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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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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정상적인 정서 반응이다

 

여러 연예인들이 공황장애와 같은 불안장애로 인해 방송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들이 많이 보도된 바 있으며, 최근 대표적인 연예인으로는 김구라와 정형돈을 꼽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 불안이나 공포를 느끼는데, 이는 정상적인 정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비가 오는 날 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경우나, 길에서 연쇄 살인범을 마주쳤을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서 장애가 있다고는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위험이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불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일반적인 정서 반응이 아니라 병적인 불안 증세로 구분하게 된다.

 

불안장애는 어떤 특정한 증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신적 질환을 폭넓게 지칭하는 용어다. 고소공포증이나 혈액공포증과 같이 특정 상황이나 물체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증세나, 발표와 같이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회 공포증, 들어온 문으로만 나가야 한다거나 길을 걸을 때 줄을 따라서 걷는 것과 같은 강박장애, 특별한 이유 없이 긴장 상태가 6개월 이상 지속되는 범불안장애, 사고나 재해 이후 겪는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이 그것이다.

 

오늘 다루려는 책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는 이와 같은 불안장애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으로, 저자인 ‘스콧 스토셀’은 이 책을 통해 불안의 수수께끼를 풀려 하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불안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한다. 나는 의사도 심리학자도 사회학자도 과학사가도 아니다.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불안에 대해 글을 쓴다면 나보다 훨씬 학술적 권위가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은 종합이자 르포르타주다. 역사, 문학, 철학, 종교, 대중문화, 최신 학술 연구에서 불안에 대한 탐구들을 한데 모으고, 이걸 정말로 나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의 직접 경험과 함께 엮으려 한다.” (41p)

 

오늘날 불안장애는 보편적인 증세다

 

책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의 저자 ‘스콧 스토셀’은,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듯이 ‘불안’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저서가 있다면 여러 사람의 사례를 찾을 필요 없이 저자 단 한명의 사례만을 가져다 쓰면 될 정도로 ‘걸어 다니는 불안 종합병원’이다. 그렇지만 이런 불안장애가 저자만의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책 속에서는 미국과 영국에서 증가하고 있는 불안장애 환자와 관련한 통계를 제시함으로써 보편적인 현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미 지난 2008년 39만 명이던 불안장애 환자가 2014년 52만 명으로 5년 사이 75% 가까이 증가함에 따라 그 숫자가 증가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30년 전만 하더라도 불안장애라는 공식적인 병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1980년 불안을 치료하는 약물이 개발되어 시장에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불안장애가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 3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편람에 프로이트 식 ‘신경증’이라고 되어 있었다.” (26p) 물론 정신과 질환이라는 것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공식적이지 않았던 진단명이 새롭게 생겨났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불안장애라는 것이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는 좋은 근거가 된다.


불안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왜 불안을 느끼는 것일까. 오늘날 신경과학과 의학이 눈부신 발전을 거뒀음에도 이에 대해 명확하게 답을 내리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치료 방법 역시도 각기 불안의 원인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는지에 따라 나뉘고 있다. “병적 불안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현대 약학자들의 생각처럼 의학적 질환인가? 아니면 플라톤과 스피노자, 인지행동 치료사들 생각처럼 철학적 문제인가?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이 생각하듯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성적 억압에서 비롯된 실미적인 문제인가? 혹은 쇠렌 키르케고르와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정신적인 병인가? 아니면, W.H.오든, 데이비스 리드먼, 에리히 프롬, 알베르 카뮈, 또 무수히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선언했듯 문화적인 병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 구조의 한 기능인 것일까?” (31p)

 

때문에 저자는 자신의 불안장애 치료를 담당하던 W박사에게 불안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묻고, 박사는 자신의 책에서 본인이 서술한 내용을 쓰라고 얘기한다. “W박사는 이렇게 적어 보냈다. ‘불안은 앞날의 고통에 대한 걱정, 곧 막을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참사를 두려운 마음으로 예상하는 것이다.’” (83p) 박사는 두려움(fear)과 불안(anxiety)를 비교하며 현실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위협과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위협의 차이를 통해 이 둘을 설명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산에서 길을 잃은 것, 연쇄 살인범을 만난 것 등은 실재하는 위협이지만, 발표에 있어 느끼는 불안이나 치즈나 꿀에 대한 공포증과 같은 것은 실재하는 위협이 아닌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위협에 의해 발생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런 불안은 개인의 정서적인 문제가 신체 증상으로 발현됨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봤다.

