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①

 

 

4. 감상은 나의 적

 

 

 어디선가 희미하게 사르륵 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화는 잠결에 그 소리에 취했다. 마치 아득한 추억을 떠올릴 때 자기 뇌가 돌아가며 내는 소리 같았다. 그것은 자장가인 양 정화의 잠을 더욱 재촉했다. 그러나 곧바로 덜컥, 하는 소리가 나자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침대 베개 아래에 숨겨둔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것은 분명히 문고리가 뜯겨나가는 소리였다. 가만히 일어나 방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인근 주점의 네온사인 불빛이 흘러들고 있는 거실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오피스텔은 아주 단순한 구조라 숨을 곳이 없다. 현관 문고리가 그대로 있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밖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세 들어 있는 5층엔 세 개의 룸이 서로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다. 창문 커튼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았다. 젊은 여자가 작업복을 입은 남자 앞에서 지갑을 열고 있었다. 정화는 남자가 들고 있는 드릴을 보고 그가 열쇠수리공이란 걸 알았다. 여자가 열쇠를 잃어버렸던 모양이었다. 거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으로 가 권총을 다시 원위치에 놓고 누워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번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눈이 아파 화장대로 가 안약을 넣었다. 거울을 보았다.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흡사 귀신같았다. 헝클어진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 그리고 빨간 눈. 그녀 눈엔 자신이 마흔이 넘어 보였다. 거실로 가 장식장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한때 그녀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주범이었다. 요즘은 거의 마시지 않지만 잠이 안 올 때마다 가끔 찾곤 한다. 한 모금 들이키자 목구멍이 따가웠다. 그러나 위 속으로 흘러들어간 술은 이내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거실은 황량하다. 물론, 침실도. 정화는 양재동 집에 화재가 난 뒤로 3개월마다 숙소를 옮긴다. 여차하면 떠날 생각이기에 가구도, 짐도 그리 많지 않다. 오피스텔엔 이틀에 한 번 꼴로 들어온다. 당직이나 잠복, 지방출장이 많기 때문이지만 그녀의 일 중독증도 그러는 데에 한몫을 했다.
 그녀는 될 수 있으면 사건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우면산 쪽으로 나 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다. 갑자기 혼자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배다른 오빠 둘도 모두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러다가 남자를 떠올린다.

 그녀는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인간 본성은 원래 금욕이나 부르조아의 알량한  도덕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녀는 본능에 충실한 여자다. 살아오는 동안 그녀와 살을 맞댔던 여러 남자가 있었다. 종서, 로빈, 영환, 그리고 원나잇스탠드를 가졌던 몇 남자들. 지금은 옆에 아무도 없다.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번민을 지우려고 설희를 다시 떠올린다. 부끄럽고도 짜릿한 추억. 지금도 사랑한다, 설희. 그녀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비는 그쳤지만 장마가 다가오는지 공기가 눅눅했다. 아침의 사무실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팀원들은 시종 사무실 안팎을 들락거리며 다른 부서와의 협조사항을 체크하거나 전화통을 붙들고 정보를 찾으려 씨름하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탐문보고서 정리를 잊지 않는다. 이근우 건을 처리할 정식 수사팀이 꾸려져 오늘 오후엔 그동안 수사해 온 자료를 정리해 새 수사팀장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 한때 서울청 미제사건 해결팀을 맡았던 조연현 경정이 새 수사팀을 지휘하기로 결정됐다. 정화는 본인의 의사대로 빠지게 됐지만 마홍수가 감식반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은 의외였다. 정화가 없는 팀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상부에 요청했던 것이다. 정화는 특이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새 전담수사팀은 기존 정화 팀의 요원 말고도 세 명의 형사와 한 명의 프로파일러, 두 명의 기술요원과 세 명의 수사지원 인력이 합류하기로 했다.  수사사무실은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보고서가 속속 책상에 올라온다. 이천 건 말고도 파주와 청담동 건까지 합쳐졌으니 방대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정화는 보고서를 일일이 들춰보며 요약을 했다. 탐문수사에다가 이메일, 페이스북, 휴대폰 통화기록, 금융계좌, 신용카드 사용내역, 병원 진료내역, 차량이동경로, 컴퓨터 하드디스크, CCTV 조사를 비롯한 현대적인 수사 수단을 모두 동원했지만 아직 이근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그만큼 주변 관리에 철저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기에 꼬리를 밟히고 만 것이다. 

