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 시작과 끝을 잇는 700리 걷기여행
이혜영 지음 / 우공이산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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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부분의 여성작가가 쓴 여행기를 싫어한다. 물론 그 속에서 보석같은 글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확률이 낮다.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패션화보 같거나, 끊임없는 자랑질이거나, 사연 없는 사람 없건만 개인사에 빠져들어 자신만의 감정을 써 낸 책들을 읽어주고 공감할 수 있는 감성도, 그걸 참아낼 인내심도 나에게는 없다. 최근에 읽은 [나의 아름다운 성당 기행] 때문에라도 이 책은 내가 피하고 싶은 그런 책이었겠지만, 오랜 친구의 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추천받고, 빌려주는 과정이 있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읽다가 줄이라도 쳐야겠다 싶어서 구입도 했다.

 

시작부터 사람을 끌어들이는 문장들이 이어졌다. 문장이 화려하거나 이쁘지도-난 꼭 '이쁘다'로 쓰고 싶음- 않은데 무슨 일일까 싶었다. 다섯개의 시, 군과 117개의 마을을 잇는 274km. 저자가 잠깐 산에 올라갔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으니 그거보다는 좀 더 걸었겠지만, 그 길을 걸어가며 그 길의 풍경 만이  아니라  동행자의 생각, 자신의 이야기, 길에 남겨진 역사의 한 자락, 친절과 욕심을 오락가락 하는 그 길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의 이야기, 자신의 눈에 비친 전과 달라진 길 이야기까지 촘촘하게 엮어져 있다.

1부의 '둘레길 걸어보기'는 저자가 걸으면서 숨차게 지나가지 않았기에 여유롭게 읽혔고, 그 사이사이에 이야기들은 길벗이 해주는 이야기 같아서 좋았다. 그리고 '둘레길 톺아보기'는 언젠가 나도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을 때 이렇게 써봐야지 싶게 매력적이었다. 1부와 2부 사이의 '사진으로 보는 둘레길'도 사진 뿐만 아니라 짧은 문장을 곁들여 아주 맛깔났다. 무엇보다도 지리산이라는 공간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저자에게 시선을 맞출 수 있어서 더 잘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책 상태는,

일단 책을 받으면 두께에 놀란다. 지리산 둘레길 사전을 만들었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두툼한 책은 800g이 넘어 한손에 들고 읽기에는 부담이 있으나, 출퇴근 시간에 한손으로 들고 읽었다. 적당한 글과 적당한 그림, 더불어 참고 문헌이 이쁜-난 꼭 '이쁘다'로 쓰고 싶다니까- 책이다. 책을 다 읽고 참고 문헌을 펼치고 보니 저자가 그냥 길만 걸어서 이런 멋진 글이 나온 것이 아니구나 생각이 되고, 이 참고 문헌을 따라 읽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덧붙여, 이 책을 사면 멋진 부록이 따라온다.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지리산 둘레길_절대 가이드북'이다. 절대반지만큼 '마이프레셔스'가 될만한 부록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종류의 부록을 받게 되면 책장 어딘지 모르게 사라져도 전혀 아쉽지 않은데, 이 부록은 아주 단단하게 생겼고 내용도 탄탄해 보인다.

내가 갖고 있는 몇몇의 여행책자의 부록들은 일직선으로 된 도표-길이 어떻게 직선이냐!-에 대충 거리를 표시 하거나 너무나 두루뭉술하게 서술하고도 풍경을 보여주지도 않아 그거 하나 들고갔다가 낭패볼 듯 싶어 엄두가 안나는데, 이 부록은 그럴 일이 없어보인다. 물론 길과 그림은 다르니 이 부록 하나만 들고 지리산 둘레길에 도전해 본 후, 그때 평가를 해도 늦지 않을 듯 하다.

