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밖으로 떠나라 - 10대들을 위한 길잡이 2
레베카 그린 지음, 박영민 옮김 / 세용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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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밖으로 떠나라>

   

     ?

 

     무슨 말인가.  한참을 생각했다.  마치 재미난 성장소설의 제목인 듯, 매혹적이다.  멀리 아득히 멀리 아지랑이처럼 일렁히는 목소리. 현기가 잠시 일듯도 한 제목이다.  몹쓸 놈들이 내 목을 조여온다.  학교를 폭파시키고 종적을 감추고 싶었던 적이 어쩌면 나에게만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한데 이 책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해서 실망을 느꼈나?   아니다.   전혀 아니다.   외려 고맙다.  정말 유익한 안내서고 실용서다.  그런데도 아쉽다면 글쓴이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해서 다소 미루어 짐작하며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 정도.   하지만 읽어두면 좋은 책이다.  인간은 사회성을 지닌 '동물'이다.  무리 지어 살 수밖에 없는 동물이다.

 

     '학교 밖'은 맹수들의 포획(활극)이 대낮에 벌어지는 비정한 세상이다.   착각은 마시라.   그렇다 해서 '학교 안'이라 무풍지대는 아니다.   학교가 아이들(학생)에게 안전지대라는 생각은 무책임하다.  사람보다 더 영악하고 혐오스런 동물이 또 있을까.  사람보다 더 잔인한 미물이 또 있을까. 

 

    <학교 밖으로 떠나라>는 한마디로 사회성을 얻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씌어진 책이다.  배우는 학생이 배운 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발 아래를 주의한다.  현명한 사람은 먼 곳을 잊지 않으면서도 '지금 여기 이곳'에 전념한다.  사회 초년생이 되기 전 경험 전무한 학생이 어떻게 경험을 하나하나 쌓아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가를 <학교 밖으로 떠나라>는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실제 경험한 학생들의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책이다.

 

     !

 

     우리가, 미지의 세계를 앞두고 무력해지느냐 주어진 환경을 유용하게 이용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느냐를,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학교 밖으로 떠나라>는 가르쳐주고 있다.  책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화술)'에 대해서 주의해서 관련 도서를 찾아 읽거나, 강의를 듣는다면 이 책의 내용은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1부와 2부, 집을 떠나고, 떠나지 않고 할 수 있는 활동에 대해서 책은 기술하고 있다.  책은 결국에는 가야 할 세상, 학교 밖으로 가야할 사람에게 친절한 안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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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금기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21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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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개월 전까지만 하여도 이 청년은 모범적인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회사에 근무하였고 근무태도 또한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뭔가에 씌었는지 어느 날 청년은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다. (아는 사람/ 124쪽)

 


 

 



     금기.  아예 하지 마라고 사회적으로 규정을 해 놓은 행동규범일 것이다.  하지 마라.  하지 말라는 일을 <수많은 금기>에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고 있다.  상당히 매혹적이다.  금기는 달콤한, 욕망을 죽일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다.  

 

     소설에서 대부분은 주인공은 30대 초반은 사내거나 나이든 사내, 어린 사내다.  하나 같이 짧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평균적 삶과는 다른 일상을 살거나 살고 싶어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혹 상식을 거스르는 일을 '생각'하지만 일부만이 행동으로 옮길 따름이다.  그 일부에 내가 속하고 안 속하고는 '선택'에 따른 것이다.  혹은 '운명'일 수도 있다.  내 속에는 <수많은 금기>의 주인공들처럼 기괴한 생각들이 꿈틀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직은 일탈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역시 너무 충동적이다.  나는 용의주도와는 거리가 멀다.  오 세상에, 현실은 이렇다.

 

     호시 신이치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데 낯설지가 않다.  읽을수록 빨려들어가는 듯한,  좌변기에 물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문에 '보여주기'를 주로 사용하고 호시 신이치의 작품은 강렬하지만 소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비해 전혀 끈적대지 않는다.  오히려 경쾌한 느낌까지 든다. 