 

“거의 모든 불안증의 뿌리에는 박사가 ‘존재론적 숙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실존적 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늙어간다는 것, 죽으리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리라는 것, 정체성을 뒤흔드는 실패와 모욕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자유와 정서적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고 우리 욕구와 주변 사람과 사회의 제약 사이에서도 균형을 잡아야만 하는 것 등. 이렇게 보면 쥐나 뱀이나 치즈나 꿀에 대한 공포증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실존적 고뇌가 전치되어 외부적인 사물에 투사된 것이다.” (85p)

 

당신의 불안은 안녕하십니까

 

그럼에도 책은 불안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하고 있다. 사실 그게 맞는 것 일수도 있다. 정체가 분명하다면 불안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 옳은 표현일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은 있다. 불안이 마냥 부정적이고, 치료해야 만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적당한 수준의 불안은 인류의 성장에 있어서 원동력이 되어 왔으며, 실제로 상당수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인들의 상당수가 불안장애를 가지고 살아왔다. ‘4대 천왕’이라는 수식어로 근래 예능에 있어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오고 있는 정형돈도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만약 불안장애가 문제가 되었다면, 이들이 족적을 남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단 이런 위인들만의 얘기는 아니다. 발표를 앞두고 최대한의 준비를 하는 이유는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도 있겠지만, 발표에 있어서 자신이 말을 더듬거나, 던져지는 질문에 답을 제대로 돌려주지 못했을 때 청중들로부터 받을 비난이나 그로인한 당혹감 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즉, 발표라는 상황에서 자신이 맞닥뜨릴 ‘정체성을 뒤흔드는 실패와 모욕을 당할 가능성’에서 나타나는 불안을 최소화 하고자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것일 수 있다. 이는 발표라는 특정한 상황 외에도 다양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불안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 운동선수, 연예인, 기업인, 예술가, 학생들의 성취도가 낮아질 것이다. 창의성은 사라지고 아예 씨앗조치 뿌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대신 우리는 정신없이 바쁜 사회에서 늘 꿈꾸어오던 이상적인 상태, 나무 그늘 아래에서 빈들거리는 삶에 도달할 것이다. 인류에게 핵전쟁만큼이나 치명적인 일이다.” (38p)

 

불안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불안을 삶에 있어서 열정을 높이거나 혹은 자극을 주는 바람직한 도구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과도한 불안을 적정한 수준으로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는 불안과 평생을 함께해왔던 저자인 ‘스콧 스토셀’이 불안의 관한 폭 넓은 지식과 어떻게 하면 불안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는 책이다. 불안을 없애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하지는 말자.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적당히 불안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자.

 

키르케고르가 말했다.

“따라서 적당히 불안해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을 배운 셈이다.” (53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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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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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의 실제 원인은?

 

얼마 전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게시물 하나가 있었다. “Everything We Think We Know About Addiction Is Wrong(우리가 중독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틀렸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유튜브에 10월 29일에 올라왔던 영상의 내용을 전달하는 글이다. 이 영상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중독과 관련된 상식들에 반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요컨대 우리는 흔히 마약 중독이라고 함은, 마약이 가지고 있는 중독성으로 인해 인간이 중독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영상은 중독 현상은 소통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기존에 쥐를 대상으로 한 중독 실험과, 해당 실험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새롭게 진행한 실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실험은 이렇다. 기존의 중독 실험에서는 쥐 한 마리를 케이지 안에 가둬놓고, 쥐가 마약이 섞인 물과, 평범한 물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마실 수 있도록 배치해두었다. 실험 결과, 쥐는 계속하여 마약이 섞인 물만을 원했고, 이는 쥐가 사망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실험을 통해 우리가 종래에 알고 있던 중독에 대한 상식이 등장하게 된다. 마약이나 도박 등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중독을 유발하는 성질로 인해 중독 증상이 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한 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케이지 안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유일하게 마약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다른 실험이 진행되었다. 케이지 내에 많은 쥐를 풀어놓고, 다른 쥐들이 서로 함께 놀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를 설치했다. 그 후 마찬가지로 마약이 섞인 물과 일반 물을 케이지 내에 함께 두었다. 결과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쥐는 마약에 중독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쥐는 일반 물만을 이용했다. 이로부터 영상이 내린 결론은 ‘소통의 부재가 중독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병사들이 모르핀을 많이 사용하였고, 이로 인해 종전 후 귀국과 동시에 마약 중독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것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쟁터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이후 실제로 마약 중독이 문제시 된 경우는 5%에 불과한 수치로 극히 적었다는 사례가 인간에게도 역시 쥐의 이야기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소통의 부재가 중독을 일으킬 만큼 인간에게 있어 소통이란 그 만큼 중요하다. 오죽했으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인간에게 있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반면에 오늘날 1인 가구의 증가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부분 이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국가와 사회의 발달로 인해 혼자 살더라도 삶의 안정성을 담보 받을 수 있는 환경적인 변화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기에 1인 가구 증가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다른 근거가 필요하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책 ‘페이스북 심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은 아니지만, 싱글턴(singleton)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에서는 이러한 현상의 근거로 ‘통신 혁명’을 꼽는다. 즉, 굳이 현실 속에서 어렵게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통신을 통해 사회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종전에 인간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던 심리적인 안정감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1인 가구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 연령층 상당수는 사회적 관계를 통신을 통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SNS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는 SNS 중독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재밌는 것은 소통과 중독의 묘한 경계선속에 SNS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만약 소통의 부재가 중독을 만들어 낸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은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통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구이기도 한 SNS에 중독된다는 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다만 한 가지 전제가 있다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SNS을 통해 이뤄지는 소통의 대부분이 사실은 정상적인 소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만 신경 쓰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소통인가?