 

지리산 둘레길을 가든 안가든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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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개정신판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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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를 김혈조 선생의 번역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어렸을 때 공부를 좀 해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뭐하고 있었나 싶게, 그 책은 재미가 있으면서도 읽는 중간 모르는 것들이 산처럼 나타나 턱턱 앞을 막아 답답했다. 열하일기 1권까지는 연암선생께서 열하까지 가는 과정이기에 보고 들은 것을 풀어내는 이야기여서 어려워도 조금만 넘어서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내용이었으나, 2권은 연암선생께서 열하에서 겪고 본 것들에 대한 생각이 서술되어 있고 현지의 지식인들과 다양한 주제로 교류까지 하고 계시는 상황인지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나는 연암선생도, 연암선생이 살았던 그 시대의 조선도, 그리고 중국의 역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호기심만 많은 무식쟁이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씁쓸하게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러니 열하일기를 통으로 한번에 보고 싶지만, 욕심을 버리고 조금 아쉬워도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른 책이 이 책으로 열하일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니 지인이 추천해준 책이다. 고미숙 선생의 책이 처음은 아니지만, 열하일기의 해설판 또는 뭔가 살이 붙은 이야기가 어떨지 몰라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조금 읽고 바로 구입했다.

연암은 서재에 앉아 머리로 사유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길이 곧 글이었고, 삶이 곧 여행이었다. 연암이 지나갈 때마다 중원 천지에서 침묵하던 단어들이, 문장들이, 그리고 이야기들이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암은 그것들을 무심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절단, 절취'했다._6쪽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감동이었다. 그렇지! 우리 연암 선생님이 그런 분이시지! 저자는 책머리에 천재의 '싸늘함'을 언급하며, 그래서 천재가 싫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도 천재 싫다. 그 싸늘함 때문에. 그러나 연암선생은 천재임에도 거부감은 커녕 나와의 나이차이 238살을 극복하는 유머감각에 날마다 책을 읽으면서 깔깔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자는 연암선생이 매력적인 이유가 선생께서 갖고 계신 유머감각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연암선생의 천재성과 더불어 선생이 갖고 계신 유머에 집중한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딱 그랬다.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저자는 바로 연암선생의 열하 여행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연암 선생께 먼저 초점을 맞춘다. 연암 선생은 어떤 사람이고 그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지,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열하일기 이외에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인지 이야기 한다. 주류이면서도 우울증. 좀더 살펴 보고 싶은 문제였다. 그리고, 왜 열하일기가 그 조선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는지의 답을 풀어주는 1792년에 있었던 '문체반정'에 대해 언급한다.

정조가 반정(反正), 곧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 할 때의 정(正)의 의미는 간단하다. 우주와 역사에 대한 깊고도 원대한 사유, 중후한 격식을 갖춘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경학의 고문(古文)이 바로 그 완벽한 모델이다. 소품의 경박한 스타일 때문에, 소설은 활다무계한 허구성 때문에, 고증학은 쪼잔한 시야 때문에 고문의 전범들을 와해시킬 우려가 있다._123쪽 

이런 상황이니 소품과 소설의 느낌까지 포함한 열하 일기는 그 뜻에 반하는 글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 언급되는 정조와 홍국영이 드라마 '이산'에서 보았던 이미지와 상반되어 약간 혼란스럽기도 했고, 내가 몰라도 너무 몰라 보여주면 보여주는대로 다 받아들이는구나 싶어서, 어떤 것이든 판단 할 수 있는 지식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시대를 함께 살았던 다산 선생과 비교하는 375쪽 부터의 이야기는 꽤나 흥미진진했다. 객관적인 문장으로 두 분을 묶어 표현하면 별다를 바 없다지만, 살짝만 들여다 보아도 완전하게 다른 두 선생의 이야기는 당시 두 분의 상황에 대한 설명과 함께 비교하여 풀어놓은 글이 좋았다. '문체반정'에 대한 전혀 다른 반응도 흥미롭고, 정조와 홍국영 '문제반정'에 대해서도 꽤나 궁금해져버렸다.

