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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시간 속으로 ㅣ 루브르 만화 컬렉션 3
에릭 리베르주 지음, 정연복 옮김 / 열화당 / 2009년 5월
평점 :
에릭 리베르주 저/정연복 저 | 열화당 | 72쪽 | 2009년 05월 02일 | 정가 : 18,000원
마르크-앙투안 마티외의 [어느 박물관의 지하]을 시작으로 [루브르의 하늘]에 이어 [빙하시대]를 읽고 내친 김에 다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읽게 된 이 책은 아름다웠다.
누구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현실의 발을 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주인공 바스티앵은 현실에 발을 디딜 성격도 외모도 타고나지 못했고 더불어 청각장애인이었다. 여자친구가 어렵게 얻어 준 미술관 견습생 자리에 들어가려고 박물관에서 샌드위치를 먹던 바스티앵은 경비원이 박물관 안에서 음식물을 먹으면 안된다고 말하자, 고집을 피우며 마저 먹으려든다. 귀의 소통만이 문제가 아닌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들지 않는 소통불능의 모습을 보여주며, 도망친다. 그리고, 그 도망친 곳에서 비밀의 야간경비원 퓌지아를 만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바스티엥을 보자마자 한눈에 이해하는 듯 행동하는 퓌지애는 그를 자신의 후임으로 지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 미술품의 외관을 관리하고 손상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을 넘어선 예술작품들의 영혼을 관리하는 일을 미지의 시간을 열어 바스티엥에게 보여준다.
나도 가보고 싶은 루브르.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예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이해하려하는지는 알 수 없다. 겉 모습을 살피고 우스깡스러운 행동을 하고 작품을 만져서 손상시키며, 터트리지 말라는 플레쉬를 터트리며 끊임없이 괴롭힌다. 생각해보면 작품들도 영혼을 쉴 시간이 필요할 듯도 하다. 누군가 바라보는데 숨죽이고 있는 예술작품과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소외된 바스티앵의 만남은 극적이었고, 그렇게 극적인지라 바스띠앵은 예술 작품들에게 자유까지 선사하는 엄청난(!) 일까지 저지른다.
들을 수 없는 자가 치는 북소리에, 들을 수 없다고 판단되는 예술작품들이 깨어나고 의사소통하고 영혼을 교감한다. 퓌지애는 바스티앵에게 자신의 임무를 전하고 죽는다. 전임자의 기록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느 박물관의 지하]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듯 했다.
소통의 문제는 참으로 힘들다. 이 만화에서도 힘들고 내가 발 디딘 이 땅에서도 힘들고, 가족 간에서 직장 사람들 사이에도 요즘은 힘들다. 다들 모두 조금씩 화 나 있는 상태이기에 더욱 힘들다. 그런데, 사람도 아닌 예술품과 소통하려 들고 그 소통을 넘어서 함께 하고 자유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이 소통불능과 고집장이인 바스티앵 안에 있다는 설정은 하다보니 묘하게 재밌었다.
책은 양장에 얇고 크다. 나는 들고다니면서 읽을만 했지만, 들고다니면서 읽으라고 권하긴 힘들다. 그림체는 청각장애인의 수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만큼 사실적이고 멋졌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