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
베빈 알렉산더 지음, 함규진 옮김 / 홍익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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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복을 꿈꾸는 히틀러, 그에게는 세계를 다스리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았다. 큰 꿈에 비해 의심하는 성격이 승자가 되는 길을 막았다. 1000일 간의 기록에서 말해주듯이 중심이 없는 생각, 부하들을 의심, 전선 관리 능력까지.... 이성적인 판단을 상실하고 감정에 의한 결정에 히틀러를 승자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단지 실패를 되풀이한 졸장에 불과하다.

패배에 어떤 후유증을 입었는지 궁금하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은 대나무가 갈라지듯 한번에 갈라지고 있었다. 나폴레옹과 비교되는 것도 이 점이다. 히틀러는 패배를 절망의 시작으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많은 영토의 확보로 세계의 중심을 꿈꿨지만 사방에서 밀려오는 적을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다.

이길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히틀러, 결국에는 부하들까지 의심을 하며 닥치는대로 걸리면 죽는다 식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오히려 이런 의심은 히틀러 암살계획까지 실행했다.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부하들은 점점 히틀러에서 멀어졌다. 고립을 자초한 히틀러는 자살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전선 관리까지 허술했다. 일임을 하는 건지, 직접 통제를 하려는 건지 작전지휘체계의 혼란으로 패장이 되었다. 전선만 확대했지 어느 하나 책임을 지려는 자가 없다.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선만이 최악의 사태로 몰고 가지 않았을 뿐이다. 빠른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장군들이 점점 등을 돌리고 있는데 그 많은 영토를 관리하는 것은 예상된 결과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2%가 부족했다. 큰 꿈에 비해 치졸한 행동으로 다 잡을 수 있었던 것을 손에서 놔버렸다. 왜 그리 의심이 많은지 높은 위치에 비해 신임을 주지 못했다. 대중을 사로잡았던 능력은 타고났지만 잠재되어 있는 의심병은 살아남은 자들의 짐으로 변해버렸다. 믿었던 사람이 허무한 결과를 만들어 낸거에 반성이 없었던 것에 큰 실망을 했다.

패전국으로서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져 45년간의 분단은 통일된지 100년도 안된 상황에서 회복될 수 있는 기간만 늘여준 꼴이었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자랑스러운 군인이 아닌 독일 통합에 역류를 흐르게 하는 반역자로 인식할 것이다. 통일이 되어도 통합을 이루기에는 아직도 멀어보이는 독일, 그 속에는 분단과 통일로 되풀이 되는 역사가 있었고, 최악의 위기를 만든 것이 바로 히틀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히틀러의 못난 행동은 독재자라는 꼬리표를 떼기에는 불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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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덫 세미나리움 총서 1
한스 피터 마르틴 외 지음, 강수돌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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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읽어본 바로는 개인(노동조합 포함), 기업, 정부가 서로의 변화 속도가 다른 것에 오는 문제점이라고 생각했다. 다분히 독일 중심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세계화는 큰 위험을 좌초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실제로 그런 일이 전 세계에서 감지된다.

구미 중심의 내용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적용이 된다. 가까운 예로 한미FTA가 그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급격한 정부의 한미FTA 체결에는 기업과 개인은 제외되었다. 기업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가고 있지만 개인들은 연일 반대하는 시위에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이유는 뻔하다. 정부와 기업, 개인의 사전에 충분한 논의가 부족함이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면서 정부와 기업은 한미FTA를 자랑스럽게 환영을 하고 있지만 개인들은 아직 미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 것은 개인들이 변화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있다. 한미FTA 체결에 있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정부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내놓아도 개인들은 정부 방침에 따르지 않고 조직적인 시위로 대응하고 있다.

경쟁을 통해 FTA를 막을 힘은 개인에게는 부족했다. 정부와 기업은 변화하지만 개인들은 성장속도가 급격히 느려진다.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둘 도산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정부의 역할은 이런 느린 변화속도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에 답이 있다. 세대교체를 통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과거 30~40년전부터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개인, 정부, 기업의 삼박자가 잘 맞았기에 성장했다. 정부가 변화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개인의 참여유도를 해야만이 불균형한 상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개인이 참여하면 기업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고, 다시 위기에서 벗어나 통합이 되어 성장동력을 얻을 수 있다.