 

      <수많은 금기> 속의 주인공들, 현실과는 다소 떨어진 그들의 행동, 그들이 겪는 기괴한 일들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들이다.  물론 '해결책'(7~14쪽), '중요한 부분'(15~28쪽), '소년기' 등과 같은 단편들은 개연성이 대단하다.  언제든 그런 일이 내 주변에서, 내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상한 청년', '인계받은 일', '아는 사람', '부자관계'와 같은 소설은 망상에 가깝다고 할까.  엉뚱하다.  실제 그런 일을 언제 어디서 과연 겪을 수 있을까, 허무맹랑하다.  그렇지만 터무니없다는 것은 아니다.  호시 신이치가 구사하는 문장에는 강한 힘이 있다.  읽을수록 빠져들어 마치 내가 이야깃속의 누군인 듯, 혹은 아니라 다행인 듯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이 쓴 소설을 썩 내켜하지 않아 즐겨 읽지는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찮게 호시 신이이치의 책을 집어들었다.  <금각사>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책장에 꽂아두고 한해를 보냈는데, 멀뚱히 그 책들을 올려다본다.  일본의 민족성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동경하고 있다는 것, 양가감정은 자학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창자를 가르며 영웅을 기리는 문화로 단순히 정의내리는 내가 과연 우리것은 얼마나 알고 있냐는, 횡설수설로 혐오감를 달래어 왔다.  이것 역시 하나의 금기일 것이다.

 

     <수많은 금기>, 그 많은 단편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뜻을 단박에 꿰차기는 아무래도 지금은 어려울 듯하다.  30대 남성이 주인공으로 많이 설정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각각의 작품들이 비슷한 상황 하에서 인물들의 행동에 초점을 두고 묘사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며, 금기를 어겨가며 각 인물들이 느꼈을 불안은 또 무엇이었을지 정확히 정의하기에 나에게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수많은 금기>는 짧지만, 내가는 좀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수많은 금기>로 여태 읽지 않았던 유형의 소설을 접했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신선한 소설집이었다는 것이다.  소설이 무엇을 진실로 말하고자 했는지, 의도는 지금 딱히 한 문장으로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소설이 보여준 강렬한 인상은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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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낚시 친구
메리 퀴글리 지음, 스테판 조리쉬 그림, 최다혜 옮김 / JCR KIDS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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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아버지의 낚시친구>는 동화책이다.  동화책은 여느 책보다 소설보다 재미있고, 시보다도 울림이 크다.  그래서 나는 동화책을 좋아하고 동화책으로  삶을 배우고 사람을 이해한다는 사람들의 고백에 동감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딘 내가 유일하게 동감하는 것이 동화책에 대한 소감이다.  왜 그런가 생각해본다.  다 큰 내가 혹자는 영유아에게 읽혀야 할 책으로 단정짓는 동화책을 왜 살가워하는지를 생각한다.

 

      어느 사람은 소설을 읽어 주인공, 혹은 주변인물과의 동일시를 경험하고 시를 읽어 세상을 끌어안고 함께 앓는 화자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한다.  한데 나는 다른가 보다.  내게 동화책만한 것이 없다.  우선은 활자와 친숙하지 못한 표면적 이유가 있고 심층으로 파고든다면 또 거대한 무의식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동화는 무의식을 그대로 수용하는 듯, 나를 받아준다.  나는 활개를 치고 활보를 한다.  내가 동화를 거부감 없이 대할 수 있다는 것은 단 하나, 우선은 단 하나, 내가 규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편안함이다.  지극히 편안하다.  이런 편안함으로  <할아버지의 낚시 친구>를 읽었다.  동화책은 읽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난 것이다. 

