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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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사이에서


'눈먼 자들의 나라'라는 책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먼저 떠올렸다.

이름도, 주제도 너무 닮아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 작품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다른 분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영화로도 제작되고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던 사라마구의 대표작이라서 안 읽어도 이름은 들어본 사람들이 많았을테니까 말이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영국의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가 1904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인데, 사실 조지 웰스의 대표작은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됐던 우주전쟁이다.

SF의 소설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의 단편 작품이라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1995년에 출간된 사라마구의 작품보다 90년이 앞선 작품이라서

실질적으로 따지면 사라마구가 조지 웰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싶다.


​두 작품 모두 시력을 상실한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이야기의 톤과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전염병과 수용소, 인간 본성의 붕괴를 묘사했다면, 웰스는 폭력이나 혼란이 아닌 조용한 공동체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눈이 보이던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실명이라는 질병이 퍼지며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장님이 된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의 혼란과

수 세기 동안 전염병으로 인해 시력이라는 것이 서서히 사라지며 후대로 내려가면서 준비를 하고, 시력이 없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공동체의 모습은

생각해 봐도 다를 수밖에 없긴 할 것이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은 사람들이 세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가 된 외딴 협곡 속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수 세기 동안 자신들만의 질서를 세우고 조용히 살아가던 이들 사이에, 산에서 추락해 마을에 들어오게 된 한 남자 누네즈가 등장하면서 사건이 시작되는데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식의 충돌, 이방인의 시선을 통해 다시 조명되는 공동체의 논리, 이 모든 것이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전개된다.

특히 누네즈가 자신의 '시력'을 우월함으로 믿고 그것을 통해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며 독자에게 반전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공동체의 사람들은 시력을 잃었지만, 나름의 질서와 문화를 만들어내며 살아간다. 그들에겐 보는 것이 필요 없는 세계가 있다.

오히려 보이는 자인 누네즈가 점점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리감을 느끼며, 그들에게 미개한 자로 낙인찍힌 지점에서

웰스의 질문은 명확해진다. 보는 것만이 우월하며, 그것만이 정상적인 것인가?


​누네즈는 그 공동체에서 정상이 아니며, 그의 시각은 이 사회에서는 아무런 우위도 갖지 못한다. 이런 설정은 오히려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나 상식은 과연 보편적인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협의와 질서일 뿐일까?


내가 접한 '눈먼 자들의 나라'는 '내로라' 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영어 원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원문을 참고하거나 비교하며 읽기에도 유용하다.

본문 자체는 비교적 짧아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책 후반부에 실린 편집자의 말과 독후 활동,

그리고 네 편의 해설은 이 짧은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깊이 있게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각 해설은 인식론적 시각, 문학적 맥락, 사회적 풍자, 심리적 상징 등 서로 다른 키워드를 통해 이야기를 파헤친다.

이를 읽으며 하나의 글을 읽고 다양한 생각으로 갈라지는 것이야말로 독서가 가진 가장 깊은 힘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이야기 하나가 이처럼 다채로운 독해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은, 고전 문학이 가진 지속적인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짧지만 깊다. 이야기 자체의 메시지도 강렬하지만, 그 이후 펼쳐지는 해석의 무대는 더 넓고 흥미롭다.

고전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금 소환된 이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단지 소설을 읽는 경험이 아니라, 독서를 매개로 더 깊은 사유와 성찰로 나아가는 여정을 선물한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한참 동안 생각이 멈추지 않는 독서를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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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 드롭, 드롭
설재인 지음 / 슬로우리드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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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상상, 너무도 현실적인 감정


요즘 SF소설에 재미를 붙이고 싶어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고 있는데,

이번 책도 대놓고 SF는 아니지만 SF적인 상상이 담긴 소설이다.

설재인 작가님의 단편소설집 드롭 드롭 드롭에 실린 네 편의 단편은

멸종, 종말, 변이 등 흔히 SF에서 기대하는 소재들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소재들을 가정폭력과 지방소멸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풀어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야기들 속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감정과 관계, 공포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하나같이 분명한 목소리로 마음에 박힌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은 책의 제목과도 같았던 작품 '드롭, 드롭, 드롭'이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아주 황당하다.

어느 날 갑자기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몸이 되고, 아이들은 어른의 몸으로 변하게 되는 상황.

이 급작스러운 전환 속에서 주인공 예원은 자신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는 반려견 꼬똥과 마주한다.