변화속도와 연관지어 복지는 축소했으면 한다. 복지국가에서 자살율이 높은 이유로 개인이 변화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일종의 게으름에 의해 발생했을 수도 있다. 사회보장이라는 말에 편안함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산층 몰락과 빈곤층 증가, 그리고 상류층과의 양분... 거리감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정부가 부채질하는 것 같다.

복지를 늘이면 정부가 부담해야할 비용이 더 늘어나며, 개인들의 태만함은 고칠 방법이 없다. 역시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정부가 변화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개인들도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급격한 사회변화는 혼란을 야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세계화는 유럽중심의 세계화일 뿐이다. 유럽만 벗어나면 동참할 곳과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런 변화에서 살아남는 자는 다행이지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느 누가 구제할 방법이 없다. 너무 앞서 가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해서 따라가지 않으면 손해볼 것 같고... 조절할 열쇠는 세계화를 이끄는 주체가 된다. 변화속도는 느렸으면 한다. 충분한 검토를 통해 따라갈 시간이라도 마련해야 따라갈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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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원리
차동엽 지음, 김복태 그림 / 동이(위즈앤비즈)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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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든지 일어날 수는 있다. 그 것은 노력의 결과가 좋았기에 발생한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은 금물이다. 앞을 내다보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면 최종목적지에는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에 휩싸여 울부짓는다.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 책일지라도 차동엽 신부의 겪었던 일을 중심으로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삶을 즐겁게 살라고 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미움을 받고, 고통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즐겁게 멋지게 재미있게 살았으면 인생의 목표는 더 필요가 없다. 단지 인생에서 그 것을 발견하지 못해 고통받는 삶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 삶이 고통스러웠다면 그 생각을 즐거움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세간의 말이 이해가 간다. 타고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면 결국 즐거움 달인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도 메달이 목적이 아니라 완주에 목적을 두고 있다. 중도 포기한 사람은 완주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한다. 동정이 간다만 인파의 환영은 받기 어렵다. 위기에서도 항상 웃을 수 있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대단한 사람이라는 지혜가 생긴다. 꿈이 있기에 목표가 있기에 항상 상상하며 희망의 열매를 기다린다. 꿈을 위해 도전하는 사람들,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기억하면 기억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명의 '유쾌 상쾌 통쾌'를 들으면 항상 기분이 좋다. 삶은 이렇게 산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유쾌 상쾌 통쾌 밝은 날이 많았으면 나는 나는 좋겠네. 우리 모든 가슴 속에 기쁨 희망 사랑 좋은 일들이 많았으면 나는 나는 좋겠네. 이왕에 사는 거 웃으며 사는게 좋지, 어차피 사는 거 즐겁게 사는게 좋지. 그까짓것 걱정, 그까짓것 고민 다 그냥 던저버리고, 크게 한번 웃어보는 거야. 유쾌하게 살자. 상쾌하게 살자. 통쾌하게 살자구. 가슴쫙 펴고 사는거야. 이 얼마나 좋은 가사 인가?

차라리 짜증 나는 거 확 잊어버렸으면 한다. 그 때는 화가 났지만 나중에는 기분 좋게... 살다보면 이런 일이 나는것은 흔하기에 한번 보고 완전히 잊으면 된다. 그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일 뿐 전체는 아닐 것이다. 그냥 웃다가 치워라. 좋은 일만 기억하면 하는 일마다 잘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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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
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박원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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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광기는 롬멜의 희생을 요구했다. 히틀러의 생각 속에는 오직 승리뿐, 승리하지 못한자.. 그 날로 지휘권 박탈이다. 롬멜에 대한 지원의 부족은 겉으로는 지휘관으로 인정해도 히틀러의 마음 속에는 롬멜의 자리는 없었다.