 

     왜가리의 낚시질을 언뜻 짐작도 해보고, 할아버지의 낚시친구는 표지그림에 얍실하게 웃고 있는 손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얼핏 해보고, 낚싯대 미늘에는 어쩌면 지렁이 아닌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거룻배는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리고 또.... 

 

 




오늘 밤은 잠이 안 와요

호숫가에 있는 할아버지의 오두막집에 놀러 왔거든요.

(첫장)


 

     침대에 이불 덮고 누운 아이의 얼굴, 표정이 살아 있다. 아이의 발치에는 고양이 웅크리고 잠들 채비를 하고 있는 듯, 혹은 잠이 들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양이란 녀석이 본디 깊은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야행성 기질이 있다고도 하니 어쩌면  우리 눈을 속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음흉하지는 않지만  사람눈에는 음흉해 보이는 녀석이 고양이다. 이 고양이는 책 말미에서는 본색을 드러낸다. 사라(할아버지의 손녀)가 처음으로 잡은 물고기를 탐내는, 박제된 물고기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흔들고 있다. 

 




"할아버지, 언제 또 낚시 친구를 만나러 가실거예요?"

할아버지는 쓰고 있던 커다란 낚시 모자를 내게 씌워 주셨어요.

그리고 윙크를 하면서 말씀하셨어요.

"우리 일등 낚시꾼은 언제 또 할아버지를 보러 올 거니?"

(마지막 쪽)


     할아버지의 낚시 친구가 누구인지 지적하는 것은 읽은이의 몫이다.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친구'라는 개념을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 동화책이 말하는 바가 어쩌면 우리 좁은 시야를 넓히는 데에 있지 않을까 추측을 할 따름이다.  사라의 발치에 잠들었던 고양이, 호숫가 낚시터에서 한 발을 들고 서 있던 왜가리, 그리고 삽화가 보여주는 다양한 장면들.  언어만이 표현을 독점할 수 없고, 언어는 굳이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많은 단어들에 치여 살아 그런지 <할아버지의 낚시 친구>는 글보다 그림이, 글과 어우러진 그림이 더 많은 이야기를 걸어온다는 것을 느낀다. 

 

     고마운 책이다.  읽는 동안 내가 편해졌고, 연령의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 읽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정말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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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셔스 샌드위치 - 서른살 경제학 유병률 기자가 뉴욕에서 보내온 컬처비즈에세이
유병률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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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가 돈이다.   <딜리셔스 샌드위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소 다르게 '문화'에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딜리셔스 샌드위치>는 문화가 아니라 "뉴욕"에 접근하고 있다.  뉴욕의 "돈(경제력)"에 접근하고 있다.  경수필조의 글쓰기로 읽는이가 부담 없을 정도로 잘 씌어진 이 책은 미국의 한 도시를 오목렌즈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읽고 있노라면 돈은 피를 먹고 자기분화를, 복제를 끊임없이 해댄다는 이야기가  새삼 진리처럼 여겨진다.  문화로 포장된, 아니 문화 그 자체가 상품인 세계.  여기서 문화가 무엇인지를 먼저 규정하고 책을 읽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국어사전을 따르면 문화란 인간 삶의 전반을 일컫는다.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그렇다면 의식주 총체라고 하면, 그것도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문화를 딱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을 문화로 본다면 역시 막연하고 추상적일 것이다.  <딜리셔스 샌드위치>는 간단한다.  돈되는 것이 문화'일 수도 있다는 주장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지극히 미국 중심이고, 지극히 경제 지상주의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 

 

     <딜리셔스 샌드위치>는 왜 문화인가, 문화형 인간인가에 대한 주장은 '돈'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 책은 CEO들이 읽어야 할 경영철학을 담고 있다.  경영은 다양한, 풍부한 이윤 창출에 목적을 둔다.  해서 <딜리셔스 샌드위치>는 여느 경영서, 자기계발서보다는 읽기 쉽게 잘 씌어진 책이다.  피터지는 경쟁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나름 정리해서 보여주고, 친숙한 인물들의 사례를 부분부분 보여주기함으로써 읽는이의 몰입을 유도하고 있다.  <딜리셔스 샌드위치>는 현대 경쟁사회에서 피고용자가 지녀야 할 태도까지 제시하고 있다.  양극단적 세대에 가운데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불평불만의 세대로 인식되고는 하는 샌드위치 세대를 단숨에 고소득,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고 있다.  그것의 중심에 '문화'가 있다. 