 

“우리는 세계 각지에 있는 친구들 및 가족들과 소통하고, 직업상의 기회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성취와 인간관계를 디지털 장부에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페이스북이 많은 면에서 인간관계를 개선하기보다 오히려 인간관계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16p)

 

길고 긴 서론 이후에 이제야 등장하는, 오늘의 책 ‘페이스북 심리학’의 저자인 수재나 E. 플로레스는 책을 통해 페이스북이 인간관계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반면에 오히려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먼저 현실 속에서 직접 대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페이스북 포스팅이 현실에서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페이스북에는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리게 하고 온라인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바꾸게 하고, 때로 상식과 판단력을 완전히 잃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 페이스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감정적 반응에 영향을 미치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 단 하나의 포스팅만으로도 말이다.” (16p)

 

더불어 현실과는 달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혹은 사회적인 통념 상 ‘좋아’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포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역시도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상대방이 정말로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을 이해해주지 못할 사람이라면 열심히 자신을 감춘다고 한 들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관심과 인정을 갈구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당신 곁을 떠난다.” (241p) 이렇게 자기 스스로는 안중에도 없이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의식해 포장하고 편집만 하다가 결국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되는 것을 과연 정상적인 소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진실하게 진짜 자신으로 현재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이스북 세계에서 이는 놀라운 도전이다. …… 편집 과정에 기획이 포함되기 때문에 최종 프로필에는 주의 깊게 편집한 자기 자신이 남는다. 자기 편집을 더 많이 할수록 결국 자신의 실제 모습을 덜 가치 있게 여기고, 최악의 경우 자기 내면의 목소리 대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더 중시하게 된다.” (57p~58p)

 

자신이 행복할 조건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또는 이와 비슷한 SNS를 사용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는 이유는 삶에 필요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기 위함이다. 심리적인 안정감은 인간관계속에서 이뤄지며, 대부분 상대방이 나를 지지하거나 혹은 인정해줄 때 생겨난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자기 인식은 외부 존재들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만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이다.” (69p) “인간으로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어서, 페이스북에서 친구들과 팔로우어를 찾게 된다. 최대한 많은 친구들을 추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93p)

 

지지나 인정과 같은 행위는 페이스북의 좋아요, 트위터의 리트윗과 같은 반응으로 이뤄지며, 이는 사회적으로 ‘좋아’보이는 것에 대해서 이뤄지곤 한다. 이를 위해서 SNS 사용자는 자신을 가상의 존재로 포장하거나 편집한다. 이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위대한 교훈 중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직 자신의 생각과 반응만을 통제할 수 있다. ……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갈구하고,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여 자기 가치를 결정하면 에너지만 고갈될 뿐, 아무 의미도 없다. …… 페이스북에 무엇을 올릴지를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근거하여 결정하면 그들에게 당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힘을 넘겨주는 셈이다.” (241p)

 

