움보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겪은 어려움이 훨씬 더 컸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사태는 단순한 정신승리였을까? 아니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마주친 제국과 원주민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우열의식이 드러나는 초면의 상대였다. 한데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그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역사 DNA(민족적 집단 무의식)’속 민족적 우월의식으로 따지자면 조선이 일본보다 더 강했으면 강했지, 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인들에게 제국 일본은 외계인처럼 갑자기 등장해 처음 마주치게 된 우월한 문명국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로부터 문명을 전해주고 부대끼며 살았던 그저 낯익은 외국(왜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오늘날까지 흥미로운 관계를 유발시키고 있다. 예컨대 이렇게 질문해보자. ‘일본인은 궁극적으로 한국인을 비하할 수 있는가?’ ‘비하는 사전적 풀이에 의하면 업신여겨 낮춤이다. 예컨대 조센징이라는 말은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로 통용된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비하하면서 니그로라고 말하는 용어처럼 완벽한 비하용어로 사용될 수 있는가?

 

정신승리하는 극우적인 일본인은 그럴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보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그 비하는 예컨대 한국인이 일본인을 비하하면서 쪽발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비하의미를 담기 힘들다. 말하자면 일방이 다른 일방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비하하는 용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조센징니그로같은 사회언어학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내 보기에, 비하가 완벽하게 성공하려면 비하하는 자의 지위가 비하 받는 자의 지위보다 우월해서 그 간극을 극복하기 힘들어야 한다. 예컨대 전통적인 관계에서 비하는 계급적으로 주인이 종에게, 인종적으로 식민자가 원주민에게, 성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등, 자신의 우월한 지배관계를 과시하는 의미이지, 종이 주인에게, 원주민이 식민자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등, 단순히 언행만으로 우월의식을 애써 만들어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오늘날에야 개인적인 처지에 따라 그 우열의식이 얼마든지 유동적이긴 하지만 전통적집단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관찰해보자. 예컨대 가끔씩 폐쇄된 사적 자리에서 우리가 자를 붙여 말하는 강대국 국민(특이하게도 우리가 강대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라 국민에겐 자를 붙여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이 있는데 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비하라기보다는 일종의 저항적 언어 습관에 가깝다. 또 가끔씩 뉴스를 보면, 우리보다 약소국이라고 간주하는 나라(예컨대 대만) 국민들이 시위 등으로 우리를 대놓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반응은 이른바 강대국(예컨대 미국) 백인이 어쩌다 사회적으로 우리를 비하하는 것이 이슈가 됐을 때의 반응에 비하면 거의 무반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비하가 우열의식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서두의 사례를 풀어보자. 내 개인적으로는, 마라도나나 멕시코계 방송인들의 그런 우발적 행위로부터 비하를 당했다는 감정을 별로 느끼지 못 했다. 이는 가정하자면 미국의 어떤 잘난 유명 백인(예컨대 노벨상쯤 수상했다고 해두자)이 그런 행위를 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마라도나나 그들 멕시코계 방송인들도 그런 행위를 한 이유가 비하라기보다는 아마도 그것을 친근한 장난쯤으로 생각했거나 아무 생각 없는 무지(그렇다 하더라도 물론 당연히 그들도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철부지 같은 행동인지는 배워야 한다)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볼 때, 그들이 한국인에게 눈 찢기 제스처를 하거나 혹 한국인이 그들에게 비너라고 말한다면 ‘우열관계 없는 천박한 비하 흉내일 뿐이다.

 

어쨌거나 비하가 결국 사회문화적 관계의 표시라면, 비하할 수 없는 자들이 철없이 아무나에게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나 말을 해댈 때가 아니라 비하할 만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누군가를 (어떤 경우는 무의식적으로) 비하하는 언행을 할 때 마음의 상처가 깊어진다. 예로부터 그랬다. ‘비하는 아무나가 아무나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왕이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놀릴 때 비하이지, 광대가 왕을 놀리는 건 풍자일 뿐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사회관계에서도 자신이 약자의 처지에 있을 때보다는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언행을 보다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대칭적 사회 규범으로라도 지위의 형평이 맞춰진다면 그나마 세상이 공평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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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수 www.mokp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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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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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간지 기자가 <책혐시대의 책읽기> 저자 인터뷰를 하자면서 대뜸 그랬다. “책읽기 책을 왜 썼냐? 당신이 쓴 책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거다.” 하긴 그러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읽기 책은 아주 많다. 내가 여기에 한 권을 더 추가하려고 했던 이유가 뭘까? 책에 그 이유를 적었지만 더 그럴 듯한 해명이 필요한 듯싶다.