사실 처음에는 낯설었다. 체취나 익숙한 습관 같은 걸로 주인을 알아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 단절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낸다.

예원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려 하고, 꼬똥은 그때마다 더 깊이 움츠러들고, 더 멀리 도망친다.


​동물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 설정은 꽤 마음을 흔들었다.

내가 아는 나와, 반려동물이 기억하는 나 사이의 간극이 하루아침에 벌어졌을 때 그 상실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예원이 겪는 당황스러움, 안타까움, 절망 같은 감정은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하게 될 법한 감정이다.


그 외에도 미림 한 스푼에서는 사람들이 증발하는 와중에 솜새끼라는 어이없는 외계인이 등장하고,

쓰리 코드는 음악과 과학이 뒤섞인 기묘한 세계로 이끄는데 개인적으로는 문명의 탄생 설화라는 이 이야기가 썩 좋진 않았다.

멸종의 자국은 이상한 종족들과 이상한 현상 등 SF다운 방식으로 신화적 서사를 보여준다

물론 그 마지막은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불쾌한 또 한 편의 가정 폭력에 대한 이야기 였지만....

결국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결국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감정들이 있다.

두려움, 분노, 상처, 회복,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믿고 싶다는 마음 같은 복잡한 것들.


이 소설집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점은 비슷하기 보다 색다른 상상력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상상력을 지금의 학생들이 많이 읽고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멸종이라는 단어와 몇 가지 요소들은 미래적이고 낯설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과 메시지는 너무도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단순히 기이한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드롭 드롭 드롭'은 사실 꽤 무겁다면 무거운 이야기는 맞는 것 같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가정 폭력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도무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가볍게 읽히는 단편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마음 한구석을 오래도록 건드리는 질문을 남겼다.

수 많은 감정에 대해 곱씹게 됐으니까.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꿈을 꾼 것처럼 마음이 뒤숭숭해지는데 그 기분이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그만큼 여운이 긴 소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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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커 컬러링 랜드마크 : 세계의 명문 대학 스티커 컬러링 랜드마크 시리즈
일과놀이콘텐츠연구소 지음 / 북센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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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 도시의 볼거리와 입학 정보까지! 책 속에 담긴 똑똑한 구성



오랜만에 북센스에서 출간된 새로운 스티커 컬러링북을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이번 스티커 컬러링북의 주제는 바로 세계의 명문 대학들인데요.

옥스퍼드, 예일대 같은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곳부터, 국내의 서울대학교까지 포함되어 있어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사실 다양한 랜드마크나 유명 인물, 캐릭터 시리즈의 스티커 컬러링북은 많이 봐왔지만,

명문대를 주제로 스티커 컬러링이 나왔다는 게 꽤 신선했어요.

언제나 센스가 넘쳤던 북센스 출판사 특유의 센스와 기획력이 이번에도 특히나 엿보이는 부분이었죠.

특히 대학이 있는 도시의 즐길 거리나 입학 사정 정보가 함께 담겨 있어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학부모들에게도 유용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도안마다 평균 약 179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조각 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라, 아이들이나 스티커 컬러링 입문자분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요.

참고로 제가 기억하는 스티커 컬러링북 최다 조각은 반 고흐 시리즈로 모든 도안이 평균 300조각 정도였습니다.

굉장히 세밀하고 오래 걸리긴 했어도 색감도 뛰어나고 완성하면 성취도가 정말 높았거든요?

난도가 높은 스티커 컬러링북을 찾으신다면 반 고흐 시리즈 추천해 드립니다.


물론 조각 수가 적다고 해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건 아니었어요.

스티커 하나하나의 색감은 여전히 아름답고 차분해서, 붙이는 내내 집중할 수 있었고, 완성 후의 만족감도 충분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스티커 컬러링북을 아이에게 시켜본 적이 있었는데 차분하게 집중해서 잘하더라고요 재밌어하고요.

엉덩이가 무겁지 않아서 걱정인 부모님들도 직접 시켜보시면 아이들이 도안에 대한 이야기, 스티커에 대한 이야기, 색감과 숫자에 대한 이야기 등등

다양한 부분에 시선을 돌리면서도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걸 경험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이들 중에서도 예쁘게 붙이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있고,

성인분들 중에서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너무 정교하게 붙이려고 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제 주위에도 그런 분들이 계셔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조금 비뚤어져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여유 있게 작업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핀셋을 사용하면 정교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요즘 다양한 아트 핀셋들이 많이 나와서 사용하기도 좋죠? 손가락보다 얇고 세밀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용 시 주의가 필요해요.