페이스북이 이러한 문제에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페이스북이 낳는 사회적 문제는 온라인을 통한 사생활 침해, 십대들의 온라인 괴롭힘 문제나 사이버 폭력, 음란물 등 그 종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오늘 다루고 있는 책 ‘페이스북 심리학’에서도 이와 같은 폭 넓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대기업들은 우리 시대의 ‘빅브라더’가 되었다. 이들은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관찰 하고 기록하며, 우리는 노출증 환자가 되어 알아서 감시받는다.” (31p) “한 십대 내담자는 페이스북 사생활 보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별 생각 없어요. 사람들이 저에 대해 뭘 아는지 별로 상관 안해요.” (154p) “어맨다는 심지어 죽은 후에도 소셜미디어 사이트들에 있는 ‘괴롭히기’ 페이지에서 계속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이 사례는 사이버 폭력의 심각함과 사이버 폭력이 십대에게 미칠 수 있는 극단적인 악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159p)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SNS가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그리고 중독이 낳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인간관계에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 자신의 행복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그 결정권을 넘겨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개인의 진실 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페이스북과 같은 SNS는 나쁘기만 한 도구인가. 책 ‘페이스북 심리학’은 여러 사례들을 들며 SNS의 순기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때문에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문제는 페이스북이 아니다.” (225p)

 

당신의 삶에 반창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해주는 칭찬에 손사래를 치면서 자신이 ‘단지 운이 좋아서’ 목표를 달성한 것뿐이라고 말하고 자신의 힘을 낮추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자기 비난에 깊이 빠져 있다. 이들은 자기 삶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이 내린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행복하거나 자신이 자랑스러울 때조차 그러한 감정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다가 누군가 자신을 향해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면 그제야 달라진다.” (239p)

 

케이지 속에 홀로 놓여 있던 쥐는 아마도 혼자 존재한다는 외로움을 견디고 잊기 위해 마약에 중독되는 쉬운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반면 케이지에 다른 쥐들과 놓여 있던 쥐는 이미 외로움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했기 때문에 굳이 마약을 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SNS에 중독되는 경우도 케이지 속에 홀로 놓여 있는 쥐와 같은 문제를 갖고 있거나 혹은 그보다 더욱 다양한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SNS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는 간편하고 효율적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자신의 모습과 온라인 모습 사이의 괴리감을 키워놓고, 이어 SNS에 더욱 더 종속적이게 만들면서, 그 와중에도 현재의 문제는 여전히 미결 상태로 남겨놓는다.

 

페이스북은 삶에 있어서 반창고가 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현실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페이스북에 더욱 몰두 하는게 아닌가 싶다면 책 ‘페이스북 심리학’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 실린 사례들이 남 일 같지 않다면 당신의 삶에 진지한 변화를 일으켜야 할 때다.” (202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급하게 쓰느라 글이 많이 엉성합니다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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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되어 다시금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하게 되었네요.

시간을 착각해 늦게 올리는 것을 이해 바랍니다. ㅠ_ㅠ

 

1. 모든 사람을 위한 지진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지구과학 수준의 지식으로 생각해본다면 누구라도 한반도는 지진 안전 지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판과 판 사이가 만나는 부분은 일본 열도 쪽이고, 한반도는 판의 경계가 아닌 위에 있으니 지진이 일어날 염려가 많지 않고 나더라도 크게 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근래 한반도도 더 이상 지진 안전 지대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다른 나라의 지진 사례들을 살펴보며 지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한편, 과거 한반도의 역사속에서 지진이 일어났던 사례들을 바탕으로 우리도 역시 지진이 올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에일리언 유니버스

 

 얼마 전 나사에서 화성에 물이 흐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었습니다. 사실 이 광활한 우주에 유일한 생명체가 우리밖에 없을거란 가능성은, 다른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에 비해서 훨씬 낮습니다. 은하만 해도 천 억개가 있으니,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그럼에도 과거 외계인과 접촉했다고 알려졌던 사건들은 대부분이 허구에 불과했습니다. 책 에일리언 유니버스에의 2장에서 다루고 있는 로스웰의 경우 대표적인 외계인 접촉 사건이지만, 반대로 허구라는 것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외계인 접촉과 관련한 미스테리를 읽기 보다는, 오히려 이 책을 통해 오늘날 과학자들은 외계인을 만나고자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고 어떠한 성과를 봤는지에 대해서 읽어보는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3. 전자정복

 

바야흐로 전자의 시대이나 전공자 외에 해당 분야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책은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패러데이나 맥스웰과 같은 사람들이 이끌었던 전자기학의 태동기부터 오늘날 까지의 역사를 다뤄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딱딱한 전공으로 풀어가기 보다는 관련된 일화들을 다루면서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4. 선생하기 싫은 날

 