 관심을 끈 건 그의 고교 동창들의 진술이었다. 주로 이길재와 서창민이 탐문을 했는데 그가 고교 시절에 선배인 정화 얘기를 많이 하고 다닌 건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다른 여학생 얘기도 했던 것도 밝혀졌다. 이는 이근우가 정화에게만 집착했던 게 아니라는 중요한 반증이다.  그리고 그는 고교 졸업 후 한 번도 동창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금융계좌에서 여러 의혹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주식투자를 했는데 몇 년 전까지 억대의 거래가 있었지만 현재 남은 건 고작 코스닥업체 주식 500주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증권투자를 하다 실패를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구속된 안영미 명의로 된 아파트가 한 채 있었는데 대치동의 50평 호화 아파트였다. 구매 당시 분양가는 15억 원이었고 부동산 경기 침체로 몇 개월 전에 8억 원에 내놓았으나 아직 팔리지 않고 있었다. 안영미를 추궁해 그 아파트의 실제 소유주가 이근우라는 자백을 받았다.

 한편 이근우의 오금동 아파트도 매물로 내놓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5억 5천만 원.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보통 샐러리맨으로서는 그렇게 큰 돈을 절대 만질 수 없다. 대체 그 돈은 어디에서 났을까. 한편 회사급여통장의 씀씀이는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벤츠를 몰았고 유흥가 출입을 빈번하게 했다는 걸 감안할 때, 규영의 분석대로 그가 차명계좌를 활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밝혀내진 못했다.

 두 건의 부동산을 매물로 내놓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근우는 그 정리에 몰두하다가 출국 시기를 놓친 듯했다. 

 또, 그는 종신보험과 암보험에 들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사망 시 수익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그 계약을 맺은 설계사 얘기를 들어보니 나중에 지정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컨대 주변에 믿을 만한 이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만의 세계, 차명계좌, 이상증세......범행을 떠나 그는 그다지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한편, 그의 뒷정리가 깨끗하다는 건 매우 인상적이었다. 집도 그렇고 회사에서의 그의 자리도 매우 깔끔했다. 전과, 하드디스크, 휴대폰, 이메일엔 특별한 게 없다. 주변 그 누구에게도 범죄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고 도주가 아닌 장기 부재의 경우라도 그를 찾아내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파주 사건 당시 그는 병장 말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수사를 하면서 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화원을 어슬렁거렸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인근 부대의 휴가나온 병사를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그것이 패착이었다. 그는 파주에서 멀리 떨어진 울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미처 거기까지 수사의 손길을 뻗지 못했던 것이다. 청당동 사건 때 그는 복학을 해 대학 4학년생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오전에 3개월 동안의 어학연수 차 시드니로 출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2006년에 친척이 운영하는 택배회사 해외영업부에 입사를 했고 중국 출장이 잦았다. 2008년에 회사 경영진이 바뀌었음에도 그는 과장으로 진급했다. 조사를 해보니 인사담당 상무에게 뒷돈을 건넨 것으로 드러났다. 

 

 조연현 경정이 불쑥 사무실로 찾아왔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일찍 나타난 것이다. 마르고 작은 체구지만 의연해 보였고 말쑥한 차림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부드러운 눈빛과 말투도. 그는 경찰대 선배다. 서울청에 있을 때 잠깐 스친 것 말고는 그와 별로 인연이 없다. 정화는 그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란 걸 알고 있었다. 마약 수사와 지능수사 전문가로 한때 이름을 날려 30대 중반에 이미 경정 계급장을 달았다. 하지만 총경 진급을 하지 못해 계급정년을 앞두고 있다.  경찰 내 어느 인맥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인물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그의 제안에 정화는 그러자고 했다. 사람이 한적한 식당으로 갔다. 나이 50이 가까워진 그의 머리는 이미 반백이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지?" 경정이 물었다.
 정화는 살짝 미소만 지어보였다. 식사를 하면서 맥주를 시켰고 그는 매우 유쾌하게 자리를 이끌어 갔다. 주로 일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였다. 가끔씩 농담도 했다.
 "세상에서 제일 야한 반찬이 뭔지 알아?" 그가 물었다.
 정화는 답이 무엇인지 몰라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가 답을 떠올렸다.
 "닭가슴살!"
 "노우." 그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뭐죠?"
 "버섯!"
 그의 대답에 정화는 하마터면 입 안의 내용물을 뱉을 뻔했다. 정화는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평소에 그렇게 좀 웃지 그래."
 "제가 늘 찡그리고 다니던가요?"
 "그건 아니지만 표정이 차가워서 말을 붙이기가 좀 힘들더군." 그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제게 말을 붙이려고 해 보셨어요?"
 "그럼. 난 미국에서 처음 보고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 과감하고 냉정하다가도 어떨 땐 한껏 부드러워지는 여자. 내가 좀 젊었다면 아마 데이트신청 했을 걸?"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둘은 마주보고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소화도 시킬 겸 탄천변을 걸었다.
 "난 오 경위가 왜 빠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제겐 버거운 수사라서요."
 "가벼운 임무를 맡기면 그대로 수사팀에 남아주겠나?"
 정화가 고개를 저으며 이미 결정이 난 일이라고 했다. 벤치가 보이자 그가 잠깐 앉자고 했다.
 "아마 큰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사연 없습니다. 경정님도 이 생활 오랫동안 해보셨으니 잘 아시겠죠. 왜 그럴 때 있잖아요? 갑자기 사건을 맡고 싶지 않은 기분."
 "그래.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었지." 조 경정은 그렇게 말하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색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어느 순간엔가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물었다. 부하 여직원을 배려하는 듯 했다. 정화는 그러라고 했다. 그는 멀찌감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담배 하나를 빌리곤 불을 붙여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이놈의 것을 왜 끊지 못하는지 자신도 모르겠다”며 두 달 만에 피워본다고 했다.
 "이 사건에서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나?" 경정이 물었다.
 "살인을 해본 자의 억제할 수 없는 살인충동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해요. 오랜 간격을 두고 다시 살인을 저지른 걸 보면."
 정화의 대답에 그가 미소를 지으며 정화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화는 당황했다. 저 의미는 뭘까?

