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슬머리는 내 짝꿍>은 나를 자극한다. 초등학교 4학년 나는 착한 아이였지만 지독스레 짝꿍이 싫었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짝꿍이었다. 학교 가기가 정말 싫었다. 공부 못한다고 매일 벌서기 일쑤, 선생이 참 싫었다.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주지 않고는 무조건 못한다 나무라기 일쑤, 하기야 나는 워낙에 부적응 아동이었기 때문에 선생 눈밖에 나기에 충분했다. 구구단을 초등학교 4학년 때 겨우 마쳤고, 역시나 맞춤법은 늘 엉망이었다. 괴발개발 써놓은 글은 아예 그림이라 하는 편이 더 나았다. 한수 더 떠서 짝꿍은 일년 내도록 한 녀석이었는데 녀석 귀밑에는 지우개 똥 같은 때가 일관성을 유지했다. 힘들었다. 짝꿍이 입을 열면 순간 흡, 숨을 참아야 했고 숨을 참으면서 대답을 했으니 하굣길에 머리가 지끈지끈, 당연한 노릇이다. 그 녀서ㄱ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가까워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곱슬머리 내 짝꿍>은 나를 당혹케 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줄곧 그 친구가 떠올랐다. 지독한 냄새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느꼈던 나는 당시 매우 몸을 사렸다. 그 부자연스럽던 내 행동이 눈앞에 암암하다. <곱슬머리 내 짝꿍>을 읽으면서 자식, 그래도 '박소미'는 적어도 냄새는 안 난다, 하면서 민성이 괜한 엄살이다, 퉁을 놓고는 했다. 아무래도 이건 글쓴이의 본래 의도와는 무관한 책읽기가 아니겠는가. 당혹하다. 민성이(주인공)는 겉만 번지르르한 윤지와 짝꿍이 되고 싶어 속으로 애를 태웠다. 본능이다. 이해는 한다. 한데 현실은 민성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키크기로 짝꿍을 앉히는 선생의 방식이 못마땅하다. 얼마나 무책임한 학습지도인가. 아이들의 욕구를 묵살한 선생의 교육 방식에 울화가 치민다. 그러니 민성이의 부도덕한 행동은 선생에게 책임을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선생의 무책임한 행동이 소미는 물론이거니와 민성이, 윤지에게까지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결과가 되고 말았다. 민성이는 소미에게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를 행하는 가해자로 남겨지게 하고, 또 윤지보다 소미가 마음이 더 예쁘다는 말로 윤지에게도 상처를 안기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소미는 민성이 말과 행동으로 엄청난 가슴앓이를 하게 되었고, 윤지 역시 괴롭다. 나도 매우 괴로웠다.
<곱슬머리 내 짝꿍>가 정말 좋은 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은 자유다. 하지만 말과 몸짓, 행동으로 마음이 표현되는 그 시점에 우리에게는 응당의 책임이 과중하게 지어진다. 그것이 현실이다. 가려 읽고 가려 행동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이 좋은 이야깃거리를 어떻게 읽을 것이고, 어떠한 감동, 느낌을 경험하고, 더나아가 현재 '나'에게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나는 여전히 냄새나는 짝꿍을 잊지 못한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잊히고 말았지만, 그 아이의 냄새는 지독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여전히 악몽으로만 기억되는 이유는 짝꿍에게 '니 몸에서 냄새가 난다, 나는 너무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한 내게 문제가 있었다. 당시 나는 몸으로 그 친구를 거부했을 것이고, 그 친구 역시 내가 자신을 싫어하고 애써 멀리하려 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곱슬머리 내 짝꿍>은 그 당시의 나를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고, 감정 없이 직면하기 어려운 기억을 건드리고 있다. 누군가에게 존재 자체가 거부당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