영화 '디태치먼트'는 오늘날 교실에서의 문제상을 자세히 드러내고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영화와는 달리 교실 내에서 학생이 겪는 문제에만 포커스를 맞춰 다루지 않고 교실 내에서의 교사가 겪는 고뇌와 갈등에 대해서도 깊게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러한 시선이 독특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실의 주인을 학생으로만 보고 있었지 교사 역시도 교실을 이루는 한 구성원이라는 점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책 선생하기 싫은 날은 교사의 입장에서 교실을 그려내고 있는 책으로 기존과는 다른 시선을 학교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5. 시진핑은 왜 김정은을 죽이려는가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이전에 비해 가까워지는 한편 북중관계가 나빠지고 있다는건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내용일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거 북중관계를 떠올려보면 아무리 그래도 남북이 대립할 때 중국이 북한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에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 이 책은 중국이 북한을 향해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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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체포하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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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다수가 믿고 따르는 의견, 즉 '여론'이 곧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내리고 보면 이는 '틀렸다'. 과거에 빈번하게 자행되었던 마녀사냥이 이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며, 불과 수년전 국내에서 벌어졌던 광우병 사태 역시도 이것과 맥을 함께한다. 물론 꼭 수입할 필요도 없는, 또한 큰 위험은 없지만 장기적으로 위협 요인이 될 수도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30개월 이상, 그리고 특정위험물질(SRM)까지 수입하려는 것은 충분히 지적받고 시정 돼야 할 부분이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언급했듯이 당시의 광우병 논란은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또한 이는 실질적으로 30개월 이상 연령, 그리고 SRM 수입을 금지하기로 한 추가협상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당시의 시위는 폭력적으로, 그리고 반체제 성향을 띄어가기 시작했다.


무죄 추정 원칙은 본질적으로 '10명의 범인을 잡는 것 보다 1명의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결국 이는 기본적으로 사회는 위험을 최소화 시키는 방향의 정책을 펴는 것이 옳다는 또 다른 예이기도 하다. 즉, 이전의 마녀사냥이나 수년전의 광우병 사태만 보더라도 다수의 의견을 정답이라 결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따라서 의견을 종합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일반 국민이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는 유권자가 후보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접할 수 있어야 합리적인 후보를 선출할 수 있을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다시 이야기하자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본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의사소통 망이 잘 꾸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 '시인을 체포하라'는 18세기 당시 파리의 의사소통 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현학적인 표현을 떠나 간단하게 이를 살펴보면 '시'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의사소통을 혁신적으로 바꿔냈다는 SNS도 이와 크게 차이는 없다. 결국 누군가의 트윗에서 다른 이의 트윗으로, 누군가의 담벼락에서 다른 이의 담벼락으로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몇 명의 식자층이 다수의 대중을 향해 뿌리는 과거의 '시'와, 오늘날 일반 대중들이 다른 대중들을 향해 뿌리는 트윗은 분명 차이가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SNS도 결국은 몇 몇의 일반 식자층, 즉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는 소수의 트위터리안들에 의해 내용이 퍼져나가고 있는 사실은 자명하다. 트윗의 출발이 설령 식자층이 아니라고 하여도, 그 내용을 잘 뜯어보면 결국 식자층의 특정한 트윗의 변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 퍼져나간 여론을 우리는 수용해 나가야 하는가? 이렇게 여론이 퍼져나가는 동안, 이 내용을 접한 다수의 대중들은 그 이전에 해당 사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근본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반대 측 정보 역시도 종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는 과거의 '시', 그리고 오늘날 몇 자 되지 않는 '트윗'을 통해서 애초에 이런 다양한 정보를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결국 이런 형태의 의사소통은 특정한 정보를 아래로 흘려보내거나 또는, 특정한 사안에 대한 결론을 다수에게 퍼뜨리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이러한 형태의 의사소통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만 '그나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정보를 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순히 자신들을 대표할 다른 사람을 뽑아주는 것에 그칠 뿐이다.


