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페미니스트 왕비들
석해인 지음 / 운주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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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페미니스트 왕비들'이라는 제목보다는 몽골 역사 속에서 살펴보는 페미니즘이라던가

이와 비슷한 느낌의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당당하게 주체성을 가진 몽골의 왕비들의 사례를 다루고 있다.

왕비들도 대단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것들이 가능하게 했던 옛 몽골인들의 의식과 문화가

한 몫하지 않았다 생각한다. 유목민 특유의 상황 때문에 그런 것들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매우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칭기스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책이다.

 


딸을 보내면서 아버지 칭기즈칸은 딸에게

삶의 주인은 남편도 아들도 아닌 자신이며,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하라고 당부했다.

 


"도약할 때는 발이되고 구부러질 때는 가지가 되고

 미끄러질 때는 철편이 되어

뜨거운 도움을 보낼 것을 사랑하는 알라카 베키는 알아두어라.

네 몸은 부서지지만 고귀한 이름은 영원하다.

큰 생각보다 훌륭한 동지는 없고

무지한 생각보다 더 나쁜 적은 없다.

고귀한 것은 많으나 네 몸은 무엇보다 믿음을 지니며

사랑할 것은 많으나 뜨거운 목숨을 무엇보다 아끼며

굳건히 나아가면 모든 것에 이로움이 있으며..."

 


"신중하고, 성실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어라...

인생은 짧지만 명성은 길다는 것을 명심하라.

많은 사람들이 너를 도울 수는 있지만

 너의 생각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다."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러 갈 때

국가의 안전을 알라카 베키에게 맡기면서

'제국을 경영하는 공주'라는 칭호를 주었다.

 

 

 

칭기즈칸이 남긴 대법령 제 11조는

'모든 종교는 차별 없이 존중해야한다.

종교란 신의 뜻을 받드는 면에서는 모두 같다.'이다.

이 밖에도  칭기즈칸의 대법령 가운데에는

'탁발승,이슬람 성직자, 의사, 학자, 수행자, 장의사 등은

조세와 부역을 면한다'는 조항도 있다.

 


 

칭기즈칸의 국가 경영에는 아들보다 딸들이 주요 인재로 활약했으며,또한 그들을 믿어주는 칭기즈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유아기에 아버지의 지지를 받고 자란 딸들은 늘 어디서나 당당하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페미니스트의 마인드를 가졌고, 또한 딸들은 그만큼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대제국을 건설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여자아이들의 장래희망을 물으면 연예인이 대부분이었다.

무언가 되고 나서 이후의 길잡이가 될 롤모델이 전무하다.

그러나 몽골의 여자들은 역사속에서 진취적으로 자신의 야망과 꿈을 이루어갔던 왕비들이라는

길잡이가 있기에 자신의 꿈을 제한하지 않지 않을까하는 자칫 논리적 비약이 있어보이는 생각도 들었다. 고려시대에 조선에 비해서는 여성상위 시대였던 것을 보면 어느정도 元나라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 톨로이가 죽자 마비의 병이 나은 형 우구데이 칸은

 소르칵타니를 자신의 아들 귀위크의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자신의 남은 일생을 자식들을 기르고 가르치는데

바치고 싶다고 허락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칸의 명령을 거절했으나

 칸의 명령을 어겼다고 사약을 받지는 않았다.

재혼을 거부한 것은 그녀의 선택일 뿐이었따.

척박한 땅에서도 큰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원대한 꿈의 자리에 남자를 끌어들이는 무지한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유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유 외에 무엇을 올려놓는 순간 나는 살아있으나 죽은 목숨이다.'

소르칵타니는 달콤하지만

칼날에 묻은 꿀과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고

4명의 아들을 칸으로 키워냈다.

 


몽골인들은 약혼과 결혼을 구분하지 않는다.

약혼한 커플을 부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신랑이 처가살이를 마칠 때까지 그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처갓집의 풍습을 배우고 처가 식구들의

명령에 따르며, 사냥도 하고 동물들도 보살펴야 한다.

