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정명
(밀리언하우스, 2007, 전2권)

바람의 화원




우리는 우리것에 무식하다. 우리것을 알자, 하면 국수주의라 폄하한다. 여전히 사대주의적 감성과 논조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에 대해서는 21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그 이전 우리의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분들은 선구자였다. 얼마나 많은 지성인의 숱한 노력이 있었는지, 우리는 그분들께 감사해야 한다.


'바람의 화원'은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처음 이 책을 펼쳐들었을 때에는 한국의 예인들에 대해서 알겠구나, 막연히 그렇게 짐작했다. 그러나 예인들 역시 사회의 풍조, 정치에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한시대를 풍미한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을 중심으로 "바람의 화원"은 형상화되고 있다. 그들의 작품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풍요로운 소설 한 편이 탄생되었다. 게다가 정조, 김조년, 윤복의 형 영복, 악기 정향 등의 주변인물들은 조연에 머물고 있지 않다. 각각의 인물들이 구심점을 잃지 않고 제 삶을 드러내고 있다. 이정명 작가의 다원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 "바람의 화원"은 재미있으며 읽기에 유익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바람의 화원"은 무엇보다 예인들의 위치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수많은 화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름보다 그림으로 남고 말았다. 조선조의 관행과 악습에 눌려서 무참히 짓밟혔을 그들의 세계가 안타깝다. 그리고 그 틀을 깨기 위해서 "신윤복"이 "바람의 화원"에서 행하는 기이한(?) 행동들은 차라리 무모한 모습으로까지 비친다. '김홍도'에게서 비친 '신윤복'은 과거의 자신이었다. 제도권 도화서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김홍도'는 다시금 "창작열"에 몸을 정갈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가 신윤복에게 갖는 마음은 일면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그 무엇이다.   
 

우리가 자주 만나온 작품들을 "바람의 화원"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상상력에 힘입어 모든 작품은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판 34점이 있기 때문에 "바람의 화원"은 여느 작품보다 흡입력이 크다. 그리고 단순히 그림과 당시대의 상황을 연관시킨 것뿐 아니라 "바람의 화원"은 화공들의 고민했을 세세한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영복이 동생 윤복을 위해서 색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훌륭한 예술가는 혼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천부의 재능이 만개하게 되리라는 것을 "바람의 화원"에서는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바람의 화원".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곧 무엇인가를 찾아간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바람의 화원"에서는 그와 같은 열망과 갈구가 담겨 있다. '무엇'을 위해서 그들이 자신의 삶을 불태웠을까는 읽는이의 재해석에 달려 있다. 그것이 독자들의 권리이다. 나는 그들이 후한 대접을 받고자 그러한 열정을 보인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단지 하나, 사람 대접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그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21세기 단원과 혜원, 그들에게 최소한의 자유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여전히 고달픈 예인들의 삶에 그 최소한의 자유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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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면모도 갖추고 있습니다. 정향과 윤복의 애정선도 괜찮고요. ^^ 소설 서평은 이래서 힘듭니다. 줄거리를 다 담아내면 좋겠는데, 그래서 책읽으면서 서평은 줄거리 요약해야지... 도화서에 들어가기까지 윤복에게 있었던 일, 정조와 관련된 두 화공들이 이야기들... 정향과의 서사구조. 그리고 김조년의 인물적 중요성 등... 생각했지만 막상 서평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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