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①

 

 

4. 감상은 나의 적

 

 

 어디선가 희미하게 사르륵 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화는 잠결에 그 소리에 취했다. 마치 아득한 추억을 떠올릴 때 자기 뇌가 돌아가며 내는 소리 같았다. 그것은 자장가인 양 정화의 잠을 더욱 재촉했다. 그러나 곧바로 덜컥, 하는 소리가 나자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침대 베개 아래에 숨겨둔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것은 분명히 문고리가 뜯겨나가는 소리였다. 가만히 일어나 방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인근 주점의 네온사인 불빛이 흘러들고 있는 거실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오피스텔은 아주 단순한 구조라 숨을 곳이 없다. 현관 문고리가 그대로 있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밖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세 들어 있는 5층엔 세 개의 룸이 서로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다. 창문 커튼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았다. 젊은 여자가 작업복을 입은 남자 앞에서 지갑을 열고 있었다. 정화는 남자가 들고 있는 드릴을 보고 그가 열쇠수리공이란 걸 알았다. 여자가 열쇠를 잃어버렸던 모양이었다. 거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으로 가 권총을 다시 원위치에 놓고 누워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번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눈이 아파 화장대로 가 안약을 넣었다. 거울을 보았다.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흡사 귀신같았다. 헝클어진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 그리고 빨간 눈. 그녀 눈엔 자신이 마흔이 넘어 보였다. 거실로 가 장식장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한때 그녀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주범이었다. 요즘은 거의 마시지 않지만 잠이 안 올 때마다 가끔 찾곤 한다. 한 모금 들이키자 목구멍이 따가웠다. 그러나 위 속으로 흘러들어간 술은 이내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거실은 황량하다. 물론, 침실도. 정화는 양재동 집에 화재가 난 뒤로 3개월마다 숙소를 옮긴다. 여차하면 떠날 생각이기에 가구도, 짐도 그리 많지 않다. 오피스텔엔 이틀에 한 번 꼴로 들어온다. 당직이나 잠복, 지방출장이 많기 때문이지만 그녀의 일 중독증도 그러는 데에 한몫을 했다.
 그녀는 될 수 있으면 사건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우면산 쪽으로 나 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다. 갑자기 혼자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배다른 오빠 둘도 모두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러다가 남자를 떠올린다.

 그녀는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인간 본성은 원래 금욕이나 부르조아의 알량한  도덕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녀는 본능에 충실한 여자다. 살아오는 동안 그녀와 살을 맞댔던 여러 남자가 있었다. 종서, 로빈, 영환, 그리고 원나잇스탠드를 가졌던 몇 남자들. 지금은 옆에 아무도 없다.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번민을 지우려고 설희를 다시 떠올린다. 부끄럽고도 짜릿한 추억. 지금도 사랑한다, 설희. 그녀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비는 그쳤지만 장마가 다가오는지 공기가 눅눅했다. 아침의 사무실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팀원들은 시종 사무실 안팎을 들락거리며 다른 부서와의 협조사항을 체크하거나 전화통을 붙들고 정보를 찾으려 씨름하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탐문보고서 정리를 잊지 않는다. 이근우 건을 처리할 정식 수사팀이 꾸려져 오늘 오후엔 그동안 수사해 온 자료를 정리해 새 수사팀장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 한때 서울청 미제사건 해결팀을 맡았던 조연현 경정이 새 수사팀을 지휘하기로 결정됐다. 정화는 본인의 의사대로 빠지게 됐지만 마홍수가 감식반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은 의외였다. 정화가 없는 팀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상부에 요청했던 것이다. 정화는 특이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새 전담수사팀은 기존 정화 팀의 요원 말고도 세 명의 형사와 한 명의 프로파일러, 두 명의 기술요원과 세 명의 수사지원 인력이 합류하기로 했다.  수사사무실은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보고서가 속속 책상에 올라온다. 이천 건 말고도 파주와 청담동 건까지 합쳐졌으니 방대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정화는 보고서를 일일이 들춰보며 요약을 했다. 탐문수사에다가 이메일, 페이스북, 휴대폰 통화기록, 금융계좌, 신용카드 사용내역, 병원 진료내역, 차량이동경로, 컴퓨터 하드디스크, CCTV 조사를 비롯한 현대적인 수사 수단을 모두 동원했지만 아직 이근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그만큼 주변 관리에 철저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기에 꼬리를 밟히고 만 것이다. 

 관심을 끈 건 그의 고교 동창들의 진술이었다. 주로 이길재와 서창민이 탐문을 했는데 그가 고교 시절에 선배인 정화 얘기를 많이 하고 다닌 건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다른 여학생 얘기도 했던 것도 밝혀졌다. 이는 이근우가 정화에게만 집착했던 게 아니라는 중요한 반증이다.  그리고 그는 고교 졸업 후 한 번도 동창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금융계좌에서 여러 의혹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주식투자를 했는데 몇 년 전까지 억대의 거래가 있었지만 현재 남은 건 고작 코스닥업체 주식 500주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증권투자를 하다 실패를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구속된 안영미 명의로 된 아파트가 한 채 있었는데 대치동의 50평 호화 아파트였다. 구매 당시 분양가는 15억 원이었고 부동산 경기 침체로 몇 개월 전에 8억 원에 내놓았으나 아직 팔리지 않고 있었다. 안영미를 추궁해 그 아파트의 실제 소유주가 이근우라는 자백을 받았다.

 한편 이근우의 오금동 아파트도 매물로 내놓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5억 5천만 원.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보통 샐러리맨으로서는 그렇게 큰 돈을 절대 만질 수 없다. 대체 그 돈은 어디에서 났을까. 한편 회사급여통장의 씀씀이는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벤츠를 몰았고 유흥가 출입을 빈번하게 했다는 걸 감안할 때, 규영의 분석대로 그가 차명계좌를 활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밝혀내진 못했다.