신랑은 자신이 유능한 목동이며 사냥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처갓집에서는 사위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즉시 돌려보낼 수 있다.

 

 

 

고구려 형사취수제와 서옥제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유목생활 특성상 무조건 형제의 아내로 다시 결혼해야하는 줄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이란 매우 중요하다.

 


전체적으로 몽골에 대해, 칭기즈칸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책이었다.

박원길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라는 책을 미리 읽고 봐서 인지 이해가 더 쉬웠다.

9개월 만삭의 몸으로 전장에 나가서 승리를 이루고, 아들을 모두 칸으로 길러내는 몽골의 왕비 모습은

자칫 '슈퍼맘'처럼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있으나 일단 주체적이고 자신의 삶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여자라도 무시하지 않고 배척하지 않는 문화가 기반되어 있다는 점은 배울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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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 -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와 함께한 딸의 기록
하윤재 지음 / 판미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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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로 인해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엄마와 딸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생활이 담긴 글이다.

'치매, 엄마와 딸'이라는 주제는 자칫 뻔하고 흔한 신파로 내용이 흐를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담담하게 엄마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 엄마가 살아왔던 삶, 엄마와의 추억을

친구에게 일상 통화를 하듯 이야기한다. 


처음 책 제목을 보자마자 덜컥 겁이 나고 서글픔을 느꼈다. 

치매라는 것이 벽에 똥칠하거나 자식을 못 알아보는 병이라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가득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겁을 집어 먹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엄마에게 내 존재가 잊혀진다는 것, 더 이상 엄마에게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는 두려움이 왈칵 몰려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내 상황과 엇비슷하기 때문일까? 저자의 시선으로 담담히 읊어 내려가는 엄마와의 일상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다. 어둠의 다크니스 기운이 가득하던 중2병 시절 시내에서 내 이름을 몫 놓아 부르던 외할머니를 외면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이 화가 났고,늘 쓸고 닦고 더러운 것은 견디지 못하던 외할머니께서 뇌를 다치고 나서는 180도 달라지셨을 때의 충격, 엄마의 엄마가 요양병원에 가셔야 한다는 현실에 나의 엄마는 또 얼마나 암담하고 무섭고 캄캄했을까 엄마의 슬픔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던 내 모습. 그리고 '엄마는 무엇을 좋아할까?' 생각했을 때 먹을 것만 떠오른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치매라는 병을 통해 엄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오만을 벗고, 또 다른 모습의 엄마와 하루하루 조금씩 대면하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난 엄마를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뭘 하더라도 '엄마는 엄마니까'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면죄부처럼 생각하지 않았었나 되돌아보게 된다.


요양원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우리세대가 너무 쉽게 요양원을 남발하듯 떠올리는 것이 아닌가, 삶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외치는 저자에 말에 다시 한번 내 생각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름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에 잠시 몸담았을 때 요양원, 요양병원에 대해 무조건 적대시하고 부모를 버린다고 생각하는 인식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물론 현재도 이 인식은 거의 변하지는 않았다.) 


외할머니께서 뇌를 크게 다쳐 병원에 계실 때 모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걱정하는 이모와 엄마에게 '집에서 방치하거나 제대로 케어를 하지 못해 서로 악이 되는 상황이라면 요양병원에서 제대로 된 케어를 받는 것이 낫다, 죄악처럼 생각하지 마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모는 너의 엄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역정을 내셨지만, 엄마는 담담하게 병원에 일단 모시자고 결정을 했었다. 현재는 이모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있고, 외할머니의 상태도 많이 호전되셨다. 지금은 모두 잘 풀렸고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과연 진짜 어쩔 수 없던 상황이었는지,내 의견이, 생각이 너무 쉽게 요양병원을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나도 요양원을 남발하듯 떠올리는 사람이었을까 고민하게 된다. 