결국 이렇게 의사소통 망이 확립되지 않은, 또는 불완전한 사회에서는 몇 몇의 계층이 다수의 대중을 손쉽게 조종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특히 불완전한 의사소통 망이 사회의 정답처럼 굳어지게 되면 이러한 부작용은 더더욱 커지게 된다. 자신도 그러한 의사소통망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가 자신을 비방하는 시에 열을 내며 그들을 잡아들이려고 했던 것 아니겠는가. 누군가는 이를 SNS의 긍정적인 면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는 엄연한 부작용이다. 왜냐면, 반대로 루이 15세가 파리의 의사소통 망을 잘 이용했다면 당시에 14인 사건과 같은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를 이용할 때 장점이 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단점이 된다면 이는 엄연한 '부작용'이다. 결국 다시 다수의 의견이 항상 정답이 아니라는 말로 돌아가게 되지만, 어쨌거나 의사소통망은 그래서 중요하고, 또 올바른 의사소통 망이 확립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어떤 것이든지 간에 애매한 것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단테는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사실 이러한 결론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다. 누가 봐도 정의로 보이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몸을 던진 과거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 등이 그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설령 그것이 진정한 정의이고 정답이라고 할지라도, 다수의 대중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채 단편적인 사안들만을 대중들에게 전했다면 이는 엄연한 '선동'이다. 그들이 깃발 높여 싸우고자 하던 정의롭지 못한 대상들과 그들이 근본적으로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책 '시인을 체포하라'에서 보이고 있는 의사소통 망이나, 오늘날 '혁신'이라고 불리우는 정보사회에서의 의사소통 방식이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다. 의사소통망은 식자층이 누군가를 선동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다수의 대중이 여러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기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본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도 정의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에서 먼저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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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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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진지함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경영하는 자신감과, 커피를 마시며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행복감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지만, 그 표정의 이면에는 고달픈 삶이 분비하는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구보는 이 현상의 원인을, 불가능은 없다’고 훈육하는 자본주의 무한 경쟁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당위에 포섭되어 몸과 정신이 점점 마모되어 가다가, 결국 ‘가능한 것은 없다’며 탈진하는 ‘성과 주체’의 피로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구보는 이곳 카페의 젊은이들이 적어도 탈진 상태로 가는 위의 과정 중 어느 한 단계를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p. 180)

 

어떤 체제이건 간에 집권층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사회가 미래를 낙관하는 분위기일수록 좋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낙관주의이든, 그렇지 않다면 권력의 선정(善政)으로 만들어진 낙관주의건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꾸준히 사회에 주입시켜나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 유의미한 일이다. 오늘날 국내의 서점시장만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눈에띄게 나타나고 있다. 항상 베스트셀러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는 자기개발 서적들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하나 결과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똑같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 물론 그 말이 꼭 집권층을 위한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며,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다. 그렇지만 그 말을 조금만 비틀어보면,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의 실패 원인은 당신에게 있으니 다른곳에서 찾지마라'


그러나 대중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또 그렇지 않다. 자기개발 서적을 읽어나가는 사람들이 부의 차이에 따라 대학이 갈릴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또는 자신의 취업 실패를 정부의 정책 실패로 연결짓는 것 등이 바로 그 예다. 자기개발 서적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이는 결국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시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철저한 성과 사회인 현재에서 성과가 좋다면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대우를 보장하는데에 반해 반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철저히 소외당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은 두드러진다. 이 경우 전자의 사람들은 노력의 가치를 믿는 반면 후자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가 안타깝게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에 그쳤다고 해서 우리가 김연아를 향해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것인가? 절대 그럴수 없다. 사실 노력에 경중을 메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해 노력하라고 줄창 외쳐대며 그들의 실패를 노력하지 않은데서 찾는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비난하는 자들이 상대방의 노력여부를 정확히 알 수 있을것인가? 기본적으로는 이를 알 수 없으며, 때문에 타자를 비난할 수가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타자의 성공을 우연함, 또는 사회적 차별에서 그 이유를 찾지만 그들이 비난하는 자가 자신의 온전한 노력을 통해 성공을 거뒀는지는 알 턱이 없다. 결국 우리 사회는 필연적으로 '노력하면 모든것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라는 모순속에 쌓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모순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면,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에도 이 모순이 녹아있지 않을까?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아케이드(Arcade)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아케이드라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짚고 가는것이 좋을 것 같다.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에서는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아케이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해놓고 있다.


아케이드는 유리 지붕이 덮인 상점가를 위시해 유리 돔이 설치된 홀, 상점이 늘어선 지하도,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나 공중 가교, 투명한 차양이 설치된 노상 시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총칭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됐다. 대형 쇼핑몰, 종합 전시장, 전통 시장, 지하상가,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캐노피 등을 아케이드의 변형으로 간주했다. 형태와 용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실외를 실내화하고 외부를 내부로 통합한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아케이드의 특성을 공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아케이드의 본질을 이렇게 적시했다. '유리 아케이드는 꿈과 같이 외계를 갖지 않은 건축물이나 보행 공간을 말한다' (p. 11)


