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제목이 붙여진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되는 특이한 구조의 소설입니다. 소설 속의 두 이야기는 각기 다른 축을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시작하지만 결국 두 톱니바퀴를 감아 도는 벨트는 하나입니다. 이 소설에는 지하세계에 사는 괴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뇌 속에 또다른 의식을 심는 과학자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는 제법 벗어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소설이지만 하루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여전히 '고독'과 그 '고독의 극복'입니다. 하지만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더라도 저로서는 이 소설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상실의 시대>보다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하루끼의 매력적인 비유가 덜 돋보여서 그럴까요? 특이한 구조이긴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읽었을 때처럼 입이 허, 벌어지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앟더군요. 역시 하루끼의 스타일은 구조가 아니라 문체에서 제대로 발휘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작가 후기를 읽고서야 알았지만 하루끼는 수필을 쓰는 걸 무척 곤혹스러워 했다는군요. 지중해의 푸른 햇살처럼 항상 밝고 즐거운 이야기만 늘어놓았길래 쓰는 사람도 늘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게 힘들어 했을 줄이야. 가볍고 경쾌한 이야기를 썼지만 쓸 때는 무겁고 괴로웠다는 말에 한 편으로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론 역시 먹고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들구나 하는 동정이 일기도 합니다.
저희 집안은 할아버지때부터 내려온 기독교 집안이라 저도 어릴 때부터 성경을 끼고 살았습니다. 성경을 끼고 살았다고 해서 몇 번씩 성경을 통독했다든가 하는 대견스러운 일을 했다는 뜻은 아니고, 말 그대로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주일마다 교회를 들락거렸다는 뜻입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목사님이 손가락을 짚어가면서 읽어준 성경은 그렇지만 늘 어렵게만 느껴졌습니다. 몇 천년도 더 된 남의 나라 이야기를 일제때 번역투로 해 놓았으니 말씀 하나하나가 가슴에 콕콕 박히듯 각인되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가끔 마태복음이나 로마서의 강해를 읽기는 했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성서이야기라는 책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물론 제목 그대로 성경을 알기 쉽게 풀어놓은 책입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 각 권의 에피소드를 역사학적 관점에서 접근해 성경의 인물들이 아득한 태초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 속의 인물로 걸어나오게 해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좀더 쉽게 알고싶은 분들에게는 딱!인 책입니다. 다만 많은 에피소드를 겨우 5권에 집어넣다보니, 성경 이상의 지식을 전달해주기에는 힘이 달려보입니다. <로마인 이야기>같은 치밀하고 폭 넓은 성서이야기가 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신경숙은 글맛을 우려낼 줄 아는 작가다. 알맞게 익은 된장에, 싱싱한 야채, 질 좋은 양념이 준비되었더라 하더라도 그 맛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푹 끓이지 않으면 맛있는 찌게를 만들 수 없다. 신경숙이 끓인 소설은 후후 뜨거운 김을 걷어내면서 한 숟가락 입 안에 넣으면 그 깊은 맛이 혀끝에서 배어난다. 우리나라 작가들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다. <딸기밭>도 우리의 신변을 둘러싼 결핍을 조심스러운 터치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통해 오히려 더욱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작가는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현실에서 약간은 비켜날 수 있는 상상력의 자유로움이 안타까울 뿐이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지만 이야기들의 주제는 한결같이 '아버지'다. 60년생인 작가가 철원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이 소설 속에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그 어린 시절 속에 김소진과 아버지가 서로 등을 돌리고 서 있다. 둘의 관계는 설핏 보기에는 소통 불가. 그러나 이런 류의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 아들이 아버지를 깨달음으로써 둘의 관계는 회복된다. 김소진이 바라보는 '아버지'는 전통적인 가부장의 모습도, 가족과 살가운 정을 나누는 요즘의 아버지 모습도 아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도 야비한 짓을 서슴지 않는, 그래서 우리가 떠올리는 아버지라는 이름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소설 속의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용서해준다. 어차피 아버지도 사람이니까. 소설 속의 '아버지'는 아마도 김소진의 실제 아버지가 직,간접적으로 투영되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결국 작가가 스스로 극복해내야 할 '아버지 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설은 왠지 구닥다리 냄새가 난다. 질퍽한 시골의 모습은 그것이 생생히 묘사되면 묘사될수록 지겹다. 아, 뭐, 새로운 건 없을까? 맨날 이런 이야기만 해야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저는 최근에 하루끼의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든가 '1973년의 핀볼' 혹은 르뽀인 '언더 그라운드'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는 몰랐지만 어쩌면 그 독서들은 이 책을 읽기 위한 워밍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대학 초년 시절 하루끼 바람이 슬슬 불어올 즈음 저도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세련된 표현, 깔끔한 말솜씨라는 것 외에는 큰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사 하던 중에 책까지 잃어버렸습니다. 10년도 훨씬 넘어 다시 같은 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 공원 나무 그늘에서 맨발을 한 채로, 또 오늘 새벽에는 채 떨어지지 않는 눈을 하고 이 소설을 다시 읽었습니다. 조금전 7시가 다 되어 소설을 마지막장을 덮었습니다. 와타나베, 혹은 하루끼의 기나긴 독백이 끝났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슬픈 삶이지만 모두들 제 나름의 길을 힘차게 내딛는 소설 속의 이름들을 불러봅니다. 나가사와 선배, 레이코, 미도리, 나오코, 그리고 와타나베. 소설을 쓴다면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