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그리고 또 다른 <재즈 시대 이야기들>,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1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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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에 열광했던 적이 있다. 장편보다는 단편에서 하루키의 글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서 그의 모든 단편을 섭렵하고, 문장도 흉내낼 정도였다. 그토록 좋아했던 하루키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 피츠제럴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정말 위대한 작품이라고 하루키는 추켜세웠다. 나는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가 궁금해졌다. 그 길로 당장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작품해설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만난 피츠제럴드에 대한 인상은 '그저 그랬다'.

 

 

 

   이제 하루키의 책들은 오래된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잊혀가고 있다. 어느 권태로운 시간에 잠깐씩 꺼내 읽어보는 정도이다. '시간'은 파도처럼 휩쓸려 왔다가 또 휩쓸려 갔다. 나 역시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 여기 있다. 그리고 또 휩쓸려 흘려갈 것이다. 나는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피부가 늘어지고, 주름이 늘고, 머리는 하얗게 셀 것이다. 몸은 구부정해지고, 행동이 굼뜨게 될 것이다. 늙어가는 것이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에는 얼마나 어른이 되고 싶었던가. 조금 더 자랐을 때에는 어른 흉내를 내며 시간을 흘려 보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제 나이에 맞지 않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나는 소외감을 느꼈고, 어디엔가 있을 나에게 맞는 장소와 사람들을 찾아 헤맸다. 때때로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참 진중하고 믿음직하다가도 어떤 때에는 천방지축 철부지 같다고. 나도 그 점 인정한다. 내 안에는 나의 과거와 미래가 흐르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 이후 피츠제럴드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 버튼) 라는 매혹적인 표제에 나는 혹하고 말았다. 시간이 거꾸로 간다니. 이것은 은유일까, 상징일까. 호기심을 안고 책을 펼쳤다.『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간은 환상소설이었다. 일명 판타지. 벤자민 버튼은 노인의 모습을 한 채 태어난다. 의사들과 부모들은 기겁했다. 가족들은 벤자민 버튼을 최대한 아기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노인의 모습을 한 아기 벤자민 버튼은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며 시간을 보낸다. 모습 뿐 아니라 못짓과 말투, 생각까지도 노인의 그것이었다. 노인 아기 벤자민 버튼은 어느 날 거울을 보며 자신이 거꾸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점점 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젊어져서 마침내 노인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갓난 아기가 되고 만다. 갓난 아기가 된 벤자민 버튼은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 남게 된다. 이것이『벤자민 버튼』의 기괴한 이야기이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벤자민 버튼을 그려내면서 피츠제럴드는 한 개인이 그가 살고 있는 계층과 세대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젊은이의 미숙함과 나이 든 이의 지혜와 쇠약함의 결합, 유행의 덧없음, 그리고 역사가 부과하는 힘 등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낸다"고 옮긴이는 말하고 있다. 그에 덧붙여 나는, 제 나이에 걸맞지 않은 외모와 생각으로 소외되는 벤자민 버튼을 보면서 시대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변두리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소수의 아웃사이더들을 생각하였다.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현재 우리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피츠제럴드 단편집《재즈시대 이야기들》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1920년대 미국의 화려했던 재즈시대가 반영되어 있다. <나의 마지막 자유분방한 그녀들> <판타지> <분류되지 않은 걸작>큰 제목들에 서너 개의 단편을 실어놓고 있다. 사랑과 연애 이야기를 다룬 '나의 마지막 자유분방한 그녀들',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를 포함한 세 편의 판타지들은 색다른 재미를 더해준다. 그리고 '분류되지 않은 걸작'은 얇아져가는 책장에 대한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해 주고 있다.

 

 

 

  《재즈시대 이야기들》은 피츠제럴드 초기작품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아쉬움이 없지 않다. 번역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때때로 문장이 지나치게 길게 늘어져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판타지를 자주 접해보지 않아서인지 특히 판타지들은 내 정서에 맞지 않았다. 익살맞은 연애담을 담고 있는 '나의 마지막 자유분방한 그녀들' 역시 흡입력이 떨어졌다. 어쩌면 1920년대 재즈시대와 현재 2009년 대한민국의 시간적, 정서적 거리인가 생각도 해보았다. 전체적으로 재미있게 읽었지만, 책장을 덮은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 뿐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이 책을 펼친다면 나는 또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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