발터 벤야민의 책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사용되었던 아케이드의 개념보다는 다소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현재에는 더이상 과거의 아케이드와 같은 형태가 국내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길을따라 케노피가 쳐져 있는 전통 시장의 형태가 과거의 아케이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형태의 유사성일 뿐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그 차이가 있다. 또한 지하상가의 경우 과거의 아케이드와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형태의 측면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한 '실외를 실내화하고 외부를 내부로 통합한 공간'이라는 정의로 아케이드를 본다면 모두 하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오늘날 서울의 모습을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렇듯 아케이드의 의미를 다시금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적으로 아케이드를 정의내린 것은 우리가 보고자 하는 서울의 모습과는 크게 연관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자가 아케이드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책 전체에서 아케이드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서울에 대해서 저자가 갖는 생각은 꾸준히 변해가고, 최종적으로는 글의 끝에서 발터 벤야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완결짓는다. 그 결론을 먼저 확인하는 것 보다는, 먼저 이 글로 생각을 이어나가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아케이드는 도취의 공간이자 우울의 공간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 소설 속 여인은 갈구한다. "저걸 가질 수 있다면, 황실의 여인들이 선택할 만한 저걸 가질 수 있다면, 나도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환상과 현실, 매혹과 각성이 진자처럼 오가는 곳이 아케이드인 것이다. 아케이드의 쇼윈도는 '거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투명한 유리 뒤에서 명품의 특권적 지위와 행인 사이의 '거리(距離)'를 유지시킨다. (p. 101)


노력하면 '가질 수 있다'라는 것의 환등


과거의 사회가 '관'에 의해 모든것이 운영되었다면, 오늘은 원칙적으로 '민'에 의해서 대부분의 것이 운영된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정부라는 보이는 주먹에 의해 운영된다'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때문에 옛날에는 자신에게 피해가 오면 나랏님탓을 할 수 있었고, 어느 사회나 책임자를 요구하기 마련이니, 왕권이 약하던 과거에는 정 안되겠으면 나랏님의 목을 따는 일도 심심치않게 벌어졌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왠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대부분의 문제를 지도자의 탓이 아닌 자신의 탓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서두에서도 설명했었지만, 이는 '노력만 하면 모든것을 가질 수 있다'는 대원칙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 원칙은 자본주의 사회가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의 공산주의 사회가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이유가 바로 노력에 따른 보상을 제공하지 않아서가 아니였겠는가.


이런 원칙하에서 꽃피운 놀라운 생산성은 차치하고서,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있다'라는 생각이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물론 실제로는 가질 수 있는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과거에는 아예 가지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도 이제는 '돈'만 있다면 모두 가질 수 있게 변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산업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물건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의 일부는 자신들만의 '브랜드'를 구축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은 어느새 '명품'이라는 이름을 갖고서는 사람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어갔다.


이 패션의 작동 원리에서 인간은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이 페티시즘은 천의 촉감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구매자의 신경계를 자극 하는 건 원단의 질감만이 아니다. 중요한 건 상표의 짜릿한 촉감이다. 물론 고가 브랜드일수록 쾌감을 더 많이 느낀다.(p. 118)


또한 사람들은 이 상표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에서는

누구나 공주가 된다

버거킹 마니아, 그녀는

버거킹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이미지의 왕국, 버거킹으로 간다


- 조동범, 버거킹을 먹는 여자 (p. 170)


결국 제품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서 제품 자체나 상표, 브랜드명에 담겨있는 그 기호와 이미지를 구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그런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데서 문제는 시작된다. 그러면서 사회는 우리들에게 '이런 이미지를 구매하고 싶다면 일하라, 노력하라'라며 강제로 밀어낸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하여 모든것을 가질 수 있을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제품을 구입한다고 해서, 시의 표현을 빌린다면 '시의 대상이 버거킹을 간다고 하여' 공주가 될 수 없는것은 자명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물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것이겠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물신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것을 가질 수 있다'라는 환상에 그 기반을 두고 있을것이라는 점을 예측해볼 수 있다.


서울, '소비 자본주의'의 환등상


작품의 표제 또한 기가 막혔다. '신성한 심장'.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즉 그리스도의 사랑과 속죄를 상징하는 오브제였다. 역설적인 이름이었다. 구보는 그제야 트리티니 가든, 즉 삼위일체 정원에 놓인 거대한 초콜릿 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간파했다. 이곳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숭고한 삼위일체가 역사하는 성소가 아니었다. 물신과 상품(물신의 아들)과 욕망(물신과 상품의 영혼)이라는 '소비 자본주의 삼위일체'가 역사하는 '신성한 심장'이었다. 서울의 아케이드를 다스리는 상품 물신의 심장은 바로 신세계백화점 트리티니 가든이라는 신전 위에서 아주 '키치적'으로 뛰고 있었던 것이다. (p. 113)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전시해놓았지만 실상 현실은 유리벽으로 가로막혀 손이 닿기 전에도 막혀버리는 곳.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원하는 무언가를 가질 수 있을것 같지만 뻗다보면 어느새 벽에 막혀 결국은 주저앉는 경우들이 종종 엿보인다. 가질 수 있는 듯 하면서 가질 수 없는 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서울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단순히 '소비'의 측면에서만 바라본것일 뿐, 그 외의 다른 부분으로까지 이야기가 확대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책은 우리 사회의 다른 문제점을 소비 자본주의하의 문제로써 다뤄내고 있다. 예컨데 소녀시대를 필두로한 현대 아이돌 문화를 '신체는 관음적 시선에 나포된 욕망의 포로이자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언제나 새롭게 가공되어 쇼윈도에 진열되는 상품(p.190)'으로 본 것이나, 또는 빈부의 갈등을 '부르주아는 우뚝 솟은 성채 같은 고급 아파트 안에서 대중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동시에 게토안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것(p. 291)'으로 본것들이 그것이다.


