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나는 불행해져 있었다.
(고형렬 <파산자>/ 14쪽)
2008년 <오늘의 시>는 불행을 다루고 있고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련만 나는 달리 읽는다. 아니 이 책은 시선집이기 때문에 첫 부분에 실린 시가 여느 시집마냥 큰 의미를 두고 민감하게 읽어야 할 이유는 전연 없다. 그냥 눈 가는 대로, 이 시인이 어떠한 마음을 이 시를 쓰겠구나 어림짐작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아니다. 그냥 내가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느냐,로 충분하다. 당연히 충분하다. 글을 읽어가는 마음은 넉넉한 그늘을 얻기 위함이라면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다. 삶과 문학의 우위를 두고 왈가왈부 부단한 논쟁은 아무래도 내게는 썩 소용이 없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제도권 밖의 삶은 이래서 때때로 편안하기도 하다.
고형렬님의 시 <파산자>는 물론 내가 읽은 것처럼 읽히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내 멋대로 읽고 느끼기를 즐긴다. 2008년 <오늘의 시>에서 나는 얼마나 얻었느냐, 이해했느냐보다 얼마나 여유로웠던가에 초점을 둔다. 살기 위해 죽음에 관심을 두고 삶을 풀어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죽음은 시야에서 제쳐두고 행동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일상성에 초점을 둔다. 그래야만 근거없는 절망에서 허우적대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내가 왔고, 또 어디로 가고 있으며 장기알처럼 누군가가 나를 어느 판 위에 올려놓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접었다. 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저는 거리를 걸어가다가 가위눌린 적이 있습니다.
질주하는 표범도 가위에 눌릴까요?
달리는 타조는?
우리는 전속력으로
정지했다.
(이장욱 <전속력>/ 133쪽)
<오늘의 시>는 시 끄트머리에 '시작노트'를 두고 있다. 시집 후미에 부연으로 실린 해설과는 다른 느낌이다. 해설이 시를 옭아매듯 때때로 없으니만 못한 때가 있는데 시작노트는 시인이 직접 한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시를 더 풍성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이 시를 쓸 무렵, 나는 세계에 대한 감성적 인식과 지적 인식이 하나가 되는 터전에서 이루어지는 '시적 인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 나는 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허만하 <자전>의 시작노트/ 179쪽)
어느 시인은 정말로 구체적 일상만을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느 시인은 허만하 시인처럼 일반 대중에게는 드물 만한 사고에 몰두하기도 한다는 것을 '시작노트'는 보여주고 있다. 시 <자전>을 통해서 시인이 하고자 한 말뜻을 정확히 가능하기는 어렵다. 나는 어렵다. 하지만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는 내게도 일상적 경험이 남 못지 않게 풍부하다는 것을 인식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다르게 다르게 쓰는 것이 시적 표현이라면 다르게 다르게 지극히 개인적으로 읽는 것도 시일 수 있다.
이시영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우리의 의식이 눈부신 섬광에 문득 노출되는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김경복 <포착과 응결>, 이시영 시집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해설/ 274쪽)
아마 나는 시집에 실린 시편 그 자체로는 김경복 씨와 같은 감상에 다다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그러한 감상을 바라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시>는 다양한 시인들의 시 한 편을 수록하고 말미에는 비평을 싣고 있다. 시집 비평, 해설을 읽으면서 참으로 읽는이와 전문적 분석가의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한데 누가 더 가찹게 시를 읽고 있는지, 누가 더 시를 시답게 읽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비판적 분석가의 손을 들어주기는 힘들 것 같다.
2008년에 엮인 <오늘의 시>는 현재 우리 문단에, 그것도 시인들의 활동을 개괄적으로 맛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리고 시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시인의 목소리, 비평가들의 목소리, 정연된 목소리를 짧게나마 들음으로써 '요즘'을 얼핏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문제집 모범답안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확신 서지 않는 생각을 해 본다. 시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학은 그처럼 난해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주입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