책 중반에 열하일기를 언급하는 부분들은 열하일기로 다시 돌아가 언급할 일이 많아질 듯 하여 이 리뷰에는 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로 저자가 2003년 열하일기의 길을 간 이야기가 펼쳐지나, 저자의 여행기는 별다른 재미가 없었다.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약간 멍한 감이 없지 않다. 어찌 다 알겠나 싶기도 하지만 어찌 모르는게 이리도 많을까 하는 답답함 때문인데 하나하나 풀어가면 될 일이다 싶다.

 

책 상태는 아주 좋다. 부록으로 열하일기의 원목차와 여정도,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은 아주 유익했고,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 용어에 대한 해설이 붙어있는 점도 몹시 마음에 들지만 안들기도 한다. 들뢰즈/가타리라는 처음 만나는 철학자의 사상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서 열하일기를 본 저자의 책임에도 나는 그 철학자들을 알지 못하고 그 철학자들이 개념화하여 만들어 놓은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글이 처음부터 편하지는 않았다. 물론, 책을 다 읽을 즈음에는 호기심이 동하여 그 어렵다는 책도 언젠가는 한번 시도해 봐지라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덧붙여, 책 설명이 붙어 있는 추천도서가 함께하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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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쫄깃 - 메가쑈킹과 쫄깃패밀리의 숭구리당당 제주 정착기
메가쇼킹.쫄깃패밀리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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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매혹되어 제주로의 이주를 꿈꿨던 적이 있다. 물론, 직장 상황을 고려하여 부모님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참이었다. 일이 꼬여 손해만 보고 물러서야 했기도 했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크게 남았다. 살 터를 마련 할 일이라면 살만하게 마련할 일이지 일을 크게 벌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남의 손을 빌리면 안된다는 것이라는 교훈만 얻었고 자신감을 줄어들어 뭔가 추진할 힘을 잃었다. 물론, 그 후에 엄마의 몸에서 자연치유가 될 수 없을만큼 큰 암세포가 발견되어, 일이 잘 되었으면 엄마를 잃을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사연에도 불구하고 제주가 좋고 그래서 그 일을 겪은 후에도 틈만나면 제주에 들락거렸다.

 

나는 제주 공기만 마셔도 뭔가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저자는 홍대에서 시작해서 그 꿈을 제주로 넓혀 그 곳에 터를 만들었다. 혼자서도 아니고 모르는 여러사람의 힘을 빌려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피고 돌보며 지금의 공간을 만들어갔고 그 과정이 너무 멋졌다. 한없이 게을러 보이는 저자가 아침마다 일어나 끓이는 스프 맛을 보고 싶어서라도 당장 제주도로 떠나고 싶어졌다. 저자가 제주로 내려가 있긴 했었는지 잘 확인은 안되는 욕심을 덜어내고 아이디어를 모아서 듣고, 힘을 보테고, 나누면서 만들어진 쫄.깃.센.터. 를 왜 진즉에 몰랐을까 싶어 속상하다. 지어지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죽을 지경이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저자의 만화를 아주 즐겨보지는 않았으나, 그 만화의 독특함과 발랄함에 매력을 느꼈던지라 책은 잘도 읽혔고, 누군가의 힘을 모아 어떤 일을 도모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잘 알기에 그 곳의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기도 하였다. 뭐든 제주의 날 것과 함게 제주 막걸리 한사발 들이키고 싶은 마음에 책을 덮었다. 이 책을 한 없이 밀리는 버스 안에서 읽었으나, 짜증이 날만한 상황에 짜증을 날리는 묘한 맛이 있어서 좋았고, 탈 때 읽기 시작한 책을 내릴 때 다 읽을만큼 무게감이 없어서 좋았다.

 

책은 구성이 좋다. 사진과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든다. 유명 만화가에서 멈추지 않고, 삶의 바닥(!)에서 제주에 내려갈 결심을 하고 내려가서 실행하는 과정까지 조금은 어이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제주에 대해 말랑말랑하면서 뿌연 사진을 담아 절대로 매력이라고는 없는 제주 관련 에세이를 보고 실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신선하고 좋았다. 그리고 마음대로 꺼내먹고 마음대로 채워놓는 냉장고, 열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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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1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1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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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 끝이었는지 열하일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조선에서 청으로 끌려간 어떤 여인이 어떤 이의 첩으로 들어가게되는데, 다른 첩들의 시기로 오해를 받아 결국에는 노상에서 인두로 지져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그 안타까움에 대해 연암 선생이 글로 써 놓았다는 것이다. 연암이라는 선비가 열하까지 가면서 풍경을 읊고 수레 이야기나 나오던 그 기행문이 열하일기가 아니었던가! 갑자기 눈앞에 [최종병기 활]의 그 억울한 납치와 무능한 조정이 생각나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내용이 궁금하여 책부터 구입했다.

