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3. 여자는 뭐든지 속이지 ③

 

 

 

 

 

 

 

 정화는 사무실로 돌아와 박 란에게 브리핑 자료작성을 지시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어둑해진 도심엔 네온사인 불빛이 두드러져 가고 있었고 우뚝 솟아 있는 무역센터 빌딩 사무실들엔 대부분 불이 켜져 있었다. 경기가 없는지 잠실종합운동장 주변은 어두웠다. 한구석에서 규영이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곁에 놓여진 스마트폰에서 아델의 <롤링 인 더 딥(Rolling in the deep)>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요며칠 그는 매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화가 다가갔다.
 "뭐 해?"
 "이 생각, 저 생각요." 그가 스마트폰을 껐다.
 정화는 열흘 전 체력단련실에서 그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지난 번에 한 말 기억해? 나한테 상의할 게 있다고."
 "아닙니다.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그가 담배를 발로 거칠게 비벼 껐다. 그 겨를에 정화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규영이 말했다.
 "이근우 말입니다, 왜 그가 팀장님에 관한 기사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서 형사 말을 들으니 이근우의 전 아내가 팀장님을 많이 닮았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단서라구." 정화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흔히 남자는 첫사랑이나 예전에 깊이 사랑했던 여자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죠. 이근우가 전처들에게 그랬다면서요? 여경이 그의 첫사랑이었다고. 혹시 그 여경이 팀장님?"
 "에이. 나 같은 여자에게 누가 연정을 느끼겠어."
 "팀장님이 뭐가 어때서요? 미인에 스타경찰이잖아요."
 "아부하지 마. 놈이 그랬다면 나를 죽어라고 쫓아다녔겠지."
 "처음에는 연모했지만 중간에 포기한 것일지도요." 규영이 말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런 게 어딨어?"
 "제가 그랬거든요."
 "상대는?"
 그러자 규영이 망설이며 정화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곧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때 소개로 만난 여자인데 얼굴이 광장히 예뻤어요. 연예인이 되겠다고 해 포기했죠. 오랫동안 안 보이다가 최근에 케이블티브이 쇼핑몰 쇼호스트를 하고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죠."
 정화는 왠지 질투를 느꼈다.
 "지금도 그녀를 좋아하나?"
 "그건 아닙니다만, 관심이 있어 가끔 그 프로그램에 들어가 보긴 합니다. 잘 되길 바랄 뿐이죠. 한번 쯤 만나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합니다."
 정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 뒤 규영이 침묵을 깼다.
 "그러나 놈처럼 연모했던 이의 기사를 스크랩하지는 않아요. 그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가 하는 짓이죠."
 "넌 용의자가 나를 좋아했거나 아니면 지금도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게로군? 연쇄살인범과 여 수사관, 우리 무슨 <양들의 침묵> 같은 영화 찍고 있나?" 정화가 역정을 냈다. 그러나 규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얘기죠. 아까는 말씀을 안 드렸지만 그 기사 파일이 놓여 있던 곳은 놈의 책상 위였어요. 마치 우리더러 열어보라는 듯이."
 다시 침묵. 얼마 뒤 이번엔 정화가 그 어색함을 깼다.
 "팀이 개편될 거야. 일이 커졌으니 말이지. 난 뒤로 빠졌으면 좋겠군."
 "왜죠?" 규영이 돌아보며 물었다. "파주와 이번 건에 공히 발을 걸쳐놓고 계시잖아요."
 "단일 사건은 많이 다뤄봤지만 이런 연쇄 건은 처음이야. 능력도 없고."
 "그게 아니라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겠죠?"
 "달리 할 얘기 없지?" 정화가 돌아섰다. 

 사무실에선 마홍수가 이근우 집에서 나온 증거물들을 책상에 가득 펼쳐놓고 현미경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정화를 보더니 그가 허리를 폈다. 

 "팀장님, 이걸 보시죠." 그가 핀셋으로 접시에 분리해 놓은 가느다란 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곱 군데 투명 접시엔 긴 것과 작은 것, 노란 것과 갈색의 것 등 형태가 다른 것들이 각각 들어 있었다.

 "뭐죠?"

 "둘은 용의자의 체모이고 나머지 다섯 개 접시에 든 털들 끝엔 접착제 성분이 묻어 있습니다. 놈이 가짜 수염과 가발로 변장을 하고 다닌다는 얘기죠." 

 "오호, 그렇다면 사진과 몽타주에 추가 이미지를 넣어야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현관의 신발들에서 나왔다는 흙을 분석해 봤는데 일부에서 타르 성분이 많이 섞인 바다 모래가 제법 나왔습니다."

 "그해서요?"

 "바다, 그것도 서해안 태안반도 쪽 모래로 추측됩니다. 대형 유조선 좌초로 기름이 엄청 밀려왔죠. 정화를 했지만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울러 갯벌 흙으로 보이는 증거물에서 해산물 잔해도 나왔는데요, 분명히 쭈꾸미입니다. 검색해 보니 충남 태안 신진항과 모항에서 많이 거래되고 있더군요."

