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 박해영에 대하여
그녀가 재능 있는 작가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지에 오른 작가란 건 미처 몰랐다. 무협지엔 이해 불가능한 내공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생을 마감하는 절정 고수로부터 ‘불공평’하게 내공을 전수받은 행운아다. 나는 박해영도 분명히 그런 은밀한 사연을 갖고 있는 무림 고수라고 의심한다.
2. 연출 김원석에 대하여
김원석 역시 이름 있는 연출자이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난 그의 전작에서 보여준 영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 즉 그의 작품 ‘완성도’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번엔 달랐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528/pimg_7141201531917518.jpg)
나는 그가 연출한 후계동 밤의 '정희네' 앞길에서 고흐의 <아를 포룸광장의 카페 테라스> 밤 분위기를 느꼈다. 우리가 보는 고흐의 이 그림 속 공간 색감은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객관적 감각이 아니다. 삭막한 세상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는 우리는 비현실적인 푸른 하늘에서 터지듯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과 빛나는 노란색 테라스가 감싸주는 아늑한 따뜻함 속으로 꿈을 꾸듯 빨려 들어간다. 김원석은 악조건 속 한국 드라마에서도 악착같이 그런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519/pimg_7141201531910878.png)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작품 속 출연자들의 연기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마치 생활 속 다큐를 보는 듯 자연스러웠다면 김원석의 공이 컸을 것이다. 특별히 이지안 역을 맡은 이지은은 대체불가능한 연기를 보여줬다.
3. 작품에 대하여
이 작품은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유토피아 장르’에 속한다. 사실 이 포맷을 승화시킨 건 캐릭터의 대사가 그 주제를 짜임새 있게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구도를 잘못 다루면 ‘권선징악’이라는 전근대적인 진부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졸작이 될 수도 있었다. 한데 이 드라마가 훌륭한 건 그런 전근대적 진부함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드라마 속 캐릭터 ‘모두!’는 이 세상에 대해 할 말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현실 속 악당 도준영도 분명히 할 말이 있으며, 바람피운 아내 강윤희도 태산처럼 할 말이 있다. 심지어 사채업자 이광일의 눈빛에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이 ‘할 말 있음’이 바로 단순하고 전근대적인 권선징악적 선악구도를 해체한다. 우리는 모두 할 말을 가지고 있는 그 중 누군가일 뿐이다. 그러니 드라마 속 누군가를 간단하게 선/악으로 재단하고 섣부른 비난 혹은 상찬을 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우리가 드라마 속 삼안E&C라는 현실세계와 후계동이라는 가상세계(유토피아)의 모순을 한없이 상념하고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후계동의 ‘가족주의’가 미국식 ‘가족주의’와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미국식 가족주의는 소가족주의지만 후계동의 가족주의는 대가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한국식 대가족주의 유토피아에서 고통스럽게 좌절한 인물이 강윤희다. 그녀는 삼안E&C라는 현실과 후계동이라는 유토피아 사이에서 그 모순을 실감하게 해주는 인물이다. 그녀 덕에 우리는 후계동 유토피아의 중심 인물 박동훈이 왜 ‘불쌍하게’ 느껴지는지, 즉 유토피아 그 자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묻게 만든다. 마지막 회, 홀로 있는 집 안에서 서럽게 우는 박동훈은 왜 우는 것일까? 유토피아가 결국 누군가의 묵묵한 희생을 필요로 한다면 그 유토피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후계동 유토피아에서 현실 삶 속으로 출근하는 박동훈과 현실 삶 속에서 후계동 유토피아를 방문한 이지안은 서로를 연민한다. 이지안은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살아가는 박동훈을 이해했고, 박동훈은 ‘상처받아 너무 일찍 커버린’ 위악적인 그녀를 이해했다. 유토피아를 이해하는 자만이 지옥 같은 현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지옥 같은 현실을 이해하는 자만이 유토피아를 진정으로 꿈꿀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를 연민한다. 두 세상은, 박동훈과 이지안은, 아니 내 마음 속에서 공존하는 나와 너는, 그렇게 서로를 연민한다.
4. O.S.T.
맑고 애절한 목소리에 담아 들려주는 <어른>(Sondia)의 가사는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현실 속에서 '나는 내가 될 수 없다.' 오직 꿈 속에서만 '나는 내가 된다.' 철학자는 이런 사태를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의 작은 세상'이 현실 속에서도 그녀와 이 땅의 청춘들을 향해 웃어주기를 <나의 아저씨>는 소망했다. 아울러 <아득히 먼 곳>과 <백만 송이 장미>의 가사가 그렇게 절묘하게 인용된 것에 대해서도 감탄한다.
5. 덧붙이기 싫은 사족
이 드라마를 둘러싼 부질없는 논란은 우리나라 문화비평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예술적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앞의 이야기를 주입식 도덕관념에 맞춰 파편적으로 재단하는 능력 밖에 없다. 예컨대 ‘주인공이 담배 피웠다’, ‘미성년자가 술 마셨다’, ‘불법 U턴했다’, ‘폭행했다’, ‘바람피웠다’, ‘의상이 불량했다’, ‘쓰레기 무단투기했다’, ‘길거리에서 똥 쌌다’ 등등. 그런 것들이 그들 이슈의 거의 전부다! 이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나이 차가 많다’, ‘남자가 여자를 심하게 때렸다’는 비난이 주제를 삼키는 화두로 등장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소란스런 ‘대중들의 예술에 대한 도덕적 자기 검열시대’가 아닌가 한다.
우선, 남자 이광일의 여자 이지안에 대한 폭력? 그 불편한 폭력 없이 이지안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가? 이 현실의 비정함에 쫓기듯 살아가는 가진 것 없는 인생, 여성, 청춘에 대한 은유적 배경 설명이 불필요한가? 그런 장면을 문제 삼는 건 마치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모습을 담은 화면에 맹목적으로 분노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폭력적 영상을 통해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모순을 위선적으로 감출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의도다!
다음, 나이 많은 남자 박동훈과 어린 여자 이지안의 관계? 권컨대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여자의 허구 속 ‘정신적 불륜’조차 못마땅한 사람들(놀랍지도 않지만 이런 비난을 선동한 미디어 기사도 많다)은 이 드라마에 대한 같잖은 도덕적 비난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소설(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더 리더』를 읽으며 분을 풀기 바란다. 은유는 모르겠고, 파편적 이야기 자체만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잘 보일 것이다. 나이 많은 여자(36세)와 어린 남자(15세)의 ‘육체적 불륜’ 관계가 거리낌 없이 그려진다.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두 사람의 나이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오직 미국에서만 있는 현상이라며,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의 독자들에게서는 한 번도 그와 같은 질문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원하는 게 딱히 ‘나이 많은 여자와 어린 남자의 육체적 불륜 이야기’도 아니라면 다른 방법이 없다. ‘부도덕한 허구’를 배경 삼는 불편한 소설ㆍ영화보다는 아예 올바른 이데올로기로만 가득 찬 도덕책을 보며 마음 편히 즐기기 바란다. 대중 예술 생산자들은 대중적 소비에 편승하기 위해 하찮은 비난조차 힘들어하며 이야기의 전개를 왜곡시킴으로써 그 완성도를 추락시킬 수 있다. 그나마 종종 훌륭한 비평이 있어서 안도하기도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치졸한 문화 비평수준이 매우 위험하고 슬프게 느껴질 때가 많다. 대중 예술은 곧 대중의 수준이다. 대중인 내 수준을 한껏 높여준 <나의 아저씨>에 감사한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5. 19(수정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