되도록이면 사람들을 많이 죽여라. 그리고 이기지 못하면 죽어라. 히틀러만의 유아독존은 조국도 없고, 생명도 없고, 오로지 승리와 살생... 후퇴는 없다. 롬멜은 명령을 무시하고 회군하여 병사들을 살렸다. 정녕 롬멜과 히틀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인가?

소련 침공 실패, 이탈리아 항복, 노르망디 패퇴... 점점 히틀러의 입지는 줄어들고 있다. 히틀러의 최측근을 제외하곤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을 원했다. 여기에 롬멜을 얼굴마담으로 등장시켜 롬멜 암살에 관여한자로 결의했다. 아무 죄도 없고, 원한도 없는 롬멜은 이토록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롬멜은 나치즘하에서 군인 신분을 벗어나서면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전장에서 훌륭한 지휘관이며 가정을 꾸린 사람이다. 권력은 더욱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주변인들이 히틀러와 롬멜 간의 관계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을 악용했던 것이다.

히틀러의 암살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점점 히틀러의 광기는 정점에 치닫았고, 승리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장군들은 더 이상의 광기를 막을 필요성을 느꼈다. 히틀러 암살 계획은 실행이 되지만 실패하고 만다.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감행한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롬멜은 히틀러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했다.

롬멜을 제외한 제장들은 롬멜의 결정만을 기다렸다. 비록 간접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전운은 기울었고, 살아남은 독일의 군인들은 이미 히틀러보다 먼저 죽음을 예고했다. 롬멜은 히틀러 암살실패의 책임을 지고 자살을 택했다. 독일의 항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독일의 항복은 히틀러의 자살로 일본을 제외한 이탈리아와 독일의 전선을 일단락 되었다.

나치즘의 영악한 인종우월주의로 수많은 유태인들이 죽어나가고, 전장에서 아까운 독일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롬멜은 항명을 통해서라도 인명의 살상은 막길 원했고, 북아프리카의 위기에서 탈출했다. 히틀러의 광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혼자만의 사는 길을 택했다가 독일이 2차대전에서의 패전국의 멍에를 뒤집어 썼다. 히틀러와 롬멜, 상하관계를 떠나서 독일의 충성스런 군인으로서의 서로 다른 입장은 이미 히틀러의 암살 계획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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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쇼펜하우어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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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홍준표만 머리 속에 맴돈다. 억지 주장에 몰아부치기, 뻔뻔함... 100분토론에서 본 홍준표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토론에서 항상 주목을 받는다. 왜 일까???

아에 상대방이 말하는 자체를 끊어버리는 게 홍준표식 토론방법이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나? 홍준표 혼자만 잘 났다고 하지 않나? 사람들은 그를 미워해도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밀리기 보다는 독설을 퍼부어서라도 이기고 싶은 심정이다.

토론은 의외로 간단하게 이길 수 있다. 방청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입력만 시키면 장땡이다. 아무리 논리가 정연하고, 정당하더라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지 못하면 이미 토론에서 졌다. 100분 토론에서 홍준표의 독설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싶어하기 보다는 밀리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밀리면 게임 끝이기 때문이다.

논리는 앞뒤가 안맞아도 좋다. 큰소리 뻥뻥 지르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면 그 자체가 토론 절반의 승리다. 어떻하든지 사람들의 눈에 띄여 토론장에 다시 나타난다고 하면 토론에서의 승리 보증 수표다. 토론이 왜 필요한가? 상대방을 설득시키는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 방청객을 넘어서 일반시민들에게 알리는 거다.

토론 스타들은 따로 만들어 지는게 아니다. 밀리지 않으면 된다. 몰아부쳐서 상대방이 쥐구멍을 찾을 때까지 아무 말도 못하게 하면 토론 스타 탄생을 알린다. '이야 저렇게 말을 잘해서 토론에서 이기는 사람도 있네'라고 말이다. 다른 거 필요없다. 상대방 말만 짜르면 확실하게 필받는 거다. 그래야 토론의 참맛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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