 두 건의 부동산을 매물로 내놓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근우는 그 정리에 몰두하다가 출국 시기를 놓친 듯했다. 

 또, 그는 종신보험과 암보험에 들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사망 시 수익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그 계약을 맺은 설계사 얘기를 들어보니 나중에 지정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컨대 주변에 믿을 만한 이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만의 세계, 차명계좌, 이상증세......범행을 떠나 그는 그다지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한편, 그의 뒷정리가 깨끗하다는 건 매우 인상적이었다. 집도 그렇고 회사에서의 그의 자리도 매우 깔끔했다. 전과, 하드디스크, 휴대폰, 이메일엔 특별한 게 없다. 주변 그 누구에게도 범죄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고 도주가 아닌 장기 부재의 경우라도 그를 찾아내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파주 사건 당시 그는 병장 말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수사를 하면서 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화원을 어슬렁거렸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인근 부대의 휴가나온 병사를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그것이 패착이었다. 그는 파주에서 멀리 떨어진 울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미처 거기까지 수사의 손길을 뻗지 못했던 것이다. 청당동 사건 때 그는 복학을 해 대학 4학년생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오전에 3개월 동안의 어학연수 차 시드니로 출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2006년에 친척이 운영하는 택배회사 해외영업부에 입사를 했고 중국 출장이 잦았다. 2008년에 회사 경영진이 바뀌었음에도 그는 과장으로 진급했다. 조사를 해보니 인사담당 상무에게 뒷돈을 건넨 것으로 드러났다. 

 

 조연현 경정이 불쑥 사무실로 찾아왔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일찍 나타난 것이다. 마르고 작은 체구지만 의연해 보였고 말쑥한 차림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부드러운 눈빛과 말투도. 그는 경찰대 선배다. 서울청에 있을 때 잠깐 스친 것 말고는 그와 별로 인연이 없다. 정화는 그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란 걸 알고 있었다. 마약 수사와 지능수사 전문가로 한때 이름을 날려 30대 중반에 이미 경정 계급장을 달았다. 하지만 총경 진급을 하지 못해 계급정년을 앞두고 있다.  경찰 내 어느 인맥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인물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그의 제안에 정화는 그러자고 했다. 사람이 한적한 식당으로 갔다. 나이 50이 가까워진 그의 머리는 이미 반백이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지?" 경정이 물었다.
 정화는 살짝 미소만 지어보였다. 식사를 하면서 맥주를 시켰고 그는 매우 유쾌하게 자리를 이끌어 갔다. 주로 일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였다. 가끔씩 농담도 했다.
 "세상에서 제일 야한 반찬이 뭔지 알아?" 그가 물었다.
 정화는 답이 무엇인지 몰라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가 답을 떠올렸다.
 "닭가슴살!"
 "노우." 그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뭐죠?"
 "버섯!"
 그의 대답에 정화는 하마터면 입 안의 내용물을 뱉을 뻔했다. 정화는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평소에 그렇게 좀 웃지 그래."
 "제가 늘 찡그리고 다니던가요?"
 "그건 아니지만 표정이 차가워서 말을 붙이기가 좀 힘들더군." 그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제게 말을 붙이려고 해 보셨어요?"
 "그럼. 난 미국에서 처음 보고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 과감하고 냉정하다가도 어떨 땐 한껏 부드러워지는 여자. 내가 좀 젊었다면 아마 데이트신청 했을 걸?"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둘은 마주보고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소화도 시킬 겸 탄천변을 걸었다.
 "난 오 경위가 왜 빠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제겐 버거운 수사라서요."
 "가벼운 임무를 맡기면 그대로 수사팀에 남아주겠나?"
 정화가 고개를 저으며 이미 결정이 난 일이라고 했다. 벤치가 보이자 그가 잠깐 앉자고 했다.
 "아마 큰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사연 없습니다. 경정님도 이 생활 오랫동안 해보셨으니 잘 아시겠죠. 왜 그럴 때 있잖아요? 갑자기 사건을 맡고 싶지 않은 기분."
 "그래.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었지." 조 경정은 그렇게 말하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색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어느 순간엔가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물었다. 부하 여직원을 배려하는 듯 했다. 정화는 그러라고 했다. 그는 멀찌감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담배 하나를 빌리곤 불을 붙여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이놈의 것을 왜 끊지 못하는지 자신도 모르겠다”며 두 달 만에 피워본다고 했다.
 "이 사건에서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나?" 경정이 물었다.
 "살인을 해본 자의 억제할 수 없는 살인충동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해요. 오랜 간격을 두고 다시 살인을 저지른 걸 보면."
 정화의 대답에 그가 미소를 지으며 정화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화는 당황했다. 저 의미는 뭘까?

 "잘 아는군. 경험에서 나온 듯이." 그가 말했다.

 정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가식적인 것이었다. 그가 얼른 말을 돌렸다.  
 "수사경험을 말하는 거야. 용의자가 왠지 자네하고 많은 관련이 있는 것 같던데? 물론, 그게 전체는 아니고 그 실체가 뭔지도 잘 모르지만 느낌이 그래."
 수사자료를 벌써 읽었을까? 그럴 리는 없다.
 "누구한테서 들으셨어요?"
 "나도 왕발이야. 하하하." 그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이미 입소문이 나 있었으니까. 서창민과 박 란은 특히 입이 가벼웠다.
 "수사자료에 제 이름이 몇 번 나오지만 그리 개의치는 않습니다. 우연하게도 용의자가 제 고등학교 후배 격이라 그럴 수도 있을 테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놈한테서 농락당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언젠가는 밝혀지겠지요.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놈은 밀항했을까?" 그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아니요. 아직 이 땅에 있습니다."
 "확신하는 이유는?"
 "느낌이죠. 숨어 돌아다니고 있다는 느낌. 약점이 있더군요. 정리정돈을 잘 하는 이는 흔히 겁이 많죠. 겁이 많으면 이리저리 안전한지를 재보며 결단을 주저하죠. 제 느낌도 무시하지 마세요."
 "매우 비과학적인 얘기군." 그가 말했다. "그러나 동의해. 내가 겁이 많거든."
 정화는 의아하다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때 조 경정이 이만 돌아가자고 했다. 빗물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잘 다려진 그의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사는 남자가 저렇게 자신을 잘 챙길 수 있는지 신기했다. 세탁소에 맡긴 것인지도 몰랐다. 서로 돌아온 뒤 그는 내일 아침에 특별수사팀 앞에서 직접 구두브리핑을 해달라고 정화에게 부탁하곤 어디론가 가버렸다. 