 

연암 선생은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길을 떠난다. 공적인 소임이 없는 관계로 자유롭게 여행하기 시작하지만, 눈과 머리가 열려있는 선비인지라 지나가는 길에 있는 돌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다른 것을 관찰하고 나은 것은 감탄하고 못한 것은 지적하고, 길에서 만난 이들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교류를 하며 북경으로 향한다. 하지만 다 갔다고 생각한 여행길이 열하까지 이어져 북경일기가 열하일기가 되었고, 1권의 이야기는 출발부터 열하까지 가는 길의 여정이다.

성을 쌓는 제도에 대해 생각하며 벽돌의 유용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p.89), 심양의 예속재와 가상루에서 나눈 이야기(p.172-209), 가상새설(p.221)을 써주고 홀대 받았던 일과 그 뜻을 알게된 일(p.237), 북경의 장관을 이야기하며 작은 것, 못쓰는 것을 쓸수 있게 만듬을 감탄하는 부분(p.253-254), 토막으로 읽어서 크게 감동받지 않았으나 앞 뒤의 이야기로 연결되니 감동받게 되는 수레 이야기(p.263-274), 백이·숙제와 고사리 이야기(p.370-373), 북경에서 열하로 급하게 가게되면서 일행과 헤어지는 이야기가 아주 구슬프고 그 와중에 견마잡이 창대가 다친 것을 바라보고 어찌 해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견마잡이 없이 말타는 자신의 예를 들어 우리나라 말 보는 방법의 위험함과 치렁치렁한 복장을 지적하는(p.488) 부분으로 넘어가니 이런 시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이에게 말을 하면 미움 꽤나 받으셨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에 실린 재미없는 글이라고 그냥 넘어갔던 수 많은 글들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태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게 잘 만들어졌다. 잘 편집된 책은 올컬러에 연암선생이 지나갔을 곳들의 현재 모습 또는 과거의 사진 등을 편집해 넣었고 복식문화에 관한 것 등 서술로만 알기 어려운 것들이 사진으로 들어있다. 또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기는 하나, 연암 선생의 글 속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설명과 문장에 스며있는 고전들의 뒷 이야기가 주석으로 바로 달려있어 책 읽는데 어려움이 없다. 도판에 대한 저작권 표시도 잘 되어 있는 점이 마음에 꼭 든다. 책 무게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들고다니면서라도 읽고싶어지는 책이다.

 

 

p.69

  점포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단정하고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고, 한가지 일도 구차하거나 미봉으로 한 법이 없고, 한가지 물건도 비뚤고 난잡한 모양이 없다. 비록 소외양간, 돼지우리라도 널찍하고 곧아서 법도가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장작 더미나 거름 구덩이까지도 모두 정밀하고 고와서 마치 그림과 같았다.

  아하! 제도가 이렇게 된 후라야만 비로소 이용利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용을 한 연후라야 후생厚生을 할 수 있고, 후생을 한 연후라야 정덕正德을 할 수 있겠다. 쓰임을 능히 이롭게 하지 못하고서 삶을 두텁게 하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삶이 이미 스스로 두텁게 하기에 부족하다면 또한 어찌 자신의 덕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p.247

  아아, 슬프다! 내가 지금 빠르게 글을 써 나가다가 여기에 이르자 이런 생각이 든다. 먹을 한 점 찍는 시간은 눈 한 번 깜빡, 숨 한 번 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눈 한 번 깜빡, 숨 한 번 쉬는 시간이 문득 '작은 옛날'과 '작은 오늘'을 이루니, '큰 옛날'과 '큰 오늘'이라는 것도 역시 크게 눈 한 번 깜빡이고 크게 숨 한 번 쉬는 시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사이에 이름을 내고 공로를 세우겠다고 하니, 서글픈 일이 아니랴.