 "잘 아는군. 경험에서 나온 듯이." 그가 말했다.

 정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가식적인 것이었다. 그가 얼른 말을 돌렸다.  
 "수사경험을 말하는 거야. 용의자가 왠지 자네하고 많은 관련이 있는 것 같던데? 물론, 그게 전체는 아니고 그 실체가 뭔지도 잘 모르지만 느낌이 그래."
 수사자료를 벌써 읽었을까? 그럴 리는 없다.
 "누구한테서 들으셨어요?"
 "나도 왕발이야. 하하하." 그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이미 입소문이 나 있었으니까. 서창민과 박 란은 특히 입이 가벼웠다.
 "수사자료에 제 이름이 몇 번 나오지만 그리 개의치는 않습니다. 우연하게도 용의자가 제 고등학교 후배 격이라 그럴 수도 있을 테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놈한테서 농락당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언젠가는 밝혀지겠지요.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놈은 밀항했을까?" 그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아니요. 아직 이 땅에 있습니다."
 "확신하는 이유는?"
 "느낌이죠. 숨어 돌아다니고 있다는 느낌. 약점이 있더군요. 정리정돈을 잘 하는 이는 흔히 겁이 많죠. 겁이 많으면 이리저리 안전한지를 재보며 결단을 주저하죠. 제 느낌도 무시하지 마세요."
 "매우 비과학적인 얘기군." 그가 말했다. "그러나 동의해. 내가 겁이 많거든."
 정화는 의아하다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때 조 경정이 이만 돌아가자고 했다. 빗물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잘 다려진 그의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사는 남자가 저렇게 자신을 잘 챙길 수 있는지 신기했다. 세탁소에 맡긴 것인지도 몰랐다. 서로 돌아온 뒤 그는 내일 아침에 특별수사팀 앞에서 직접 구두브리핑을 해달라고 정화에게 부탁하곤 어디론가 가버렸다. 

 

 정화는 집으로 돌아와 파일을 열어 조연현 경정에 대해 정리해 놓은 부분을 찾아보았다. 

 그에게는 결혼 경력이 있었다. 그의 아내가 다른 경찰 간부와 눈이 맞아 달아나는 바람에 그 고민으로 한동안 알콜중독에 빠졌고 근 2년 동안 요양휴가를 가진 게 진급 탈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가 정권의 눈밖에 난 것이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 바다이야기 스캔들과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의 BBK의혹 사건의 한 축을 수사하면서 관련자 휴대폰 통화내역확인과 이동경로 추적을 통한 저인망 식 수사를 한 게 문제였다.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인권위원회의 비공개 권고에 따라 중단하고 말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정권 핵심인사들의 비리 정보를 많이 얻었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다가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경력 하나를 발견했다.

 - 2005 5. ~ 2006 8. 뉴욕총영사관 파견 근무. 

 정화가 뉴욕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 직후였다. 그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정화는 왠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정화는 조연현의 당부와는 달리 이길재와 마홍수를 보내 브리핑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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