 

 정화는 집으로 돌아와 파일을 열어 조연현 경정에 대해 정리해 놓은 부분을 찾아보았다. 

 그에게는 결혼 경력이 있었다. 그의 아내가 다른 경찰 간부와 눈이 맞아 달아나는 바람에 그 고민으로 한동안 알콜중독에 빠졌고 근 2년 동안 요양휴가를 가진 게 진급 탈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가 정권의 눈밖에 난 것이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 바다이야기 스캔들과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의 BBK의혹 사건의 한 축을 수사하면서 관련자 휴대폰 통화내역확인과 이동경로 추적을 통한 저인망 식 수사를 한 게 문제였다.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인권위원회의 비공개 권고에 따라 중단하고 말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정권 핵심인사들의 비리 정보를 많이 얻었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다가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경력 하나를 발견했다.

 - 2005 5. ~ 2006 8. 뉴욕총영사관 파견 근무. 

 정화가 뉴욕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 직후였다. 그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정화는 왠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정화는 조연현의 당부와는 달리 이길재와 마홍수를 보내 브리핑을 하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험한 동창생들 - 3. 여자는 뭐든지 속이지 ⑤

 

 

 

 "아직 그 아이에겐 무리일 겁니다." 서 경정이 대답했다. "조폭 관련 건은 잘 모를 테니까요. 조금 더 지켜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러다간 최 과장의 반발에 부딪힐 겁니다. 안 그래도 내사에다, 아내 불륜 건에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최 과장 처지가 안 되긴 했네. 그러지." 장만영은 후배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필리핀에서 실종된 강 계장 소식은?"
 수사계장 강지수 경감은 퇴직한 뒤 필리핀을 여행하다 두 달 전에 실종됐다.
 "본청에서 그리로 몇을 파견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강 계장이 마카오를 경유해 마닐라로 왔다는 것 말곤 알아낸 게 없다고 합니다.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것도 창촌파 애들이 한 짓일까?"
 "필리핀은 워낙 한인상대 납치살인이 많은 곳이라 놈들이 관련됐는지 현재로선 속단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장만영은 서진욱의 신중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지수가 가져오겠다고 했던 그 USB라는 게 말야, 존재하긴 하는 거야?" 

 "아직 안 나오는 걸 보면 그가 거짓말을 했는지도요. 강 계장과 창촌 여직원은 실종 상태고, 구청 남녀는 죽었고. 죽은 이들의 배우자나 직장 동료, 주변 인물들은 그런 걸 본 적이 없다고 하고. 난감합니다."
 "망할, 차라리 거짓말이면 좋겠구먼. 그러면 이 생난리를 안 겪어도 될 테니까."
 "한 마디로 저주받을 USB죠."
 장만영이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서진욱이 방을 나가기 전에 농담을 했다.
 "형님도 형수님 잘 관리하세요."
 "그러지, 하하. 남자들이 왜 이리 초라한 신세가 됐나?"
 장만영은 서진욱이 나간 뒤 대포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안철수 조사는 어떻게 돼 가나?"


 한편 서진욱은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강력3팀에 들렀다. 사무실엔 박 란과 오정화 뿐이었고 정화는 자기 자리에 앉아 멍한 눈길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줄비, 오랜만이야?"
 "아, 선배님." 정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서진욱은 행정학교 출신으로 총경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강원도경에 있을 적에 근무를 같이 해 안면이 깊다. 

 "범인을 잡으러 가든지, 경감 시험공부를 하든지. 그건 안 하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가 농을 했다.
 "그래서 체포하실 건가요?"
 "뭐야, 샤론 스톤 흉내 내나?" 경정이 껄껄 웃었다. 그들은 경찰서 밖으로 나와 탄천변을 산책하며 가벼운 얘기를 나누었다.

 

 예상 밖으로, 사건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정화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된 게 그 이유였다. 어차피 상급 경찰청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사건이었다. 특별수사팀은 경정 급 수사관이 지휘를 하고 세 명의 전문수사관과 두 명의 범죄 프로플파일러를 중심으로 꾸려질 예정이었다. 서장은 특별수사팀 명단에 정화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새 팀이 꾸려지기 전까지는 사흘 정도 더 사건 해결에 매달려야 했다.

 

 청담동 의사 청부살해사건 기록을 다시 검토했다. 사건이 일어난 표면적인 동기는 주가조작으로 실형을 살고 나온 의사가 불륜을 저지르자 그 아내가 앙심을 품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가입한 종신보험이 문제였다. 가입자 사망 시 수익자가 아내였고 그 액수가 무려 10억 원에 가까웠다. 이를 의심한 경찰은 여자가 그 이전에도 몇 차례 청부살인을 의뢰했다는 첩보를 받고 추궁한 끝에 자백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화 팀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살인을 청부했다고 자백한 그의 아내를 구속했지만 정작 살인범을 잡지 못하고 수사 3개월만에 수사팀을 해체했다. 그런데 그 아내가 기소유예로 풀려나 지금은 호주에 정착해 있다는 것이었다. 자백과 주변인물 증언 말고는 범인의 지문이나 흉기가 없어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검사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정화는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경찰관을 만났다. 그는 수사기록 말고는 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다만 범인을 잡았으면 특진했을 거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여자가 쉽게 풀려난 이유에 대해 당시 검찰 고위직에 있던 그녀의 작은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뭐, 흔히 있은 일이다. 

