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문학동네, 2010년, 1판 2쇄.


1982년 발표된 루마니아 출신 작가 헤르타 뮐러의 단편 소설집인 이 작품은 그녀의 데뷔작이다. 발표 당시 검열 당국에 의해 강제적인 편집과 삭제가 이루어졌고, 이후 독일에서 다시 출판되었을 때에도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2009년 뮐러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뒤 이 책에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고, 문학동네를 통해 한국에 소개된 이 책은 세개의 단편을 되살린 복원판을 토대로 번역되었다.


중편 정도에 해당하는 표제작 “저지대” 가 책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고 짤막한 단편들이 앞뒤에 배치되어 있는 형식이다. 이 데뷔작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강렬하고, 더 직관적이며, 더 시적이고 극단적이다. “저지대” 에는 흔히 말하는 서사 구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상관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그리 큰 호응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대단히 초현실적이며, 그러한 단어들을 통해 당시 루마니아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 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 역시 분위기와 흐름은 비슷하다. 각 문장은 굉장히 함축적으로 씌어 있어서 한번 읽어서는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는지 언뜻 알아 차리기 어려울 정도다. 당시 극심했던 검열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짐작할 수도 있지만, 책의 뒷편에 함께 자리한 노벨 문학상 수락 연설을 읽어 보면 그녀가 사용한 단어들과 문장들이 결코 그러한 현실적인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녀의 다른 작품 <숨그네> 의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녀는 새로운 낱말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작품속에서 창의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익숙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을 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고 다시 이를 이용해 상이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문장들을 병렬시켜 독특한 세계관을 창조한다. 예들 들자면 집안일에 찌든 어머니의 성긴 표정과 하늘 위를 떠다니는 어린 소녀의 심리 상태를 마치 동시에 한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양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이 작품에서 천착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당시 사회상에 대한 강한 비판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잔뜩 짓눌렸던 일반 대중들의 삶과 그 삶속에 깊이 자리잡은 어떤 공동 무의식같은 것을 발견하고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단편들에서 간접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묘사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단편들은 당시 루마니아 사람들의 건조한 일상을 그녀만의 언어를 통해 묘사하는 데에 치중한다. 그들의 삶은 단순히 절망적이고 신경질적이며 고단하다는 정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느껴진다. 단순히 억압당하는 피지배자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지치고 힘든 내면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타인에 대해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서로간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결핍된 모습에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한 사회내에 존재하는 인간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뮐러의 작품이 강렬한 이유는 작중 화자의 시선이 종종 초현실적인 모습을 띄며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황홀하게 비추기도 한다는 점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문장들이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는 말이 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받아 들이기 힘든 묘사들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다. 이 기묘한 체험은 희망이 전혀 없는 한 동네에 문학적 묘사를 통해 희망의 힘을 불어 넣는 기능을 한다. 일종의 기적과 같은 체험이다. 비록 현실은 여전히 고단했고 뮐러는 결국 루마니아에서 독일로 망명했지만, 최소한 그녀가 쓴 글안에서 그녀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 Ⅰ-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1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자본 I-1 경제학 비판, 도서출판 길, 2010년 1판 4쇄