세밀한 작업에는 뾰족한 아트 핀셋이 좋지만, 날카로운 제품은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다칠 위험이 있어요.

사실 저도 무심코 옆에 두었다가 손가락을 찔려서 피를 본 적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어린아이와 함께 작업할 땐 끝이 둥근 핀셋을 이용하시거나 옆에서 잘 지켜봐 주시고 안전캡도 꼭 끼워주세요!


완성된 서울대 도안은 생각보다 더 예뻤고,

정리된 스티커들이 하나의 그림처럼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언제나처럼 묘한 몰입과 성취감을 안겨줬습니다.


색으로 놀고, 숫자에 집중하며, 세계의 명문대학을 여행하는 시간.

스티커 컬러링북은 역시 이번에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조용한 오후, 아이와 함께 붙이기에도 좋고,

혼자만의 몰입 시간으로도 손색없는 취미입니다.

책과 핀셋만 있거나 핀셋이 없이 손으로만 붙일 수 있어서 가볍게 시작하기도 좋은 취미죠.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고 싶은 분들이나 바빠서 오랜 시간 할애할 수 없는 분들, 집중력을 키우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언제나처럼 즐겁고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시리즈로 만나봤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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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 독송과 다라니 기도를 위한
상욱.현안 옮김 / 위앙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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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경전, 그러나 따뜻한 문장

- 읽으며 기도하고, 천천히 수행하고



나는 무교다.

하지만 종교적인 분위기 중에서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사찰을 말한다.

기독교와 천주교를 믿는 가족도 있고, 나 역시 성경을 가까이해보려 노력한 적도 있었지만, 나를 가장 안정시키는 건 사찰의 풍경이었다.

사찰 마당을 걷고, 부처님 불상 앞에서 조용히 인사하고,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탁 소리에 마음을 비워보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러다 이번에 처음으로 접한 책이 바로 위앙북스에서 출간한 '독송과 다라니 기도를 위한 여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이다.

줄여서 '약사경'이라고 불리는 이 경전의 이름은 어렴풋이 들어본 적 있지만, 실은 어떤 내용인지도 잘 몰랐다.

금강경, 반야심경, 천수경 정도만 이름을 알고 있는 내겐 이번 독서가 일종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게다가 이 책은 단순히 읽는 경전이 아니라, 독송하고 기도하는 실천서처럼 구성되어 있어 마음을 비우고 시작하기에 좋았다.

무엇보다 약사경에 나오는 부처님이 '약사여래'라고 말 그대로 약사, 의료의 전반을 뜻하는 부처님이라 '치유 수행'이라는 말에 조금 더 관심이 생겼다.

몸과 마음이 쉽게 지치고 병들기 쉬운 요즘, 경전을 통해 조금이나마 나를 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책을 펼치자마자 느낀 건, 굉장히 정갈하고 품격 있는 책이라는 인상이었다.

양장본이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 왼쪽에는 해설, 오른쪽에는 원문이라는 구성도 참 친절했다.

하나의 구절을 눈으로 읽고, 해석을 곱씹으며 다시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니 내용이 훨씬 잘 와닿았다.

불교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지만, 최소한 내가 지금 읽는 문장이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더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 책을 읽었다고 정확하게 기도하는 방법도 읽는 방법도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배울 수 있는 건 많았다고 자부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수록 문장의 울림이 깊어졌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의례적인 종교 관념의 기도문처럼 다가왔던 문장들이

두 번, 세 번 읽다 보면 점점 나에게 진정한 뜻에 대해서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중간중간 등장하는 다라니 구절들은 마치 내 안의 불안을 잠재우는 주문처럼 다가왔다.

나는 아직 수행자도, 독실한 불자도 아니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이 책을 마주하고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행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읽으면서 마음속에 가장 많이 떠올랐던 단어는 역시 치유였다.

여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은 단순히 병을 낫게 해달라는 바람이 담긴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마음의 병을 먼저 살피고, 나와 이웃, 세상에 빛과 평안을 기원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 메시지가 참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책은 신앙심보다 마음가짐을 먼저 챙겨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경전을 필사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성경 필사를 하듯, 나도 이 경전을 한 줄씩 적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건 단순한 글쓰기나 따라 쓰기 이상의 의미일 것이다.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고,  이 순간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

필사는 어쩌면 그 묵묵한 수행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여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은 분명 경전이지만, 일상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보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느꼈던 건 그저 마음이 조금 더 맑아졌다는 것과 조용히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 생겼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의 고요가 지금의 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불교에 뜻이 있는 사람, 불교에 관심이 있거나 경전, 경문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해 보고 싶다.