 정화는 호주대사관에 파견나가 있는 경찰관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여자를 수소문해달라고 했다. 이틀 뒤 그 경찰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자는 호주에서 재혼해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변호사를 통해 진술을 해왔다고 했다. 그녀는 옛 사건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고 이근우의 사진을 보여주자 전혀 모르는 인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정화가 그 경찰관에게 말했다.

 "범인을 잡으면 나중에 대질심문 차 그녀를 서울로 소환할지도 모릅니다. 여자의 동태를 잘 감시해 주세요."

 

 이길재가 이근우의 여권을 통해 출입국기록을 조사한 결과 중국으로 자주 출장을 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보고했다. 

 "놈이 사건 뒤 출국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중국으로 밀항했을 가능성이 있네요." 

 마홍수의 예상과 맞아 떨어졌다. 정화도 염려했던 것이었다. 팀은 전국 선박 입출항 신고소에 이근우의 각종 사진이 든 수배전단을 배포하고 항구와 해안 검문검색을 강화해 달라는 요청서를 해경에 보냈다.

 

 이근우의 사진을 언론에 흘리자 전국에서 많은 제보가 들어왔다. 그러나 확인 결과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오늘도 정화는 규영과 함께 제보자를 만나러 대전까지 갔다가 허탕을 쳤다. 돌아오는 길에 규영이 피로해 보여 정화가 운전대를 잡았다. 연이은 밤샘 수사와 출장으로 팀원들의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마홍수와 박 란은 영양제 주사까지 맞아가며 사무실을 지켰다. 

 판교톨게이트를 지났을 때 잠에서 깬 규영이 말을 걸었다.
 "인간은 왜 그렇게 남의 배우자를 탐내는 거죠?"
 "무슨 소리야?"
 "특히 우리 과장 부인 윤다정 경사도 그렇고, 얼마 전에 보도된 여 경위 사망사건도 그렇고. 섹스에 환장했나, 이거 경찰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요즘 같아선 확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경찰 사회라고 해서 사람 사는 사회와 하나도 다를 게 없지. 그 잘난 체 하는 검사들은 안 그런가? 룸살롱 성접대를  받은 검사,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 변호사 시절 법무법인 대표와 사귀다가 검사가 된 뒤 벤츠를 받은 여검사.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그건 그렇죠. 팀장 님도 같은 경관으로부터 성희롱이나 유혹을 당한 적 있습니까?"
 "왜 없었겠어. 부지기수였지."
 정화가 선선히 대답했다. 정화에게 성적인 유혹, 거래, 협박을 했던 동료 경찰을 다 모으면 아마 한 트럭은 족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여경에 대한 동료 남자 경관의 유혹은 정말 못 말린다. 붙어지내니까 그런 것이다. 특히 상하관계가 분명한 공무원이나 제복을 입은 남자 사회일수록 더 그렇다. 직업 특성 상, 도처에 마초 기질의 남자가 판을 치고 있는데 그럴수록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아서 그렇지, 정화는 술자리에서 수 차례 몸을 더듬은 서장 하나를 골로 보낸 적도 있다. 막약 그들과 동침했다면 지금의 자신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화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 본 적은요?"

 언제부턴가 규영은 상관인 정화를 허물없이 대하고 있었다. 정화도 그게 편했다.

"오늘따라 얘가 왜 이래? 난 집안의 개는 안 건드려." 정화가 매몰차게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화는 의혹의 눈길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렇죠. 적어도 공직자나 공직자 가족은 그래선 안 돼죠. 안 그렇습니까?"
 정화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규영이 또 말을 걸었다.
 "강남은 거대한 집창촌입니다. 오죽했으면 창촌파 애들이 집창촌에서 착안해 이름을 지었겠어요. 이 나라는 낮과 밤이 다른 이중인격자들의 나라, 섹스공화국이고요. 잠복이나 불심검문 나갈 때마다 속이 뒤집어집니다."
 "우리, 다른 얘기 하면 어떨까?" 정화가 말했다. 그러나 규영은 계속했다.
 "혹시 팀장님도 유부남과 자 본 적 있습니까?"
 "훗, 기가 차서 원. 그 질문이 무척 무례하다고 생각 안 들어?"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규영이 사과를 하곤 침묵에 들어갔다. 그 동안 정화는 영환과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결혼한 그와 몇 개월 동안 관계를 가진 게 규영에게 문득 부끄러워졌다.
 양재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왔을 때 규영이 물었다.
 "이근우와 고교 동창생이시라면서요?"
 "오홋, 나도 놀랐지. 기록 상 2년 후배던데 만난 적도 없는 놈이야. 어떻게 알았어?"
 그러자 규영은 서 형사가 그랬다고 말했다. 정화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면서.
 "때론 자기 자신에 대해 남이 더 많이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 정화가 말했다. "신경 안 써. 내가 모범경찰이 아니란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테고. 그런데 그가 나에 대해 뭘 더 알고 있던가?"
 "다른 얘긴 못 들었습니다. 물었지만 그냥 팀장님이 비밀을 많이 가진 여자라고만 하더군요."
 "비밀 많은 여자?" 정화는 푸하하, 하고 웃었다.  "참 웃기는 짬뽕이군."
 "혹시 동성애자는 아니시죠?"
 그의 질문에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혔다. 정화가 마음 속에 떠올린 이름이 있었다. 임설희.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오늘은 그만. 명령이야." 정화가 말했다.

 

 임설희, 임설희. 정화는 속으로 그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왜 그 이름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을까. 신기하기도 했고 또 슬펐다. 설희와 거닐었던 캘리포니아의 바다, 백색 가루의 환타지, 구엔틴 타란티노와 뤽 베송의 영화들, 그리고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정화는 문득 자신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규영 몰래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다행히도 규영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남들 없는 데로 가서 마음껏 울고 싶었다.

