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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 - 개정판 ㅣ 나남창작선 58
박경리 / 나남출판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
(나남, 2006, 총 550쪽)
파시
파시. 풍어기에 열리는 시장이라는 뜻의 '파시'. 1968년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의 장편소설이다.
시간적 배경은 이북에서 피란 온 수옥이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나와 부산에서 머물다가 통영, 조만섭 씨의 집으로 가는 시점. 즉 휴전협정이 있기 얼마 전의 여름, 그러니까 휴전협정이 1953년 7월이니 1952년 여름부터 시작된다. 당시 한국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중부지방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지속되고 그외의 지역에서는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는 때이다. 소설 <파시>는 피란 온 수옥이 부산에서 강간을 당하고 통영으로 가게 되는 때부터 시작된다.
박경리 선생의 작품은 읽기가 쉽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일상적인 언어로 서술되는 소설에서 왜 이해가 어려울까. 그 이유는 정확한 시점을 언급하지 않고 독자가 찾아 읽기를 바라는 서술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시> 역시 그러한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쟁중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의 폐허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파시> 읽으면서 계속 궁금해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 전반에 전쟁의 잔혹함이 담겨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에 인간의 잔인성으로 다시금 전율을 하게 된다.
1.
수옥은 전쟁에 쫓겨서 남한으로 피란을 오게 된다. 그는 순수하다. 그는 악에 대처할 힘이 없이 이리저리 치이게 되고 조만섭 씨의 후처 서울댁의 사욕에 다시금 희생당한다. 전쟁 속 '여성', 당시 후방인 통영에서 다시금 '여성'에게 인권을 유린당하게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볼일이다. 전쟁으로 가족과 생일별을 한 수옥은 오히려 부산(영자네)에서, 통영(서울댁, 서영래)에서 더 큰 수모를 받게 된다.
서울댁의 남동생 '문성재'가 봉화에서 얻은 여자 '선애'는 수옥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수옥'이 현실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내몰려 있다면 '선애'는 자의로 대처하고 있다. 장교로 군복무하면서 성재는 '선애'와 결혼한다. 하지만 성재의 누이들은 물론 성재 역시 그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재는 수시로 다른 여자(학자)를 탐하고 밀무역으로 횡령한 돈을 탕진한다. 그런 성재를 선애는 주인(남편)으로 생각하며 그가 가는 곳을 찾아다닌다. 억척스럽기까지 한 모습을 보이는 '선애'가 '수옥'과 마찬가지로 안쓰러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2.
<파시>에서는 표면적으로 '명화'와 '응주'의 결혼 문제가 서사의 큰 중심을 이루고 있다. 조만섭 씨는 딸 '명화'가 '응주'와 결혼해서 가정을 잘 꾸리기를 내심 바라고 있지만 응주의 아버지 '박의사'의 반대는 만만찮다. 그러나 박의사의 반대보다 더 큰 걸림돌은 '명화'의 결벽증이다. 친모의 죽음이 '명화'에게는 족쇄로 남아 응주와의 결혼을 단행할 수가 없다. 이러한 '명화'의 행동이 <파시>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당시 역사적 관점에서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파악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명화가 왜 도일을 감행하는지에 대해서도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명화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박의사(응주의 친부)가 결혼을 반대하고, 죽희와의 만남이 이어지는 것에 '응주'는 궁지에 몰리는 듯 난감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응주가 당시대 남성보다 여성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다. 죽희를 대하는 행동, 술을 마시고 명화의 집에 찾아간 일 등 응주는 당시대 지식인이지만, 일반적 보편적인 남성상을 드러내고 있다. 응주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명화와의 결혼을 바라면서도 일면 박의사가 종용하는 죽희와의 결혼을 생각하기도 한다.
3.
'응주'로 대변되는 남성상, 조만섭 씨, 박의사, 문성재, 서영래 등 <파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정상적이지 못하다. '명화'의 아버지로서, 정신병으로 죽은 아내를 두었던 조만섭씨는 박의사에게 비굴할 수밖에 없다. 박의사는 비정상적인 연애를 꿈꾸고 있다. 문성재는 많은 여성들을 희롱한다. 서영래는 자식을 얻기 위해서 젊은 처자를 능욕하는 비행을 저지른다. 그렇기 때문에 '학수'의 존재는 새롭고 <파시>에서는 희망적인 인물이다.
'학수'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운이 기울어버린 집안의 장남이다. 그는 여동생 '학자'의 비행을 막고자 하지만 가세가 몰락한 집안, 귀한 딸로 자란 '학자'는 현실을 수긍하지 못하고 울분과 열등감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집에서 내놓은 자식으로, 통영에서는 손가락질, 부산에서는 술집 여급으로 일을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한 동생과는 달리 '학수'는 '수옥'을 만나 울화를 다스리게 된다. 그리고 징집된다. '수옥'이 아이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희망이다. 물론 서영래의 간악한 손아귀에서 '수옥'이 무사히 출산을 할지, 근심스럽다. 그러나 <파시>에서는 불안한 희망으로 여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