 

p. 323

  털모자란 겨울에만 쓰는 살림살이로 봄이 되어 해지고 떨어지면 버리는 물건일 뿐이다. 천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은을 한겨울 쓰고 해지면 버릴 모자와 바꾸고, 산에서 채굴하는 양이 정해져 있는 물건을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중국 땅으로 실어 보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사려 깊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인가?

 

p.332

  벼슬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바야흐로 벼슬에 올라갈 때는 한 등급, 반 계단씩 올라 남에게 뒤처질까 봐 남을 밀치고 앞을 다투다가, 마침내 몸이 숭고한 자리에 이르면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외롭고 뒤태로워 아픙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뒤로는 천 길 낭떠러지로, 붙잡거나 도움 받을 희망마저 끊어져서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수 없게 된다. 역대의 모든 벼슬아치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p.379

"모를레라, 임이 어느 곳에 있는 줄. 발 넘어 눈썹 그리는 소리, 그 님이 아닐까?"

 

p.424

  수 많은 성인들이 자신의 생각과 보고들은 지식을 다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윤색·수식한 까닭은 장차 그것으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것인가, 아니면 모든 인민들과 함께 영원히 그 복을 누리려 한 것인가.

 

p.439

  공자는 "남들이 자신을 알라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군자답지 않겠는가?"라고 했으며, 노자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면, 아마 나는 귀한 존재일 것이다"라고 했으니, 그들은 남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p.478

  쓰고 있는 모자는 둥근 처마가 지나치게 넓고 이마 위에 검은 일산 같은 것을 걸치고 있으니, 처음 보는 것이라서, '이게 무슨 놈의 모자인가? 이상도 하다'라고 했을 것이다. 입고 있는 도포는 소배가 몹시 넓어 너풀너풀 춤이라도 추는 것 같으니, 처음 보는것이어서 '이 무슨 놈의 옷인가? 이상하게도 생겼네'라고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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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음식 잡학 사전
윤덕노 지음 / 북로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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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채소 인류 최대의 스캔들]을 읽고 재미를 못봐서 실망하던 터에 친구의 블로그에서 음식에 관련된 이 책을 발견했다. 머리도 식힐 겸 큰 기대 없이 읽었건만, 책에 실린 음식들이 아는 음식이라 잘 읽히고 읽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흥겹게 읽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지역색이 있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그 음식의 유례나 조리법에 대해서는 쉽게 알 수가 없으니 항상 궁금증이 동하다가 해결되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 책은 내가 갖고 있던 의문 중에 몇가지를 시원하게 해결해주었다. 식사 모임 때 분위기를 이끌고 잘난 척 하기 좋은 수준의 이야기들은 읽기는 쉬웠지만, 외워질지는 모르겠다. 모임 전에 숙지하고 가서 이야기 해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145페이지에 아프로디테를 자신있게 굴껍질에 올려 놓은 저자 덕분에 이 책을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 의문이 들기는 한다. 기억했다가 재미삼아 써먹는 정도로만 해야할까보다. 내 입이는 좀 느끼했던 푸아그라는 어떻게 만드는지 알게 된 후로 먹지 않지만, 북경오리는 즐겼었는데 푸아그라 만들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오리를 괴롭히니 기피 음식 리스트에 북경오리도 올려 놓아야겠다.

 

여행기를 쓰기에 그 시선에서 이 책을 바라보자면, 무척 부럽다.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생각하고 알고 있어야 이런 이야기들을 엮어 낼 수 있을까? 귀동냥에 의존하고 있는 내 입장에는 잡학 사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런 책들을 써내는 작가가 놀라울 따름이다. 책은 손에 올려 놓고 읽기 편한 사이즈다. 책장에 꽂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한꼭지씩 읽고 가서 써먹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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