 정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단한 분석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놈은 태안 어딘가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으로의 밀항시도 가능성을 염두에 두셔야 할 듯합니다."

 마홍수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정화는 회의 때문에 규영을 먼저 잠복근무에 내보냈다. 서장이 주재하는 긴급 확대수사회의에 참가하러 대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앞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이 몰려왔다. 누가 언론에 흘렸는지 몰라도 이미 '연쇄살인 의혹' 기사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경비요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진기자들은 플래쉬까지 터뜨렸다. 정화에 이어 형사과장, 수사과장, 수사계장, 정보계장, 서장이 차례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정보과장은 본청 회의에 참석하느라 자리에 없었다. 최 과장이 간략히 보고를 했고 정화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보충설명을 했다. 마홍수가 분석한 대로 밀항 가능성에 대해서도 보고를 했다. 보고를 마치자 수사과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정화에게 물었다.

 "연쇄살인, 그 가운데 완전범죄에 가까운 청부살인 혐의도 있는데 말이지, 그런 걸 자행한 용의자가 이천 부녀자 납치살해 건에서 보인 것과 같은 행태는 아주 허술하기 짝이 없단 말야? 왜 그랬다고 추정하나?"

 "여러 정황과 주변인 진술을 종합해 보면 올해 들어 그에게 급격한 심리적 불안이 찾아온 듯합니다." 정화가 대답했다. "그 불안의 원인은 그동안 저지른 살인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있고 환각성이 아주 강한 마약 복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심신의 쇠약이 초래됐고, 그에 따라 판단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현재로선 그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번엔 서장이 물었다.

 "그런데 말이지, 수사망이 좁혀오는데도 놈이 왜 공항을 통해 아직 도주하지 않았을까? 이미 위조여권으로 나갔을 가능성은?"

 "그것도 염두에 두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각 공항 폐쇄회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직 국내에 있다면 아마도 주변정리를 채 끝내지 못해서일 겁니다. 앞에서도 말씀들 드렸지만 항구를 통한 밀항시도에도 대처하고 있습니다."

 정화의 대답에 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서울청에서 지휘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여러분들 의견은 어때? 경정 급에서 누군가 나설 거라더군."
 예상했던 일이었다. 큰 사건을 맡아 공을 세우려는 수사관들이 주위에 넘치고 있었다. 서장이 정화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하겠다면 넘겨주어야죠. 이의 없습니다."
 "저는 반댑니다."
 정화는 발언하는 이가 누군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최 과장이었다. 그는 그동안 정화가 맡은 사건들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큰 건을 맡기지도 않았다. 서장이 이유를 물었다.
 "느낌이죠. 오 경위가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 서 이미지가 안 좋은데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오 팀장이 맡아 해결하면 큰 반전이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실적이 필요합니다."
 "최 과장 생각과 내 생각과 일치하긴 이번이 처음이군." 서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껄껄 웃었다. "본청과 검찰에 얘기해 보겠네. 회의 끝."
 서장의 의지가 그렇다면 그녀가 맡는 건 이제 기정사실이다. 정화는 일행이 다 나간 뒤에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몇몇 기자가 다시 다가와 질문을 했지만 얼른 자리를 피했다. 과장이 왜 그런 의견을 냈는지 궁금했다. 그의 방으로 갔지만 퇴근한 뒤였다.

 정화는 두통 때문에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현관을 나서다가 또 기자에게 붙들렸다.
 "용의자가 경위님 팬이라는 말이 돌고 있던데, 맞습니까?"
 "노 코멘트."
 정화는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밤이 이슥한 시각, 내곡동의 한 호화주택. 바(Bar)로 개조한 넓은 지하실에 여러 사람이 모여 티브이 심야뉴스를 보고 있었다. 대장 격으로 보이는 40대 남자가 소파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한 손은 그 옆의 앉은 비키니 차림 여자의 브래지어 속에 들어가 있었다. 여자는 무척 어려보였고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듯 얼굴을 붉히며 남자 손이 맨살을 더듬을 때마다 몸을 뒤틀곤 했다.
 "어허, 이미 볼 거 다 봤는데 왜 앙탈을 부리나? 가만 있어!" 그가 여자 팬티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 주위엔 남자 넷과 여자 하나가 자리에 앉아 있거나 술잔을 들고 서성이고 있었다. 
 뉴스가 끝나자 남자가 티브이를 껐다. 그는 본명이 박시백, 일명 알토라는 인물로 안양에서 세를 확장해 최근 강남으로 본거지를 옮긴 조직의 일원이였다. 오늘은 급히 소집된 모임이었다. 
 "누들, 저기서 말하는 이 모씨가 콘돌이란 말이지?" 알토가 팔에 고양이 문신이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 전에!" 누들이 대답하기 전에 시종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긴 머리의 여자가 나섰다. 그리곤 어린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알토! 저 애 내보내고 얘기해요. 대체 몇 살이에요?"
 "19살인가, 20살인가 그래. 너 정확히 몇 살이냐?" 알토가 묻자 어린 여자가 16살이라고 했다.
 "취향도 참 별나군요." 긴 머리 여자가 말했다. 알토가 여자 엉덩이를 감싸쥐며 잠깐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제시카. 남의 취향에 이래라저래라 하지마." 알토가 긴 머리 여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 얘길 해보라구, 누들."
 "청담동 의사 건이라면 콘돌 형이 분명합니다."
 "여자 둘을 암매장한 건 혹시 다른 데서 부탁이 들어와 그런 건 아닌가?" 알토가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리 멍청하게 걸려든 걸 보면 또 마약을 한 것 같습니다. 평소 뒷처리가 깔끔했거든요."
 "지난 번 공무원 처리할 때도 안 한다고 해서 미키와 내가 나섰지." 제시카가 저 만치서 술병을 들고 있는 남자를 힐긋 쳐다보곤 말했다. "마약에다, 이혼에다, 모임에도 자주 안나오고. 난 처음부터 그 자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알토, 당신이 데려왔으니 책임을 져요."
 알토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콘돌은 알토가 인터넷 청부살인 사이트에서 눈여겨보다가 조직에 스카웃한 케이스였다. 그 동안 몇 건을 훌륭하게 처리했다.
 "하, 이거 참. 원래 그런 놈이 아닌데 말이지. 자칼, 자네는 콘돌과 친했지. 언제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가?"
 "3월로 기억하는데, 오정화가 강남서로 오고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자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제시카에게 쏠렸다.

