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만에 역사책 읽었다. 눈이 시원하다. 자기계발서, 심리학서를 중점으로 읽어댄 몇 달이라 '역사서'를 읽으니, 문장이 참으로 역동적이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 역시나 책 읽는 습관은 한결같다. 여기저기 띄엄띄엄 읽다가 결국은 자기중심적으로 책읽기에 돌입한다. 한국사를 먼저 탐독하고, 흥분하다가 '나의 나라'의 피해상을 또 살핀다. <숨기고 싶은 그들만의 세계사>. 다 읽고 나니 착잡하다. 마침표가 찍혀 있는 책에는 역시 그 다음 문장이 기록되기를 기다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이 웅크리고 있다.
2.
한국사를 중심으로 읽었다. 그러나 그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이미 우리도 잘 알고 있고, 이제는 무덤덤해진, 그래서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역사를 조심스럽게 훑어본다. 일본의 아시아 침탈기, 미국과의 마찰, 그리고 한국전쟁. 그 모두는 20세기의 한 시류를 반영하고 있다. 읽으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는, 그리고 다시 우리는,이라는 질문을 놓을 수 없었던 것도, 그 역사의 참담함을 지금 너무 쉽게 잊고, 망각의 늪에서 쾌락을 탐닉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지금 세계가 우울과 무기력의 한 가운데에 머물러 있고, 그렇기 때문에 도무지 행동하는 지성을 이어갈 수 없다고 비관하였다. 그 말끝에 '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무책임하게 퉁만 놓는 사람이 있는데, 그 얼굴 아무리 살펴도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국사 중심의, 20세기를 읽고는 일본 군부의 잔혹성이 너무 적게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반문하게 된다. 그리고 열강의 만행에 대해서 국정교과서에서는 너무 쉽게, 간단하게 몇 줄로 기록하고는 제 할일 다 했노라 태만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또 부질없는 개탄을 하게 된다. 살다 살면서 느끼는 것은, 학교에서의 공부는 참으로 허울좋은 개살구,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지적 충격은 엄청나다.
국정교과서와 그 교과서만을 열심히 주입하는 교사님네들의 그늘 밖에서 나는 역사를 하나씩 훑어보면서, 무엇이 정의인가, 옳은가 그른가 혼란스러워했고, 지금도 사실 혼란스럽다. 이 혼란은, 무의미로 귀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길 위해서 멍때리고 있기 때문에, 종착지에서의 내 모습은 함부로 단언하기에는 무모하다.
3.
스페인하면, 올림픽이 먼저 떠오른다. 내게는 내전이 있으리라 몰랐다. 그냥 한때 세계 곳곳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괴뢰한의 나라 아니겠나, 어림잡고 있었다. 그런데 <숨기고 싶은 그들만의 세계사>에서 묘사하고 있는 스페인, 그들의 내전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맥락이야 다르지만 최근 '그루지아'에서 발발한 전쟁, 전쟁 피해자들의 울부짖음이 찍힌 사진을 보던, 네티즌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전쟁 역시 피해자들만의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섬칫한 피해현장을 목도하면서도 늘 구경꾼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인간'인가 보다.
이 책은 한 나라로 일단락되고 다른 전쟁사를 다루는 형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스페인 내전 부분 뒤에는 미국과 스페인과의 관계, 그리고 필리핀. 여러 전쟁사가 뒤엉켜 있고, 각 국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게끔 구성되어 있다. 세계사에서 어느 사건 하나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20세기 잔혹사가 그러한 양상을 띈다는 것을 주조로 보여주고 있다.
4.
20세기, 나는 20세기말에 태어난, 개체이다. 지금은 21세기. 세기말의 뒤끝에 살아남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시공간에 놓여있다. <숨기고 싶은 그들만의 세계사>를 통해서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국지적인 사고를 확장시켜준다. 책읽고 난 지금은 '체계바라'의 죽음 묘사 부분에서 느끼던, 공포가 다시금 느껴진다. 엄청난 불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