 

(영화 <라쇼몽>의 한 장면)


 서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규영이 마침 생각난 게 있다며 입을 열었다.
 "그 영화, 카페에서 봤어요. <라쇼몽>."
 "아차, 카페 주소를 메일로 알려주지 못했네. 미안해. 내가 정신이 그렇게 없다니까." 정화가 변명을 댔다. 실은 사생활일부를 들킬 것 같아 알려주기가 싫었던 것이다. "어떻게 거길 찾아 들어갔어?"
 "카페이름으로 들어갔더니 나오더군요.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정화도 그가 얘기해주었던 영화, <인 더 마우스 오브 매드니스(In the mouth of madness)>를 며칠 전에 카페에서 감상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음악을 찾아 즐겨찾기 폴더에 넣어두었다. 그 얘길 하려다가 말았다.
 "<라쇼몽>에서 기억 나는 장면이 있다면?"
 "장면이 아니라 대사 하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뭐지?"
 그 물음에 규영이 정화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자는 뭐든지 속이지. 심지어 자기 자신 조차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험한 동창생들 - 3. 여자는 뭐든지 속이지 ④.

 

 


  송파구 문정동의 밤. 아파트 옥상에서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았다. 근무평가의 키를 쥔 남자의 요구로 몇 차례 몸을 섞긴 했지만 여자는 그 때마다 남편이 알아챌까봐 늘 걱정이었다. 여자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술에 취한 남자의 팔은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경정님, 이러지 마세요." 여자가 가까스로 그 손을 뿌리쳤다.
 문제는 경찰서 간부들이 여경을 위로하고자 만든 회식자리에서 비롯되었다. 그 자리에서 남자 간부들은 줄곧 부하 여경들에게 추파를 던졌다. 문인식 경정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문인식은 한미희 경위의 남편이 지방 출장을 간 걸 알고 집까지 따라와 성관계를 요구했다. 한미희는 차마 집안에서 그럴 수 없어 그를 달래려 옥상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어서 돌아가세요. 안 그러면 사모님에게 전화할 거예요."
 "할 테면 해 봐. 너도 무사하진 않을 걸?"
 남자가 여자의 스커트 자락을 올리곤 서슴없이 손을 사타구니로 집어넣었다.  여자는 비틀거리며 난간에 등을 기댔다. 그 순간 낡은 난간이 떨어져나가며 여자의 몸이 아래로 사라졌다.

 

 

 

 

 

 정화는 후배 여경의 추락사망 사실을 조간신문으로 접하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찌기 소문으로 들었지만 둘 관계가 확인되긴 처음이었다. 그것도 비극으로. 대체 이놈의 조직이란. 동업자 정신에 따라 사건은 쉽게 묻힐 것이다. 아침 일찍 정화는 서장실로 갔다. 서장은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나 따라와서 고생이 많지?" 서장이 소파에 앉길 권하며 물었다.  
 장만영 총경. 강화경찰서장으로 있다가 강남으로 온 직후 서울청 수사지원과에 있던 정화를 이리로 부른 인물이었다. 그가 정화를 강력3팀장에 앉히자 말이 많이 돌았다. 정화와 장 총경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둥, 강남경찰서에 인맥이 없는 장 총경이 측근들을 불러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둥, 문제아로 찍혀 임용된 지 10년이 넘도록 만년 경위로 지내고 있는 정화가 그 일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둥, 하는 것들이었다.

 우선, 정화와 장 총경이 특별한 사이인 건 맞지만 소문처럼 불미스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그는 돌아가신 정화 아버지가 초급장교였을 때 관사 일을 챙겨주던 당번병이었다. 전역 후 정화 아버지의 추천과 자기 노력으로 경찰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경찰 인생을 시작했다. 그 뒤 자주 아버지를 찾아왔고 정화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에겐 마치 작은아버지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파주경찰서 감식반장에 있을 때 정화는 같은 경찰서에서 막 수사과 임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정화에게 여러가지로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그 해 유종하가 자살했을 때도, 그녀가 상관을 폭행했을 때도, 인터넷신문에 경찰 간부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가 징계를 받은 작년에도 그랬다. 
 "무슨 말씀을요.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자네를 보면 오 장군님 생각이 많이 나네. 참 능력 있고 강직한 분이셨지."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다. 일명 하나회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 시절에 강원도 모 부대 사단장을 끝으로 전역했다.  
 "최 과장이 많이 밀어주나?" 서장이 물었다.
 "잘 해줍니다."
 "예상 밖이군." 서장이 중얼거렸다. 서내 구 인맥의 핵심인 형사과장이 신진세력의 하나인 오경화와 별 트러블 없이 지낸다는 게 그에겐 신기한 일이었다.
 지난 해 말, 이 경찰서엔 큰 태풍이 몰아쳤다. 검찰의 강력한 불법유흥업소 수사가 있은 뒤 그곳과의 유착 혐의로 서장을 비롯한 많은 경찰관이 옷을 벗거나 징계 조치를 받았다. 몇 몇은 구속되기도 했다. 형사계장 자리가 비어 있는 것도 그 인사조치의 결과였다. 사직한 서장의 후임으로 비교적 청렴한 인물로 알려진 장 총경이 오자 오랫동안 이곳에서 근무해 온 일선 경찰관들은 바싹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성의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들을 '수사권을 둘러싼 검경 갈등의 희생자'로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최재서 형사과장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근무한 형사과장 역시 비리에 연루가 되어 있었으나 계장이 덤터기를 쓰는 바람에 운 좋게도 검찰의 칼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반 순경 출신인 과장은 경찰대 출신 간부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 반면, 장 총경은 정치에 서툴렀고 인맥이 보잘 것 없었다. 워낙 몸을 사리는 성격 탓이기도 했다. 요즘 형사과장은 공공연히 서장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사과장이 잘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경찰청장이 장 총경의 든든한 배후란 것을. 고시 출신인 청장은 경찰대 출신들의 요직 독점을 견제하고 싶어 했다. 