 

흔하기 짝이 없는 책읽기 책을 쓴 죄(?)로 나는 기자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얘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스님들은 왜 각자 자신의 화두를 붙잡고 깨우치려 하는가?” 선어록은 누구라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해설서도 있다. 선대 고승들이 이미 깨달은 내용을 학습해 그런가 보다고 그대로 따르면 될 텐데 뭣 때문에 스스로 화두를 붙잡고 시간을 낭비하며 씨름을 할까? 더 심란한 의문은 그렇게 고생해서 깨달아 봐야 고승들의 깨우침과 다른 혹은 더 뛰어난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책을 쓴 이유는 이 대답과 관계가 있다.

 

그에 대한 구체적 대답은 조금 뒤로 미루고 먼저 할 말이 있다. 나는 이 책을 독자 모두가 각자(!) 자신의 문제의식(화두)으로, 자신의 머리로, 자신의 노력으로, 역사 속의 '아름답고 잔인한 생각의 진화과정을 따라잡아보라고 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런데 우리가 천재들의 생각을 따라잡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가능하다!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모두가 천재가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천재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책에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 그럼 그렇게 천재를 이해했다 치자. 이 이해는 이제 내 것인가?! 아직은 아니다. 섣부르게 이 이해를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에 얘기한 고승들의 해탈 경험을 모아 놓은 선어록을 해설서를 통해 이해한 다음, '이제 그들의 해탈이 내 것이 됐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흥미로운 건 심지어 불교계에도 그런 식의 주입식 화두문답에 의한 유사 해탈 모습이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뭔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내 스스로 다시 알게됐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다시 알게 될지도 모른다. 무협지의 젊은 주인공이 얼떨결에 무림 절대고수로부터 주입받은 내공을 실전을 통해 끊임없이 제 것으로 만들어가며 눈앞의 새 세상을 극복해가는 이치와도 유사하다. <돈키호테>와 <파우스트>는 그런 앎의 고행과 관계가 있는 가장 유명한 책일 것이다.

 

우리는 주입식 교육에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심지어 책읽기에도 그런 습관이 마치 우리들의 본성인양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역사 속 위인들, 우리 시대의 뛰어난 학자들, 유명 저자들의 책을 그저 주입식으로 이해했을 뿐이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풍조가 넘쳐난다.

 

이쯤에서 강한 의문이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중요하지 자기 것인지 아닌지가 뭐 그렇게 중요하며, 설령 자기 것이 아니라도 모두 똑똑한 사람들의 훌륭한 생각과 결국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데 그게 나쁜가?

 

나쁘다! 그런 식의 자기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남의 생각을 아무리 소중하게 간직해봐야 책읽기의 목적이랄 수 있는 새로운 문제 해결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지식을 책읽기를 통해 자신의 논리와 생각으로 재구축한 것만이 내일을 위한 내 지혜고, 내 힘이다!

 

강조하건대, 자신이 훌륭한 사람들의 생각과 결론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게 아니다. (아마 실제로 대부분, 그리고 대부분의 사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결론적 생각을 내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그렇게 터득한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읽기에서까지 주입식 정보와 결론만을 탐하는 습관을 강화한다면 책읽기는 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다. 이런 식의 책읽기는 사람을 똑똑한 바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이럴 거라면 왜 전 국민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여 구태여 책읽기를 해야 하는가?

 

극단적으로 말해, 그게 정말 우리의 민주주의에 아무 문제도 없다면 대한민국의 아주 소수만 열심히 책읽기를 하고, 그들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든(심지어 개돼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 생각(결론)을 이해했다면서 당신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라고 영혼은 없지만 너무나 편리한 맞장구만 쳐주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그러고 싶은가? 나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악착같이 앞으로도 내 스스로의 머리로 책읽기를 하려 한다.

 

나는 <책혐시대의 책읽기>를 통해 파편적이 아니라 체계적인 책읽기를 아주 강조했다. 그건 다시 말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가다듬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어서 그런 것이다. 처음엔 다소 막연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입체적인 사고로 스스로의 생각을 강하게 만들고, 재미를 얻게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으로 책읽기를 안내하는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흔한 책읽기 책을 정색하며 다시 쓴 것이다. 이것으로 변명이 됐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책을 눈여겨 봐준 미디어의 다음 필자들에게 감사한다.

 

http://www.hankookilbo.com/v/080a6e99d30a44a3bab2cc90c9f10ae2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8051807312926968

http://www.fnnews.com/news/201805161709362294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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