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3. 여자는 뭐든지 속이지 ⑤
"아직 그 아이에겐 무리일 겁니다." 서 경정이 대답했다. "조폭 관련 건은 잘 모를 테니까요. 조금 더 지켜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러다간 최 과장의 반발에 부딪힐 겁니다. 안 그래도 내사에다, 아내 불륜 건에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최 과장 처지가 안 되긴 했네. 그러지." 장만영은 후배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필리핀에서 실종된 강 계장 소식은?"
수사계장 강지수 경감은 퇴직한 뒤 필리핀을 여행하다 두 달 전에 실종됐다.
"본청에서 그리로 몇을 파견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강 계장이 마카오를 경유해 마닐라로 왔다는 것 말곤 알아낸 게 없다고 합니다.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것도 창촌파 애들이 한 짓일까?"
"필리핀은 워낙 한인상대 납치살인이 많은 곳이라 놈들이 관련됐는지 현재로선 속단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장만영은 서진욱의 신중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지수가 가져오겠다고 했던 그 USB라는 게 말야, 존재하긴 하는 거야?"
"아직 안 나오는 걸 보면 그가 거짓말을 했는지도요. 강 계장과 창촌 여직원은 실종 상태고, 구청 남녀는 죽었고. 죽은 이들의 배우자나 직장 동료, 주변 인물들은 그런 걸 본 적이 없다고 하고. 난감합니다."
"망할, 차라리 거짓말이면 좋겠구먼. 그러면 이 생난리를 안 겪어도 될 테니까."
"한 마디로 저주받을 USB죠."
장만영이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서진욱이 방을 나가기 전에 농담을 했다.
"형님도 형수님 잘 관리하세요."
"그러지, 하하. 남자들이 왜 이리 초라한 신세가 됐나?"
장만영은 서진욱이 나간 뒤 대포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안철수 조사는 어떻게 돼 가나?"
한편 서진욱은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강력3팀에 들렀다. 사무실엔 박 란과 오정화 뿐이었고 정화는 자기 자리에 앉아 멍한 눈길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줄비, 오랜만이야?"
"아, 선배님." 정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서진욱은 행정학교 출신으로 총경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강원도경에 있을 적에 근무를 같이 해 안면이 깊다.
"범인을 잡으러 가든지, 경감 시험공부를 하든지. 그건 안 하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가 농을 했다.
"그래서 체포하실 건가요?"
"뭐야, 샤론 스톤 흉내 내나?" 경정이 껄껄 웃었다. 그들은 경찰서 밖으로 나와 탄천변을 산책하며 가벼운 얘기를 나누었다.
예상 밖으로, 사건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정화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된 게 그 이유였다. 어차피 상급 경찰청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사건이었다. 특별수사팀은 경정 급 수사관이 지휘를 하고 세 명의 전문수사관과 두 명의 범죄 프로플파일러를 중심으로 꾸려질 예정이었다. 서장은 특별수사팀 명단에 정화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새 팀이 꾸려지기 전까지는 사흘 정도 더 사건 해결에 매달려야 했다.
청담동 의사 청부살해사건 기록을 다시 검토했다. 사건이 일어난 표면적인 동기는 주가조작으로 실형을 살고 나온 의사가 불륜을 저지르자 그 아내가 앙심을 품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가입한 종신보험이 문제였다. 가입자 사망 시 수익자가 아내였고 그 액수가 무려 10억 원에 가까웠다. 이를 의심한 경찰은 여자가 그 이전에도 몇 차례 청부살인을 의뢰했다는 첩보를 받고 추궁한 끝에 자백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화 팀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살인을 청부했다고 자백한 그의 아내를 구속했지만 정작 살인범을 잡지 못하고 수사 3개월만에 수사팀을 해체했다. 그런데 그 아내가 기소유예로 풀려나 지금은 호주에 정착해 있다는 것이었다. 자백과 주변인물 증언 말고는 범인의 지문이나 흉기가 없어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검사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정화는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경찰관을 만났다. 그는 수사기록 말고는 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다만 범인을 잡았으면 특진했을 거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여자가 쉽게 풀려난 이유에 대해 당시 검찰 고위직에 있던 그녀의 작은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뭐, 흔히 있은 일이다.
정화는 호주대사관에 파견나가 있는 경찰관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여자를 수소문해달라고 했다. 이틀 뒤 그 경찰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자는 호주에서 재혼해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변호사를 통해 진술을 해왔다고 했다. 그녀는 옛 사건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고 이근우의 사진을 보여주자 전혀 모르는 인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정화가 그 경찰관에게 말했다.
"범인을 잡으면 나중에 대질심문 차 그녀를 서울로 소환할지도 모릅니다. 여자의 동태를 잘 감시해 주세요."
이길재가 이근우의 여권을 통해 출입국기록을 조사한 결과 중국으로 자주 출장을 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보고했다.
"놈이 사건 뒤 출국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중국으로 밀항했을 가능성이 있네요."
마홍수의 예상과 맞아 떨어졌다. 정화도 염려했던 것이었다. 팀은 전국 선박 입출항 신고소에 이근우의 각종 사진이 든 수배전단을 배포하고 항구와 해안 검문검색을 강화해 달라는 요청서를 해경에 보냈다.
이근우의 사진을 언론에 흘리자 전국에서 많은 제보가 들어왔다. 그러나 확인 결과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오늘도 정화는 규영과 함께 제보자를 만나러 대전까지 갔다가 허탕을 쳤다. 돌아오는 길에 규영이 피로해 보여 정화가 운전대를 잡았다. 연이은 밤샘 수사와 출장으로 팀원들의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마홍수와 박 란은 영양제 주사까지 맞아가며 사무실을 지켰다.