 장만영이 정화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그녀가 이번 사건을 맡고 싶지 않다고 하자 대뜸 질문이 날아왔다.
 "파주에서의 일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악몽이 자꾸 떠올라서요."
 "실은 나도 처음에 좀 놀랐네. 우리가 맡았던 사건이 들어 있어서 말야." 그가 차를 다 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오 경위, 이젠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오래 전에 자살한 놈의 일을 왜 지금도 마음에 두고 있나? 어린애처럼 왜 그래?"
 "아직 어린앤가 봅니다."

 "이 건을 해결해 봐. 그러고 나면 자네에게 경감 시험 응시할 시간을 주겠네." 장만영이 일어나 이만 가 보라는 듯 일어나 손짓을 했다.
 "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정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제 요청을 받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관련기관과 상의해 결과를 일려주겠네. 큰 기대는 하지 말게. 최 과장 말마따나 우리도 실적이 중요하니까."
 정화는 거수경례를 한 뒤 서장 방을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오다가 유종하의 동생 종서 이야길 꺼내지 않은 게 떠올랐다. 종서는 2년 전에 경화의 구파발 하숙집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다가 순찰 중인 경찰들에 붙잡혔다. 정화의 선처호소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징역 2년을 선고했고 수감된 지 1년 6개월 만에 모범수로 출소했다. 그게 작년 8월의 일로, 종서는 그 뒤로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장만영은 정화가 나간 뒤에 정보과장을 방으로 불렀다. 정보과장 서진욱 경정도 정화와 비슷한 시기에 서장이 이곳으로 데리고 온 케이스였다.
 "수서동 모텔 사건은 어떻게 되고 있나?" 서장이 물었다.
 "강력1팀에서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예상대로 만지작거리고만 있습니다." 

 "최 과장이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만. 청부 냄새가 나지?"
 "그렇습니다. 우리도 창촌 애들을 감시하고 있지만 별다른 냄새는 안 나네요."
 "오정화가 밝혀낸 건하고 관련이 있을까?"
 서장의 물음에 서진욱은 그럴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했다. 서장은 조금 아까 찾아온 오 경위가 사건을 맡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얘길 해주었다. 서진욱이 그 이유가 뭔지 들어봤냐고 물었다.
 "자네도 짐작하고 있는 얘길세. 그 일에서 풀어주고 수서동 건을 맡겨볼까? 어떻게 생각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험한 동창생들 - 3. 여자는 뭐든지 속이지 ③

 

 

 

 

 

 

 

 정화는 사무실로 돌아와 박 란에게 브리핑 자료작성을 지시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어둑해진 도심엔 네온사인 불빛이 두드러져 가고 있었고 우뚝 솟아 있는 무역센터 빌딩 사무실들엔 대부분 불이 켜져 있었다. 경기가 없는지 잠실종합운동장 주변은 어두웠다. 한구석에서 규영이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곁에 놓여진 스마트폰에서 아델의 <롤링 인 더 딥(Rolling in the deep)>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요며칠 그는 매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화가 다가갔다.
 "뭐 해?"
 "이 생각, 저 생각요." 그가 스마트폰을 껐다.
 정화는 열흘 전 체력단련실에서 그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지난 번에 한 말 기억해? 나한테 상의할 게 있다고."
 "아닙니다.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그가 담배를 발로 거칠게 비벼 껐다. 그 겨를에 정화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규영이 말했다.
 "이근우 말입니다, 왜 그가 팀장님에 관한 기사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서 형사 말을 들으니 이근우의 전 아내가 팀장님을 많이 닮았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단서라구." 정화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흔히 남자는 첫사랑이나 예전에 깊이 사랑했던 여자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죠. 이근우가 전처들에게 그랬다면서요? 여경이 그의 첫사랑이었다고. 혹시 그 여경이 팀장님?"
 "에이. 나 같은 여자에게 누가 연정을 느끼겠어."
 "팀장님이 뭐가 어때서요? 미인에 스타경찰이잖아요."
 "아부하지 마. 놈이 그랬다면 나를 죽어라고 쫓아다녔겠지."
 "처음에는 연모했지만 중간에 포기한 것일지도요." 규영이 말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런 게 어딨어?"
 "제가 그랬거든요."
 "상대는?"
 그러자 규영이 망설이며 정화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곧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때 소개로 만난 여자인데 얼굴이 광장히 예뻤어요. 연예인이 되겠다고 해 포기했죠. 오랫동안 안 보이다가 최근에 케이블티브이 쇼핑몰 쇼호스트를 하고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죠."
 정화는 왠지 질투를 느꼈다.
 "지금도 그녀를 좋아하나?"
 "그건 아닙니다만, 관심이 있어 가끔 그 프로그램에 들어가 보긴 합니다. 잘 되길 바랄 뿐이죠. 한번 쯤 만나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합니다."
 정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 뒤 규영이 침묵을 깼다.
 "그러나 놈처럼 연모했던 이의 기사를 스크랩하지는 않아요. 그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가 하는 짓이죠."
 "넌 용의자가 나를 좋아했거나 아니면 지금도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게로군? 연쇄살인범과 여 수사관, 우리 무슨 <양들의 침묵> 같은 영화 찍고 있나?" 정화가 역정을 냈다. 그러나 규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얘기죠. 아까는 말씀을 안 드렸지만 그 기사 파일이 놓여 있던 곳은 놈의 책상 위였어요. 마치 우리더러 열어보라는 듯이."
 다시 침묵. 얼마 뒤 이번엔 정화가 그 어색함을 깼다.
 "팀이 개편될 거야. 일이 커졌으니 말이지. 난 뒤로 빠졌으면 좋겠군."
 "왜죠?" 규영이 돌아보며 물었다. "파주와 이번 건에 공히 발을 걸쳐놓고 계시잖아요."
 "단일 사건은 많이 다뤄봤지만 이런 연쇄 건은 처음이야. 능력도 없고."
 "그게 아니라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겠죠?"
 "달리 할 얘기 없지?" 정화가 돌아섰다. 

