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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 고양이
이준희 지음 / 폴앤니나 / 2025년 8월
평점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SF 단편 속, 발견한 온기

처음 이 책 제목을 봤을 때, 솔직히 말해 고양이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미스터리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생명이 여기저기 다른 우주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지 않나?
그런데 막상 책장을 열어보니, 고양이는 이야기의 한 장면, 혹은 하나의 키워드에 불과했다.
그보다 훨씬 깊고, 훨씬 심오한 이야기가 여섯 편의 단편 속에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이 책은 단편집이다. 그러나 단순히 여러 이야기의 묶음이라고만 말하긴 어렵다.
서로 전혀 다른 주제와 배경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읽고 나면 이상하게도 하나의 감정선이 남는다.
마치 각각의 이야기가 다른 악기 같지만, 연주가 끝나고 나면 같은 멜로디가 귓가에 맴도는 것처럼.

첫 번째 이야기 '루디'는 화재 현장에서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소방관 태주와, 그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덮어 씌워 깨어나게 하려는 인공지능의 이야기다.
AI가 인간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설정은 분명 SF 적인 긴장감을 가진다. 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것은 한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어진다. 비슷한 계열의 영화가 많이 생각났다.
기술의 차가움 속에 스며든 인간적인 온기. 그것이 첫 번째 이야기에서 느낀 핵심이었다고 본다.
두 번째 '대수롭지 않은'은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아주 작은 변화가, 대수롭지 않다고 넘겼던 사건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큰 사건이 아니어도, 사람의 하루는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읽는 내내 내 일상에도 이런 변곡점이 있었나 떠올리게 된다.
세 번째이자 표제작 '평행 우주 고양이'는 주인공과 레나라는 인물의 복잡한 관계론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고양이가 뭔가 나오나 했는데 내 생각과 다르게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끝에 등장한 것뿐이었다.....
이 작품은 내용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데 복잡 미묘한 관계론이다.
네 번째 '심해의 파수꾼들'은 깊은 바닷속 도시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심해라는 공간은 원래 압도적인 고립감과 두려움을 주지만, 이 책에선 조금 달랐다. 그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꿈도 있고 희망도 있고 온기가 느껴졌다.
차가운 물속에서 오히려 강하게 느껴지는 인간적인 체온이랄까? 약간 물속에 오래 들어가 있으면 물속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려나?
다섯 번째 '마인드 리셋'은 기억 삭제 시술이 까다로운 적합성 검사에 걸린 사람들을, 비공식 업체에 연결해 주는 브로커의 이야기다.
인간이 가장 바라는 것 중 하나는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 욕망의 이면을 찌른다. 과연 기억을 지우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혹시나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을까?
사람의 뇌와 마음은 연결되지 않아서 뇌로는 잊어도 마음으로는 남아 있어서 그 괴로움이 반복된다면,
사람은 그 괴로움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 기억을 지울 바에는 과거로 돌아가는 게 빠르지 않을까란 상상을 했다.

마지막 '여자의 계단'은 사라져 버린 선배의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SF적이라기 보단 몽환적인 느낌이 꽤 강했는데 그림이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공감을 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주된 이야기는 이것 역시도 사람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갑자기 증발해버린 여자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초반에 나온 그 날아가버린 씨앗들이 의미하는 게 자기 자신이었나 싶기도 했다.
사람의 흔적과 부재가 만들어내는 서늘함과 쓸쓸함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이 급하게 떠난 흉가나 폐가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간 본 적이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소름이 돋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남자도 여자의 남겨진 물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단편집의 좋은 점은 다양한 이야기를 한 권에서 맛볼 수 있다는 거지만, 때론 작품들이 비슷한 톤을 가져서 읽는 재미가 단조로워질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여섯 편 모두 각자의 개성이 뚜렷했고, 마치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아놓은 듯한 다양성이 있었다. 그런데도 다 읽고 나면 묘하게 하나의 정서가 흐른다. 아마도 그건 작가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겠지.
작가님의 문체는 묘사력이 폭발적으로 화려한 편은 아니다. 대신 깔끔하다.
가끔 생소한 단어나 과학적 개념이 나와도, 그것 때문에 읽기가 불편하진 않았다.
SF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아, 이런 세계구나 정도로만 이해할 수 있어도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는 책이다.
'평행 우주 고양이'는 SF 적인 설정 속에서도 사람을 먼저 본다.
기술, 이론, 가설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사랑하고 상처받는 사람들을.
그래서 이 책을 덮고 나면, 마음이 이상하게 차갑지 않다. 오히려 잔잔하게 데워진다.
그게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