판교톨게이트를 지났을 때 잠에서 깬 규영이 말을 걸었다.
"인간은 왜 그렇게 남의 배우자를 탐내는 거죠?"
"무슨 소리야?"
"특히 우리 과장 부인 윤다정 경사도 그렇고, 얼마 전에 보도된 여 경위 사망사건도 그렇고. 섹스에 환장했나, 이거 경찰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요즘 같아선 확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경찰 사회라고 해서 사람 사는 사회와 하나도 다를 게 없지. 그 잘난 체 하는 검사들은 안 그런가? 룸살롱 성접대를 받은 검사,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 변호사 시절 법무법인 대표와 사귀다가 검사가 된 뒤 벤츠를 받은 여검사.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그건 그렇죠. 팀장 님도 같은 경관으로부터 성희롱이나 유혹을 당한 적 있습니까?"
"왜 없었겠어. 부지기수였지."
정화가 선선히 대답했다. 정화에게 성적인 유혹, 거래, 협박을 했던 동료 경찰을 다 모으면 아마 한 트럭은 족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여경에 대한 동료 남자 경관의 유혹은 정말 못 말린다. 붙어지내니까 그런 것이다. 특히 상하관계가 분명한 공무원이나 제복을 입은 남자 사회일수록 더 그렇다. 직업 특성 상, 도처에 마초 기질의 남자가 판을 치고 있는데 그럴수록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아서 그렇지, 정화는 술자리에서 수 차례 몸을 더듬은 서장 하나를 골로 보낸 적도 있다. 막약 그들과 동침했다면 지금의 자신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화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 본 적은요?"
언제부턴가 규영은 상관인 정화를 허물없이 대하고 있었다. 정화도 그게 편했다.
"오늘따라 얘가 왜 이래? 난 집안의 개는 안 건드려." 정화가 매몰차게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화는 의혹의 눈길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렇죠. 적어도 공직자나 공직자 가족은 그래선 안 돼죠. 안 그렇습니까?"
정화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규영이 또 말을 걸었다.
"강남은 거대한 집창촌입니다. 오죽했으면 창촌파 애들이 집창촌에서 착안해 이름을 지었겠어요. 이 나라는 낮과 밤이 다른 이중인격자들의 나라, 섹스공화국이고요. 잠복이나 불심검문 나갈 때마다 속이 뒤집어집니다."
"우리, 다른 얘기 하면 어떨까?" 정화가 말했다. 그러나 규영은 계속했다.
"혹시 팀장님도 유부남과 자 본 적 있습니까?"
"훗, 기가 차서 원. 그 질문이 무척 무례하다고 생각 안 들어?"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규영이 사과를 하곤 침묵에 들어갔다. 그 동안 정화는 영환과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결혼한 그와 몇 개월 동안 관계를 가진 게 규영에게 문득 부끄러워졌다.
양재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왔을 때 규영이 물었다.
"이근우와 고교 동창생이시라면서요?"
"오홋, 나도 놀랐지. 기록 상 2년 후배던데 만난 적도 없는 놈이야. 어떻게 알았어?"
그러자 규영은 서 형사가 그랬다고 말했다. 정화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면서.
"때론 자기 자신에 대해 남이 더 많이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 정화가 말했다. "신경 안 써. 내가 모범경찰이 아니란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테고. 그런데 그가 나에 대해 뭘 더 알고 있던가?"
"다른 얘긴 못 들었습니다. 물었지만 그냥 팀장님이 비밀을 많이 가진 여자라고만 하더군요."
"비밀 많은 여자?" 정화는 푸하하, 하고 웃었다. "참 웃기는 짬뽕이군."
"혹시 동성애자는 아니시죠?"
그의 질문에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혔다. 정화가 마음 속에 떠올린 이름이 있었다. 임설희.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오늘은 그만. 명령이야." 정화가 말했다.
임설희, 임설희. 정화는 속으로 그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왜 그 이름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을까. 신기하기도 했고 또 슬펐다. 설희와 거닐었던 캘리포니아의 바다, 백색 가루의 환타지, 구엔틴 타란티노와 뤽 베송의 영화들, 그리고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정화는 문득 자신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규영 몰래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다행히도 규영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남들 없는 데로 가서 마음껏 울고 싶었다.

(영화 <라쇼몽>의 한 장면)
서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규영이 마침 생각난 게 있다며 입을 열었다.
"그 영화, 카페에서 봤어요. <라쇼몽>."
"아차, 카페 주소를 메일로 알려주지 못했네. 미안해. 내가 정신이 그렇게 없다니까." 정화가 변명을 댔다. 실은 사생활일부를 들킬 것 같아 알려주기가 싫었던 것이다. "어떻게 거길 찾아 들어갔어?"
"카페이름으로 들어갔더니 나오더군요.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정화도 그가 얘기해주었던 영화, <인 더 마우스 오브 매드니스(In the mouth of madness)>를 며칠 전에 카페에서 감상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음악을 찾아 즐겨찾기 폴더에 넣어두었다. 그 얘길 하려다가 말았다.
"<라쇼몽>에서 기억 나는 장면이 있다면?"
"장면이 아니라 대사 하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뭐지?"
그 물음에 규영이 정화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자는 뭐든지 속이지. 심지어 자기 자신 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