 사무실에선 마홍수가 이근우 집에서 나온 증거물들을 책상에 가득 펼쳐놓고 현미경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정화를 보더니 그가 허리를 폈다. 

 "팀장님, 이걸 보시죠." 그가 핀셋으로 접시에 분리해 놓은 가느다란 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곱 군데 투명 접시엔 긴 것과 작은 것, 노란 것과 갈색의 것 등 형태가 다른 것들이 각각 들어 있었다.

 "뭐죠?"

 "둘은 용의자의 체모이고 나머지 다섯 개 접시에 든 털들 끝엔 접착제 성분이 묻어 있습니다. 놈이 가짜 수염과 가발로 변장을 하고 다닌다는 얘기죠." 

 "오호, 그렇다면 사진과 몽타주에 추가 이미지를 넣어야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현관의 신발들에서 나왔다는 흙을 분석해 봤는데 일부에서 타르 성분이 많이 섞인 바다 모래가 제법 나왔습니다."

 "그해서요?"

 "바다, 그것도 서해안 태안반도 쪽 모래로 추측됩니다. 대형 유조선 좌초로 기름이 엄청 밀려왔죠. 정화를 했지만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울러 갯벌 흙으로 보이는 증거물에서 해산물 잔해도 나왔는데요, 분명히 쭈꾸미입니다. 검색해 보니 충남 태안 신진항과 모항에서 많이 거래되고 있더군요."

 정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단한 분석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놈은 태안 어딘가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으로의 밀항시도 가능성을 염두에 두셔야 할 듯합니다."

 마홍수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정화는 회의 때문에 규영을 먼저 잠복근무에 내보냈다. 서장이 주재하는 긴급 확대수사회의에 참가하러 대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앞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이 몰려왔다. 누가 언론에 흘렸는지 몰라도 이미 '연쇄살인 의혹' 기사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경비요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진기자들은 플래쉬까지 터뜨렸다. 정화에 이어 형사과장, 수사과장, 수사계장, 정보계장, 서장이 차례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정보과장은 본청 회의에 참석하느라 자리에 없었다. 최 과장이 간략히 보고를 했고 정화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보충설명을 했다. 마홍수가 분석한 대로 밀항 가능성에 대해서도 보고를 했다. 보고를 마치자 수사과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정화에게 물었다.

 "연쇄살인, 그 가운데 완전범죄에 가까운 청부살인 혐의도 있는데 말이지, 그런 걸 자행한 용의자가 이천 부녀자 납치살해 건에서 보인 것과 같은 행태는 아주 허술하기 짝이 없단 말야? 왜 그랬다고 추정하나?"

 "여러 정황과 주변인 진술을 종합해 보면 올해 들어 그에게 급격한 심리적 불안이 찾아온 듯합니다." 정화가 대답했다. "그 불안의 원인은 그동안 저지른 살인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있고 환각성이 아주 강한 마약 복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심신의 쇠약이 초래됐고, 그에 따라 판단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현재로선 그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번엔 서장이 물었다.

 "그런데 말이지, 수사망이 좁혀오는데도 놈이 왜 공항을 통해 아직 도주하지 않았을까? 이미 위조여권으로 나갔을 가능성은?"

 "그것도 염두에 두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각 공항 폐쇄회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직 국내에 있다면 아마도 주변정리를 채 끝내지 못해서일 겁니다. 앞에서도 말씀들 드렸지만 항구를 통한 밀항시도에도 대처하고 있습니다."

 정화의 대답에 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서울청에서 지휘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여러분들 의견은 어때? 경정 급에서 누군가 나설 거라더군."
 예상했던 일이었다. 큰 사건을 맡아 공을 세우려는 수사관들이 주위에 넘치고 있었다. 서장이 정화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하겠다면 넘겨주어야죠. 이의 없습니다."
 "저는 반댑니다."
 정화는 발언하는 이가 누군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최 과장이었다. 그는 그동안 정화가 맡은 사건들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큰 건을 맡기지도 않았다. 서장이 이유를 물었다.
 "느낌이죠. 오 경위가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 서 이미지가 안 좋은데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오 팀장이 맡아 해결하면 큰 반전이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실적이 필요합니다."
 "최 과장 생각과 내 생각과 일치하긴 이번이 처음이군." 서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껄껄 웃었다. "본청과 검찰에 얘기해 보겠네. 회의 끝."
 서장의 의지가 그렇다면 그녀가 맡는 건 이제 기정사실이다. 정화는 일행이 다 나간 뒤에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몇몇 기자가 다시 다가와 질문을 했지만 얼른 자리를 피했다. 과장이 왜 그런 의견을 냈는지 궁금했다. 그의 방으로 갔지만 퇴근한 뒤였다.

