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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전혜린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 낯선 문장
- 고고한 번역, 불친절한 아름다움

'데미안'은 더 이상 낯선 책이 아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이미 한 번쯤은 접해봤을 고전이고,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이제는 덜 끌리는 책일지도 모른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몇 번이고 다시 찾는 명작 중의 명작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익숙한 작품을, 전혀 다른 얼굴로 다시 만났다. 바로 전혜린님의 번역본을 통해서였다.
이번에 읽은 데미안은 북하우스에서 출간된 전혜린님 타계 60주기 기념 복원본이다.
독일 유학파 여성 지식인이자, 국내 최초로 '데미안'의 독일어 원문을 완역한 인물!
전혜린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역자가 아니라, 번역문학의 첫 불꽃, 한국에서 헤세 열풍을 불러온 하나의 상징이라고 했다.
그녀의 존재는 단순한 언어 전달자가 아니라, 문장을 통해 세계를 다시 짜 맞추는 해석자이자 창작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이미 데미안을 세 번이나 다른 번역본으로 접한 적이 있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전영애 역), 위즈덤하우스의 데미안(서유리 역), 더스토리의 데미안(이순학 역)까지.
그때까지는 단지 문체나 말투의 차이, 정도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전혜린님의 데미안은 지금까지의 데미안들과 완전히 달랐다.
매끄럽게 정제되지 않은 문장, 한없이 고요하면서도 날카로운 표현들.
그 안에는 단어 하나하나가 문장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 어딘가 낯설지만 동시에 묘하게 매혹적인 언어의 긴장감이 있었다.


그녀의 문장은 마치 싱클레어의 내면처럼 불안정하면서도, 진실했다. 마냥 유려하거나 감정선을 이끌어주려는 친절함은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읽는 이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사유의 흔들림, 그리고 그 불편함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단순히 독자가 아니라 무언가를 절실히 이해하고 느끼려고 애쓰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은, 마치 데미안을 처음 만났을 때의 싱클레어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번에 더스토리 번역본도 함께 놓고 문장을 비교하며 읽었는데, 같은 문장이 이렇게까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경이로웠다.
더스토리의 문장은 비교적 매끄럽고 안정적이며,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반면 전혜린님의 문장은 우리가 평소에 보던 책들의 문장보다 거칠고, 때로는 생략되고, 정제되지 않은 듯하지만,
그 속에 담긴 어떤 무게감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었다.
그건 마치, 예전 지식인들이 써 내려간 고풍스럽고 고고한 문체, 지적이고 철학적인 기운이 배어 있는 문장처럼 보였다.

나는 그 문장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문장을 해석하려는 나의 움직임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받아내는 어떤 과정처럼 느껴졌다.
물론 다른 역자분들의 글과 내용 면에서 해석 면에서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다른 느낌이 있었다. 확실히 달랐다.
이전에는 고전문학을 읽을 때 역자의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책이 좋다면 그만이고, 내용이 인상 깊다면 어느 정도 번역에 불편함이 있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 경험은 달랐다. 데미안이라는 하나의 고전이, 역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몸으로 느꼈다.
이제 나는 책을 펼치기 전, 가장 먼저 역자의 이름을 확인하게 될 것 같다. 그 이름이 어떤 문장을, 어떤 감정을, 어떤 여정을 데려올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좋은 번역은 단지 문장을 해석하고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시대와 정서, 사고방식까지 함께 데려오는 통로라는 것을 이제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혜린님의 데미안은 내게 그것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책이 되었다.
데미안은 여전히 같은 이야기다.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혜린님의 문장으로 만났을 때, 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다.
이 책은 내게 또 한 번의 방황과 또 한 번의 자각을 선물했다. 그건 아마도, 좋은 번역만이 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게, 문학을 다르게 읽는 눈과, 한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는 인내를 선물했다.
이 모든 것은, 책장이 아닌 문장 사이에서 일어난 성장이었다.
새로운 데미안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