외할머니께서 다친 순간부터 몇 개월간 엄마의 살은 급격하게 빠지기 시작했고 외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결정한 날, 엄마는 뜬 눈으로 날을 지새웠다. 엄마는 또 얼마나 캄캄한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을까 난 이해한다고 말은 하면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똑같이 엄마한테 투닥거리고 신경질을 낼 때가 많았고, 여전히 엄마의 손길을 계속 필요로 했다.


"팝송 많이 듣지? 팝송 중에는 클럽에서 나올 것만 같은 신나는 노래인데, 정작 가사를 음미해 보면 슬픈 가사가 의외로 많은 거 알아? 그런데 주룩주룩 비오는 날에만 틀어야 할 것같은 우울한 멜로디인데, 정작 그 내용은 온통 희망으로 가득한 노래도 있거든. 치매도 마찬가지야. 너무 두려워만 하지 않아도 돼!"


치매라고 하면 덜컥 겁부터 집어먹고, 우리 엄마도 어느 날 치매에 걸리면 난 견딜 수 있을까 걱정하던 나에게 또 다른 엄마를 알아가는 기회이고,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직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이기적인 딸인 나는 저자가 주는 조언처럼 담담하게 언젠가 올지도 모를 그날을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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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 속의 무속이야기 - 상
조성제 지음 / 나루터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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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우리 생활 속, 관념 속에 녹아들어있는 무속신앙과 문화, 역사와 연계되어 풍부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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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문자 고조선 문자 1
허대동 지음 / 경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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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자체는 참신하나 언어적 유사성으로만 추리하는데 한계가 있어보인다.(간혹 억지스러워 보인다는 느낌을 받은 부분도...) 하지만 굉장히 참신한 콘텐츠임에는 틀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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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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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U-도서관을 이용하는데 재미가 들렸다. 간편하게 어플로 책을 대여하면 지하철 내 설치된 무인 대여기에서 책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간편한지! 아무튼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던 중 우연히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공부도 잘해, 사회적 지위도 높아, 거기에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글솜씨까지 갖춘 분이라 매우 부러웠다.

어렵고 현학적인 내용의 글을 쓰긴 쉬워도 술술 책장이 금방 넘어가도록 쉽게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분은 그 어려운 읽기 쉬운 글을 쓰는 분이었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더 할말이 없다. 이보다 이 책의 주제를 잘 나타낸 말은 없다.
제목부터 끌렸고 첫 문장부터 끌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구절에 와서는 완전히 감정이입까지 되고 말았다.

나는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손석희 님의 책 소개글이다. 이보다 더 내 맘을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을 것같다.

나 또한 책을 읽는 내내 나와 가치관, 성향이 너무 잘 맞아 신기해하면서 읽었으니까....

앞으로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 바로 이 책이 될 것이다.

 

22~25페이지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고민의 출발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불행할까'다.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기적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성취하여

평화적 정권교체가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릴 위험 없이 강남역, 홍대 앞에서 새벽까지 젊은이들이 술 먹고

심지어 길바닥에 쓰러져 자기도 하는 몇 안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지표로는

적어도 세계 상위 20퍼센트 또는 10퍼센트 내에 드는 장점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가 싫어서 이민 가고 싶다고들 하지만 세계지도를 놓고 정말로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열몇 곳을 빼고는 살기 좋다 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운 인류의 현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힘들어하며 미래를 불안해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걸 두려워하고, 사회에 절망한다.(생략)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중고등학교 때 지루하게 배우던 로크, 밀,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이름과 함께 나오는,
지금의 서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다는 그 개인주의 말이다.

무슨 시대착오적인 소리냐, 19세기 얘기를 21세기에 하고 있냐는 반문이 나올 것이다.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약 근원이라며 앞에 포스트 내지 후기가 붙은 길고 복잡한 대안을

얘기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은 이거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이전에 구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사회일까?