 정화는 두통 때문에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현관을 나서다가 또 기자에게 붙들렸다.
 "용의자가 경위님 팬이라는 말이 돌고 있던데, 맞습니까?"
 "노 코멘트."
 정화는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밤이 이슥한 시각, 내곡동의 한 호화주택. 바(Bar)로 개조한 넓은 지하실에 여러 사람이 모여 티브이 심야뉴스를 보고 있었다. 대장 격으로 보이는 40대 남자가 소파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한 손은 그 옆의 앉은 비키니 차림 여자의 브래지어 속에 들어가 있었다. 여자는 무척 어려보였고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듯 얼굴을 붉히며 남자 손이 맨살을 더듬을 때마다 몸을 뒤틀곤 했다.
 "어허, 이미 볼 거 다 봤는데 왜 앙탈을 부리나? 가만 있어!" 그가 여자 팬티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 주위엔 남자 넷과 여자 하나가 자리에 앉아 있거나 술잔을 들고 서성이고 있었다. 
 뉴스가 끝나자 남자가 티브이를 껐다. 그는 본명이 박시백, 일명 알토라는 인물로 안양에서 세를 확장해 최근 강남으로 본거지를 옮긴 조직의 일원이였다. 오늘은 급히 소집된 모임이었다. 
 "누들, 저기서 말하는 이 모씨가 콘돌이란 말이지?" 알토가 팔에 고양이 문신이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 전에!" 누들이 대답하기 전에 시종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긴 머리의 여자가 나섰다. 그리곤 어린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알토! 저 애 내보내고 얘기해요. 대체 몇 살이에요?"
 "19살인가, 20살인가 그래. 너 정확히 몇 살이냐?" 알토가 묻자 어린 여자가 16살이라고 했다.
 "취향도 참 별나군요." 긴 머리 여자가 말했다. 알토가 여자 엉덩이를 감싸쥐며 잠깐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제시카. 남의 취향에 이래라저래라 하지마." 알토가 긴 머리 여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 얘길 해보라구, 누들."
 "청담동 의사 건이라면 콘돌 형이 분명합니다."
 "여자 둘을 암매장한 건 혹시 다른 데서 부탁이 들어와 그런 건 아닌가?" 알토가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리 멍청하게 걸려든 걸 보면 또 마약을 한 것 같습니다. 평소 뒷처리가 깔끔했거든요."
 "지난 번 공무원 처리할 때도 안 한다고 해서 미키와 내가 나섰지." 제시카가 저 만치서 술병을 들고 있는 남자를 힐긋 쳐다보곤 말했다. "마약에다, 이혼에다, 모임에도 자주 안나오고. 난 처음부터 그 자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알토, 당신이 데려왔으니 책임을 져요."
 알토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콘돌은 알토가 인터넷 청부살인 사이트에서 눈여겨보다가 조직에 스카웃한 케이스였다. 그 동안 몇 건을 훌륭하게 처리했다.
 "하, 이거 참. 원래 그런 놈이 아닌데 말이지. 자칼, 자네는 콘돌과 친했지. 언제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가?"
 "3월로 기억하는데, 오정화가 강남서로 오고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자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제시카에게 쏠렸다.

 "오정화? 아까 티브이에 나온 그 숏커트 냄비?" 알토가 비아냥거렸다.
 "자칼,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제시카가 물었다.
 "술자리에서 자주 오정화 얘길 하더군.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전엔 여자 일로 그런 적이 없었거든."
 "오정화라면 제시카, 너의 이거 아니야?" 알토가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안 그래? 창호?"
 창호라고 불린 남자는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팔짱을 끼고 술병이 뒹구는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옛날 일 들먹이지 말라는 조직의 불문률을 깨고 있네요." 제시카가 말했다. "자칼, 오정화하고 콘돌하고 대체 무슨 관계인데요?"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런데 너도 오정화와 얽힌 게 있나?" 자칼이 되물었다.
 "얽히긴 뭐가 얽혀요. 아무튼 잘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요." 제시카가 쏘아붙였다.
 "알았어." 서슬 푸른 기세에 자칼이 대답했다. 
 "하여튼 여자는 왜 그리 감추는 게 많나? 여자란 인종에겐 거짓말 유전자가 대대손손 흐르는 것 같아." 알토가 말했다. 제시카가 지지 않고 무슨 말을 하려고 들자 알토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미안해, 농담이야. 아무튼 경찰이 찾아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처리해야겠지? 반대하는 사람?"
 알토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말썽 소지를 미연에 제거한다, 그건 조직의 일처리 관행이었다.
 "누가 할래? 자칼?" 알토가 물었다.
 "제가 하죠." 누들이 대답했다.
 "다른 애기 하지." 알토가 말했다. "창촌 애들 얘긴데, 이현광이가 구속된 뒤 걔들은 지리멸렬이야. 우리가 대신해 일을 잘 처리하니까 이현광 쪽 사람이 보자고 했어. 어제 만났지. 창촌 행동대장 박대호가 겁을 집어먹고 경찰과 타협할 것 같다며 걱정이 많더군. 무슨 얘긴지 알겠지? 대가로 뭘 주겠소, 했더니 룸살롱 두 개 영업권을 주겠대. 그래서 내가 오피스텔 사업의 전권을 준다면 생각해본다고 했지. 우리도 위험부담이 큰데 안 그래?" 오피스텔을 빌려 성매매를 알선하는 건 최근 떠오른 꿀맛같은 사업이었다.  "아무튼 구체적인 제안이 오면 계획을 세워보자구.."
 "잠깐만!" 창호가 말했다. "보스는 알고 있는지?"
 "보스고 조지고 간에 이 일은 내 영역이야. 믈론 보스한테는 보고를 해야겠지. 이상."
 회의는 끝났다. 알토가 방으로 들어간 뒤 곧바로 여자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여자애는 어디서 데려왔대?" 자칼이 누들에게 물었다.
 "사채 빌린 자의 딸이라네요. 아버지가 안 갚고 도망갔다나요?" 누들이 말했다.
 "씨팔, 그렇다고 저렇게 어린 애를 잡아와?"
 제시카가 그렇게 내뱉곤 미키더러 나가자고 했다. 창호가 어디로 갈 거냐고 제시카에게 묻자 파티를 하러 간다고 대답했다. 창호가 알토에게 인사를 하고 간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그와 자칼이 총을 꺼내 알토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푹 푹, 하는 소리가 났다. 폐쇄회로로 거실을 감시하고 있던 알토의 경호원 두 명이 뛰어 들어왔다. 제시카와 누들의 총구가 그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얘를 어떻게 할까?" 자칼이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입술이 파랗게 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처리해야지. 입을 열 게 분명해." 누들이 말했다.

 "걔가 무슨 죄가 있나? 놔 줘. 확실히 다짐 받고." 제시카의 말에 자칼이 그녀를 째려보았다. 미키가 여자를 끌고 나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