오히려 단순히 소비 자본주의의 문제를 바라봤다기 보다는 '계산할 수 있는 숫자 안에 모든 것을 용해하는 자본주의 원리(p.45)'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공리주의 자체에 대해 일갈을 날리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까지 논의를 확장하지는 않는다. 책은 '구보'라는 산책자가 서울을 '산책'하면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 그리고 소설, 시, 수필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서울의 모습을을 그곳에 연관시키면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루동안 산책하는 거리에서 받는 감정들만 가지고서는 그런 큰 주제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그렇지만 보고있는 것이 어떤것을 목적으로 했건간에 책은 그 일을 충분히 잘 수행해내고 있었다.


보행에서 느끼는 서울의 단편들


프랑스의 문화 사회학자 미셸 드 세르토의 개념을 차용하자면, 구보는 높은 곳에서 관망함으로써 하나의 총체적 이미지로 인식되는 개념 도시(city as concept)보다는 직접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도시 일상의 세목을 체험함으로써 인식되는 보행 도시(city as pedestrian)의 초안을 작성하고 싶었다. (p. 135)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큰 그림에서 서울을 바라본것이다. 물론 높은 곳에서 관망함으로써 얻어낸 이미지가 아니라 단편 단편을 모아 소비 자본주의라는 큰 그림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단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생긴다. 그렇다면 책은 이 외의 다른 도시 일상을 놓친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컨데 스마트폰 중독을 '그곳에 전시된 사람들은 외박을 마치고 자대로 복귀하는 군인들 같았다. 스마트폰이 유일한 위안인 듯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고 있었다(p. 283)'라고 꼬집어낸 부분이나, 길가에 흔히 서있는 가로등을 '가로등이 켜지면 어둠 속을 걷던 행인들이 안전함을 느끼듯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꿋꿋하게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은 생채기 난 사람들의 내면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다(p. 295)'라고 해석해낸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유부남이었던 벤야민이 한 여성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모스크바까지 떠난 일화를 소개함과 동시에, 횡단보도에서 만난 작중 화자 구보의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풀어내고 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구보는 똑똑히 보았다. 고개를 돌려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인도에 이르러서도 구보의 시선은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쫓았다. 구보에게 이 짧은 횡단보도는 콰이 강의 다리와 마찬가지였다. (p. 254)'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서울은 자본주의 환등상에 불과할까?


과거 아케이드는 근본적으로 소비 자본주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애초에 아케이드라는 것이 길을 따라 상점을 쭉 나열시키고, 그리고 그 위에 유리돔과 같은 형태의 천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케이드로 들어온 소비자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매할 수 있었고, 비오는 날 은신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케이드의 그러한 지위는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괴물이 나타나면서 그 힘을 펼쳐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가 지금은 그저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을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다뤄지고 있는 내용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무리다. 글의 처음에서도 언급했듯이 책에서의 아케이드 정의는 다소 포괄적인 개념이라서, 버스 정류장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도 아케이드로써 해석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 쇼핑몰이나 종합 전시장은 과거의 전형적인 아케이드의 일종이겠지만, 전통 시장이나 지하철 캐노피를 과거의 아케이드로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일상적인 공간까지 아케이드로 정의한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단순히 아케이드를 소비 자본주의의 폐해나 그 실상을 담아내고 있는 환등상으로만 그려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다음과 같은 말로 아케이드를 마지막으로 정의내린것이 아닐까.


요컨대 아케이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무늬가 매일매일 새롭게 그려지는 현장입니다. 동시대 문화가 생생하게 공연되는 역동적인 무대입니다. 제가 서울의 아케이드를 산책한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케이드를 싫어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p.313)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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