자본주의 후의 대안을 모색하기 전에 제대로 된 자본주의도 해본 적이 있나?
근대적 의미의 개인을 존중해본 경험 없이 탈근대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 아닐까?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 겨우 한 세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 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우리가 서구에서 수입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개인들을 전제로 성립되어 있다.

우리 사회 존립의 근거인 가장 근본적인 사회계약,즉 우리 헌법 질서의 근간이 그렇다. 이건 모두 유치원 때부터 배워온 지루할 정도로 상식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슬플 만큼 이 사회에
내면화되어 있지 못한 이야기다. 뭔가 오랜 역사를 가진 명품을 수입하기는 했는데, 장식용에 그치고 있다.
다들 뻔히 아는 것인데도, 누구도 새삼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내 머릿 속을 열고 구구절절 생각들을 끄집어 내서 쓰신 줄알았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문제, 남녀차별, 세대간의 갈등 등은 전 세계가 겪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는 급격하게 시대가 변했으므로 다른 나라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한 번에 해결해야한다는 문제가 있고, 또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풀어가는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앞으로 우리가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나마 숨 좀 쉬고 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같다.

 

44~46페이지
음악 고등학교 재스 오케스트라 드러머였던 젊은 감독 데이미언 셔젤은 지휘자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던
자기 실화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화에 바탕했다고는 하지만 영화는 비현실적인 지점까지 밀어붙여서 현실감이 없어지기도 한다.
감독도 언급했듯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재킷 초반부의 악마같은 교관이

극한까지 신병을 몰아붙이는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이런 극적인 과장은 의도된 것이니 영화적으로 즐기고 말아야지 '이런 교수법이 허용가능한 것인가?

'학생의 재능을 끝까지 끌어내기 위해서는 이럴 필요도 있는 것인가?'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으로

곧장 연결시키면 곤란하다고 본다. 당연히 허용 안 되지!
그렇게 몰아 붙인다고 다 경지에 오르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경지에 오르는 이도 많다.
천재,광기,극한의 노력, 악마와의 거래 등은 매력적인 서사의 소재일 뿐이다.
악마와의 거래를 언급하고 보니 이 영화에서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주는 교수 역의 J.K.시먼스가
선량하고 내성적이던 주인공을 음악적 성공에 미쳐 모든 걸 내던지도록 몰아붙이는 과정은

메피스토텔레스와 파우스트의 거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성취, 성공에의 열망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간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나는 저만큼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걸까?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한다는데...'라는 식의
자기계발 강박증으로 소비하는 것은 위험하고 유해한 감상법이라고 본다.
이 영화에 대한 감상글을 몇 가지 검색해보니 젊은 관객들이 이런식으로 영화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철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스티브 잡스가 매혹적이라 하여 그의 괴팍함과 못된 점 조차 찬양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점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 평가해야한다.

그리고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


'성공한 이들은 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착각에 빠진 대중은
벌거벗은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노예로 전략할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인구의 2퍼센트에 불과한 지배계급인 영사(영국사회주의)내부 당원들이
13퍼센트의 실무자 중간 계급을 동원하여 85퍼센트의 노동자 계급을 사육하는 동물처럼
지성적인 사고의 싹을 잘라내며 온갖 선전선동과 공포의 조작으로 통치하듯 말이다.
영화 하나 보고 너무 멀리 갔는지 모르겠으나, 자기계발 신화에 중독된 사회이기에 이런 생각이 기우만은 아닐 것같다.

 

영화 위플래쉬 관련 내용이었는데, 내가 왜 사람들의 영화 리뷰와 친구와의 대화에서 불편함을 느꼈는지,

이 글을 보고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힌 느낌을 받았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 치열하게 사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못나서 더 열심히 해야해, 난 왜 더 저렇게 극한으로 노력해본적이 없는가'하는 발상은 위험하다 생각했다.

이제 그만 좀 힘내고 싶고, 나도 내 노력만큼 보상받고 싶다.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너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합당한 대우를 못받는 것은 불공정하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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