 "오정화? 아까 티브이에 나온 그 숏커트 냄비?" 알토가 비아냥거렸다.
 "자칼,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제시카가 물었다.
 "술자리에서 자주 오정화 얘길 하더군.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전엔 여자 일로 그런 적이 없었거든."
 "오정화라면 제시카, 너의 이거 아니야?" 알토가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안 그래? 창호?"
 창호라고 불린 남자는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팔짱을 끼고 술병이 뒹구는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옛날 일 들먹이지 말라는 조직의 불문률을 깨고 있네요." 제시카가 말했다. "자칼, 오정화하고 콘돌하고 대체 무슨 관계인데요?"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런데 너도 오정화와 얽힌 게 있나?" 자칼이 되물었다.
 "얽히긴 뭐가 얽혀요. 아무튼 잘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요." 제시카가 쏘아붙였다.
 "알았어." 서슬 푸른 기세에 자칼이 대답했다. 
 "하여튼 여자는 왜 그리 감추는 게 많나? 여자란 인종에겐 거짓말 유전자가 대대손손 흐르는 것 같아." 알토가 말했다. 제시카가 지지 않고 무슨 말을 하려고 들자 알토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미안해, 농담이야. 아무튼 경찰이 찾아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처리해야겠지? 반대하는 사람?"
 알토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말썽 소지를 미연에 제거한다, 그건 조직의 일처리 관행이었다.
 "누가 할래? 자칼?" 알토가 물었다.
 "제가 하죠." 누들이 대답했다.
 "다른 애기 하지." 알토가 말했다. "창촌 애들 얘긴데, 이현광이가 구속된 뒤 걔들은 지리멸렬이야. 우리가 대신해 일을 잘 처리하니까 이현광 쪽 사람이 보자고 했어. 어제 만났지. 창촌 행동대장 박대호가 겁을 집어먹고 경찰과 타협할 것 같다며 걱정이 많더군. 무슨 얘긴지 알겠지? 대가로 뭘 주겠소, 했더니 룸살롱 두 개 영업권을 주겠대. 그래서 내가 오피스텔 사업의 전권을 준다면 생각해본다고 했지. 우리도 위험부담이 큰데 안 그래?" 오피스텔을 빌려 성매매를 알선하는 건 최근 떠오른 꿀맛같은 사업이었다.  "아무튼 구체적인 제안이 오면 계획을 세워보자구.."
 "잠깐만!" 창호가 말했다. "보스는 알고 있는지?"
 "보스고 조지고 간에 이 일은 내 영역이야. 믈론 보스한테는 보고를 해야겠지. 이상."
 회의는 끝났다. 알토가 방으로 들어간 뒤 곧바로 여자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여자애는 어디서 데려왔대?" 자칼이 누들에게 물었다.
 "사채 빌린 자의 딸이라네요. 아버지가 안 갚고 도망갔다나요?" 누들이 말했다.
 "씨팔, 그렇다고 저렇게 어린 애를 잡아와?"
 제시카가 그렇게 내뱉곤 미키더러 나가자고 했다. 창호가 어디로 갈 거냐고 제시카에게 묻자 파티를 하러 간다고 대답했다. 창호가 알토에게 인사를 하고 간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그와 자칼이 총을 꺼내 알토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푹 푹, 하는 소리가 났다. 폐쇄회로로 거실을 감시하고 있던 알토의 경호원 두 명이 뛰어 들어왔다. 제시카와 누들의 총구가 그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얘를 어떻게 할까?" 자칼이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입술이 파랗게 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처리해야지. 입을 열 게 분명해." 누들이 말했다.

 "걔가 무슨 죄가 있나? 놔 줘. 확실히 다짐 받고." 제시카의 말에 자칼이 그녀를 째려보았다. 미키가 여자를 끌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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