김수행 교수의 번역본은 영문 번역판을 다시 번역했는데 반해 강신준 교수의 번역판은 독일어 원판을 번역한 것이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본> 은 총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경제학 비판” 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부분은 전체 <자본> 의 첫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본> 의 1권에 해당하는 경제학 비판만이 마르크스 생전에 출판되었고, 2권 “사회주의 비판” 과 3권 “경제학의 역사” 는 그의 사후에 엥겔스를 비롯한 사람들의 주도하에 정리되고 출판되었다.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다루는 내용은 크게 세가지이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의 의미와 생성 과정, 그리고 잉여 가치와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다룬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아마 이 부분이 마르크스의 <자본> 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노동에 의한 잉여 가치의 축적을 현실에서의 노동 문제와 연결시키고, 이것이 계급간의 갈등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적시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적 토대를 공고히 하려는 노력에 버금갈 정도로 그 당시 열악했던 노동 문제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 힘을 쏟는다. 그의 눈에 비친 생산 과정에서의 노동자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사회적 문제였을 것이고, 그는 천재적이고도 명쾌한 분석으로 계급 투쟁을 위한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2010년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에 여전히 동의를 하는 것은 분명 멍청한 짓일 것이다. 그의 이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반박을 받아 왔고, 마르크스 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부분에서 수정이 되어 왔다. 더이상 그의 이론은 신선하지도 않고 이론저으로 냉철하지도 않다. 그는 때로는 감정에 치우쳐 현실을 호도하기도 하고, 불합리한 가정을 앞세워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현대 경제학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들도 그의 책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심지어 당대의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상식들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자본> 은 확실히 낡았다. 때문에 만약 누군가가 아직도 마르크스와 <자본> 을 들먹이며 노동 운동을 하려고 한다면 그는 아주 멍청하거나 아주 미련한 사람일 것이다. 현대의 노동 운동은 반드시 새로운 패러다임 아래에서 다시 설계되어야 하며 최소한 현대 맑시즘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기존 맑시즘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고 있는지 정도는 살펴 봐야 한다. 마르크스가 주창한 노동 문제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 울림의 폭은 여전히 크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그토록 주장했던 것처럼 이론적 토대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정치적 주장은 공허하고 나약하다. 나는 과거 노동 운동 혹은 학생 운동을 했던 나의 선배들중 몇명이나 이 <자본> 을 정독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이 그 시대에 어떤 수준 이상의 신념이나 믿음을 가질 정도의 단단한 이론적 토대는 더이상 이 책에 없다. 나의 선배들중 몇명이 마르크스-레닌 주의에서 탈출했는지, 혹은 그것을 극복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많은 이들이 <자본> 을 읽기를 희망한다. 마르크스는 아마도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경제학자였을 것이다. 그는 아주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심장이 어리석어 보이지 않게끔 해주는 냉철한 머리도 가지고 있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일개 대학원생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논리적 오류들이 가득한 이 책은 그래서 아직 매우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고 여전히 토론되어야 한다. 우리가 공부를 왜,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rongkiller 2013-05-1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날까지 여전히 마르크스에 동의를 하는 것이 왜 멍청한 짓인지, 또 일개 경제학 대학원생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논리적 오류들은 무엇인지...
혹시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따지는 게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질문을 드립니다. 내키지 않으면 답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이가없다 2014-07-13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을 발로 읽지 않는한 쓸수 없는 리뷰다. 아니, 진짜 읽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맑스와 <자본>을 들먹이며 노동운동을 하려한다면 멍청하거나 미련한 사람이란다. 나는 이 말을 리뷰어에게 반대로 되돌려주고 싶다. 맑스와 <자본>을 읽지 않고 노동운동을 하려는 사람은 정말 멍청이거나 미련한 인간일 것이라고. 바로 오늘 이 시대,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폭압적 공세가 극도에 달한 이 시대의 이 한국땅에서 <자본>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책이고 가장 새로운 책이다.
하나 더. 맑스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경제학 '비판자'다. 맑스는 전공이 철학이며, 스스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자신의 임무로 여긴 사람이다. 근데 맑스더러 인간에 대한 근본적 애정을 가진 마지막 '경제학자'란다. 리뷰어가 애지중지하는 '현대 경제학(다시 말해 부르주아 경제학)', '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상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바로 맑스의 의도이고 <자본>의 진정한 의의인 데도 말이다.
도대체 리뷰어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나 알고서 리뷰를 썼는지 궁금하다. 그냥 개나소나 다 떠드는 맑스와 <자본>에 대해서 자기도 한마디 지껄이는 것으로 알량한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의도였는지. 그렇다 하더라도, 이 리뷰는 너무 졸렬하고 멍청하며, 리뷰어는 너무 무식하다.
