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4일, 대통령 박근혜가 행한 대국민 사과발언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심지어 제가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뉴스1>, 2016년 11월 4일.
아마 우리 헌정사상 대통령의 (사과)발언 중 가장 기묘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라"는 위 발언은 사실일까? 누가 알겠는가만, "사실이 아니라"는 확인발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주 교묘한 사실이다.
위 발언엔 두 명제가 합해져 있다. ①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 ②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 ②는 사실관계 판단이 아주 쉽다. 하지만 ①은 판단이 어렵다. 자신이 뭔가를 믿고 있는데 그게 사이비종교가 아니라는 의미인지, 또 기본적으로 사이비종교와 종교의 구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와대에서 굿"만 하지 않았다면 위 두 명제를 합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는 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발언은 '굿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사이비종교에 빠졌다'는 사실까지 손쉽게 부정하는 아주 교묘한 효과를 본다. 더군다나 우리 '토속신앙의 굿'을 '사이비종교의 굿'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토속신앙을 폄훼하는 부당함도 있다.
애초 박근혜는 10월 30일의 '각계 원로'와의 만남에서는 "제가 사교를 믿어 청와대에서 굿을 한다는 얘기까지 있더군요"(인터넷 <YTN 뉴스>, 2016년 11월 1일)라고 말한 것으로 일부 언론은 보도했다. 이 표현을 기준으로 하면 박근혜가 부정한 것은 '토속신앙의 굿'이 아니라 '사교의 굿'이다. 자신의 '종교'를 옹호하기 위해 졸지에 토속신앙의 굿을 폄훼하지 않으려면 사과발언에서도 그렇게 표현했어야 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왜 이런 변명까지 해야 했을까? 다음은 영세교 교주 최태민의 측근이었다는 목사 전기영의 인터뷰발언이다.
-최태민이 박근혜를 알게 된 동기는.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다. 그 무렵 박근혜에게 최씨가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죽은 육영수가 나타나 ‘내 딸 근혜가 우매하니 당신이 그녀를 도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박근혜가 최씨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까만 승용차들이 최씨가 도를 닦는 곳에 왔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박근혜 앞에서 최씨가 육영수의 영혼에 빙의됐다면서 그녀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박근혜가 기절하고 입신(入神)을 했다.
-입신이라면….
입신이란 말은 최씨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입신은 교계용어다. 예컨대 환상을 본다거나, 천국이나 지옥을 본다던가, 뜨거운 성령 체험, 신들렸다는 등. 놀란 박근혜가 그때부터 최씨를 신령스런 존재로 보게 됐다고 한다. 인터넷 <국민일보>, 2016년 10월 31일.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우리가 듣는 얘기는 '전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뢰도에 의문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널리 퍼진 지금에 와서도 박근혜가 자신은 '사이비종교에 빠지지 않았다'는 한마디로 간단히 넘기려는 것은 신뢰도에 더 큰 의문을 낳는다. 사이비종교의 교주와 그 딸하고까지, 수십 년을 그렇게 끈끈한 관계를 맺은 사이비종교 비신도?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1105/pimg_7141201531517303.jpg)
그럼 '사이비종교에 빠지지 않았다'는 박근혜는 자신의 '종교'관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그녀의 일기를 모아 출판한 책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문장 이해력이 웬만큼은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이 책을 살펴보면서 거의 유일하게 무슨 의미인지 아리송했던 부분이다.
주위와 세상은 그대로인데 마음의 전환이 엄청나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소명을 내리신 하늘은 영원 불변하기 때문에, 영원 불변한 하늘, 그 하늘이 내리신 진리에 뿌리를 두고 사는 사람의 나무는 자연 영원 불변할 수밖에 없다. 163쪽.
사람의 나무? 영원 불변? 영세…? 교?! 물론 난 영세교의 교리도 모르고, 위 문장의 심오한 뜻도 이해하기 힘들어 그냥 그런 단순한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런 궁금증 때문에 굳이 영세교 교리 공부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다. 그런 나로서는 위 인용문장의 심장한 의미를 풀 길이 없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않았다'는 박근혜의 말이 웬지 '자신이 뭘 믿고 있든지 간에 그건 사이비종교가 아니다'고 우기는 것으로 들린다.
그렇게 단호하게 아니라는 대통령 박근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의심하는 백성들은 몽매하다. 하지만 그 수십 년 묵은 거대한 정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안 해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참고로 남들은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고 하고, 정작 본인은 아니라고 우기는 사례는 아주 흔하다.
그런데 박근혜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좀 무서운 말을 했다. 그 주인공은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종걸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대통령·여야대표·원내대표 5자회담에서 있었던 역사교과서 국정화 관련 대화 내용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뉴스미디어에 보도까지 된 바, 거의 국가기밀에 가까운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
내가 "부끄러운 역사로 보이는 게 어떤 부분이냐"고 되묻자, 최근에 최순실이 등장하면서 다시 회자되고 있는 문제의 그 발언이 나왔다. "전체 책을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 (…) 나는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귀기(鬼氣)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그 '귀기'의 느낌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노컷뉴스>, 2016년 10월 29일.
사실 난 귀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귀기'의 느낌도 잘 모른다. 그래서 그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는 이종걸의 신기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은 든다. 어쨌거나 나는 이종걸이 박근혜에게 느꼈다는 그 '느낌적 느낌'을 절대로 느끼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 갈 일도 없겠지만, 정말이지 그런 곳엔 가고 싶지가 않다. 멀리서라도 쳐다보기조차 싫다. 그 음산한 '귀곡산장' 같은 대한민국 청와대를….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