 

      개인적으로 문화라 하면 전통문화, 혹은 중앙아시아에 남아 있는 원형 그대로의 삶을 떠올리곤 했다.  문화와 경제가 밀착될 때에 '쓰레기'가 저절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근세에 '경제'를 가벼이 여겨 국치를 겪게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원형을 포장한 문화는 상품이다.  문화가 상품이 될 때에 구입하는 우리 역시 문화적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딜리셔스 샌드위치>는 구입자 = 문화적 인간 = 경제력,이라는 단순하고 뻔한 도식을 펼치지는 않는다.  다만  비닐봉지로 포장된 문화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분석적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데에 놀라울 따름이다.  비교, 분석, 비평의 글쓰기에는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하지만 파급효과는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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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윤이형 외 지음 / 작가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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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선집을 읽으면 작가들 사진에 잠시 눈길이 멎는다.  작가라면 어떠어떠할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 양반은 생각과 달리 수수해보이고, 뜻밖에 어느 작가는 사진만으로 봐도 기괴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추측을 해보는 것이다. 여태 보지 않아 왔던 작가 사진에 관심이 가는 것은 아마도 내가 다분히 느긋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소설>은 그래서 느긋하게 읽었다. 그리고 굳이 수록된 소설 다 언급하지 않아도, 수록된 평론을 다 언급하지 않아도 요약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나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다양하다.

 

     다양하다. 정말로 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재편성하는 그들의 눈은 달라도 나와는 너무도 다르구나.  시큼하다.  생각보다 값이 비쌌던 감식초처럼, 더럽게 비싼 맛을 내는 글도 있고 허름한 식당에서 생각지 못한 후한 대접을 받고 포식한 것보다 헐한 값을 내고는 느끼는 죄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당찬 글도 있다.  

 

     소설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이야기글이다.  사람은 남녀노유 할 것 없이 이야기를 좋아하고 즐기고 탐하고, 또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고 한다.  제각기 다른 사람 기질이야 어떻든 줄거리 있는 이야기는 흥미를 끈다. 그것은 사실이다.  한데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늘상 그 이면에 있을, 글쓴이가 애초에 무엇을 위해서 글을 쓰려 했고, 활자화되어 글이 유통'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 또한 학습된 것일까.

 

     <곡도와 살고 있다>는 지독한 냄새를 안고 있다.  읽다가 몇 번이나 읽기 자체를 의심했다.  내가 왜 읽고 있는가, 굳이 읽어야 할까 의구심이 광천수처럼 콸콸 솟구쳤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내로라하는 어느 문학상을 꿰찼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내게는 그런 불신과 근거없는 비아냥으로 읽혔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렇게 기억이 될 것이다.  능력 있는 소설가가 쓴 칭찬받는 소설을 타당한 이유없이 깎아내리는 것은 무능한 독자이기 때문이라는 따끔한 훈계를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전문 해부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쓴소리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작품 해설에서는 <곡도>를 우리 시대 소설의 윤리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내가 이처럼 비아냥거리는 것은 국적불명의 문체 때문이니 내용적 측면에서는 평론가의 해부가 타당할 것이다.  문체, 기법, 내용면에서 굳이 일본 문학을 뒤따를 필요가 있느냐에 나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흉내내기는 최고의 아류로서 오래 권좌를 지킬 것이다.  <곡도>에서 나는 거북살스러운 악취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어서, 이제는 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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