많은 가르침,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진 못하지만 무언가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그 어려운 불교의 틀을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나 역시 불교의 가르침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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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전혜린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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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이야기, 낯선 문장

- 고고한 번역, 불친절한 아름다움


'데미안'은 더 이상 낯선 책이 아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이미 한 번쯤은 접해봤을 고전이고,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이제는 덜 끌리는 책일지도 모른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몇 번이고 다시 찾는 명작 중의 명작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익숙한 작품을, 전혀 다른 얼굴로 다시 만났다. 바로 전혜린님의 번역본을 통해서였다.


​이번에 읽은 데미안은 북하우스에서 출간된 전혜린님 타계 60주기 기념 복원본이다.

독일 유학파 여성 지식인이자, 국내 최초로 '데미안'의 독일어 원문을 완역한 인물!

전혜린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역자가 아니라, 번역문학의 첫 불꽃, 한국에서 헤세 열풍을 불러온 하나의 상징이라고 했다.

그녀의 존재는 단순한 언어 전달자가 아니라, 문장을 통해 세계를 다시 짜 맞추는 해석자이자 창작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이미 데미안을 세 번이나 다른 번역본으로 접한 적이 있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전영애 역), 위즈덤하우스의 데미안(서유리 역), 더스토리의 데미안(이순학 역)까지.

그때까지는 단지 문체나 말투의 차이, 정도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전혜린님의 데미안은 지금까지의 데미안들과 완전히 달랐다.

매끄럽게 정제되지 않은 문장, 한없이 고요하면서도 날카로운 표현들.

그 안에는 단어 하나하나가 문장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 어딘가 낯설지만 동시에 묘하게 매혹적인 언어의 긴장감이 있었다.



그녀의 문장은 마치 싱클레어의 내면처럼 불안정하면서도, 진실했다. 마냥 유려하거나 감정선을 이끌어주려는 친절함은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읽는 이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사유의 흔들림, 그리고 그 불편함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단순히 독자가 아니라 무언가를 절실히 이해하고 느끼려고 애쓰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은, 마치 데미안을 처음 만났을 때의 싱클레어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번에 더스토리 번역본도 함께 놓고 문장을 비교하며 읽었는데, 같은 문장이 이렇게까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경이로웠다.

더스토리의 문장은 비교적 매끄럽고 안정적이며,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반면 전혜린님의 문장은 우리가 평소에 보던 책들의 문장보다 거칠고, 때로는 생략되고, 정제되지 않은 듯하지만,

그 속에 담긴 어떤 무게감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었다.

그건 마치, 예전 지식인들이 써 내려간 고풍스럽고 고고한 문체, 지적이고 철학적인 기운이 배어 있는 문장처럼 보였다.



나는 그 문장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문장을 해석하려는 나의 움직임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받아내는 어떤 과정처럼 느껴졌다.

물론 다른 역자분들의 글과 내용 면에서 해석 면에서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다른 느낌이 있었다. 확실히 달랐다.


이전에는 고전문학을 읽을 때 역자의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책이 좋다면 그만이고, 내용이 인상 깊다면 어느 정도 번역에 불편함이 있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 경험은 달랐다. 데미안이라는 하나의 고전이, 역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몸으로 느꼈다.

이제 나는 책을 펼치기 전, 가장 먼저 역자의 이름을 확인하게 될 것 같다. 그 이름이 어떤 문장을, 어떤 감정을, 어떤 여정을 데려올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좋은 번역은 단지 문장을 해석하고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시대와 정서, 사고방식까지 함께 데려오는 통로라는 것을 이제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혜린님의 데미안은 내게 그것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책이 되었다.


​데미안은 여전히 같은 이야기다.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혜린님의 문장으로 만났을 때, 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다.

이 책은 내게 또 한 번의 방황과 또 한 번의 자각을 선물했다. 그건 아마도, 좋은 번역만이 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게, 문학을 다르게 읽는 눈과, 한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는 인내를 선물했다.

이 모든 것은, 책장이 아닌 문장 사이에서 일어난 성장이었다.


새로운 데미안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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