 
일반언어학 강의 현대사상의 모험 18
페르디낭 드 소쉬르 지음, 최승언 옮김 / 민음사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생전에 강의한 내용을 그의 제자들이 강의 노트를 기반으로 편집한 책이다. 이 고전에 대해 비전문가인 내가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전공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므로 책에 대한 감상은 생략하는 쪽을 택하겠다. 다만 이 책이 갖는 의의와 상징성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 있음을 안다면 세상이 약간은 달리 보일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이 책에는 랑그/파롤, 시니피에/시니피앙, 공시성/통시성 같은 아주 유명한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쉬르의 천재적이고도 직관적인 개념들은 이후 구조주의라는 거대한 사조의 원형이 되고, 철학, 미학, 기호학, 사학, 인류학, 사회학, 그리고 수학과 건축학등 거의 모든 학문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책에서 소쉬르는 현대의 주요 개념들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이 책에서 단지 언어학만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대의 거의 모든 개념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아마 소쉬르를 한번쯤 건드리게 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사상은 어마어마한 파생 능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소쉬르의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당시 한길사에서는 ‘한길로로로’ 라는 시리즈를 내 놓았는데, 이 시리즈는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의 생과 사상을 한권의 책으로 간략하게 엮은 일종의 소개서였다. (지금 알라딘에서는 55개의 책들이 이 시리즈내에서 검색된다) 기본 지식이 거의 없는 나같은 학생에겐 참 유용하고 친절한 개론으로 기능했고, 여기서 소쉬르를 처음 만났다. 당시에는 별다른 충격없이 넘어갔는데 이유는 소쉬르에 대한 소개서를 읽은 이유가 단지 따분한 고등학교 야자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후 대학교에 올라가 도서관 철학 코너에 자주 들르게 되면서 소쉬르를 다시 접했고, 그제서야 비로소 대단히 큰 충격을 받게 됐다. 내가 알던 언어 체계가 산산히 분해됨과 동시에 사회, 문화적 컨텍스트도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게 됐다. 이후 푸코나 데리다, 들뢰즈같은 구조주의의 마지막 세대들에게 큰 지적인 수혜를 받았다. 지금까지도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고 관찰할 때 나는 소쉬르의 영향을 받는다. 구조주의는 이제 한물 갔 – 다고들 얘기하 – 지만, 그들의 방식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얼마전 방문한 통영에서의 긴 수다 도중 잠시 나의 과거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퍼뜩 이 책이 생각나 이후 서울로 올라와 책을 구입했고, 이제서야 읽을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뉴요커들 사이에서 가장 핫하다는 인도계 미국인 줌파 라히리의 최신작 <Unaccustomed Earth> 의 한국어 번역본을 읽었다. 한국에서 만난 친구분이 추천겸 선물을 해주셨고, 그래서 끝까지 읽었다. 다른 말로 하면 만약 선물을 받지 않은 책이었다면 끝까지 읽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이유는 단지 번역때문이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참 성의가 없다. 번역은 직역이 아니다. 그런거라면 대학생 정도면 누구나 번역 시장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영어를 능숙하게 한다고 해서 번역을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언어 능력은 기본이다. 문학은 언어가 아니다. 번역은 문학의 일부이고, 때문에 기본적인 문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하며 문장력 또한 뛰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번역은, 원서를 읽는 이와 번역본을 읽는 이가 번역의 차이로 인해 다른 해석을 할 여지를 없애야 한다. 이건 치열한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단순히 문장 by 문장으로 옮긴다고 해서 번역 작업을 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단편집의 한국어 번역본은 그런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단순한 문법에서의 실수나 어처구니없는 역주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아무튼, 번역에서 느껴진 분노를 잠시 뒤로 접어 두고 이 책 자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이 단편집은 꽤 읽을 만 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트랜디한 베스트셀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미덕들은 모두 가지고 있을 뿐더러, “오바마 시대” 에 어울리는 시대성과 사회성까지 갖추고 있다. 이 단편집의 키워드를 나열해 보면 조금 더 명확히 보인다. 인도계 이민 2세, 뉴잉글랜드, 보스턴, 인종간 결혼, 부모와 자식, 형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MIT, 박사 학위 이상의 전문직… 이 책은 영민하다. 타겟 독자층이 명확하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들을 유려한 필체로 풀어낸다. 현대 사회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관계들에서 오는 정의내리기 힘든 불명확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몇몇 단편은 눈이 부실 정도다. 특히 처음 두 편, “길들지 않은 땅” 과 “지옥-천국” 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관찰자적인 시선에서 한 사람의 마음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지점을 에리하게 잡아 내고 그 지점에서 감동을 이끌어 내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내가 동의하는 부분은 여기까지다. 이 단편집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그건 이 소설이 의도한 불편함은 아니었다. 난 이 단편집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줌파 라히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녀는 바나드 대학을 졸업하고 이민 2세의 신분으로 문학을 전공하기 위해 보스턴 대학에서 8년동안 수학하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하버드, MIT, Tufts, Boston College 같은 명문대학들이 즐비한 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그가 가질 수 밖에 없었을 열등감과 컴플렉스가 단편집 여기 저기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엄청난 교육열과 놀라운 적응력으로 미국내에서 중국인 사회와 함께 확고한 하나의 계층으로 자리잡은 인도인 사회, 그 중에서도 명문대에 자녀들을 진학시키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산층 이상의 인도인 가정을 배경으로 삼는 그녀가 바라보는 “낙오된” 자들에 대한 시선은 대단히 보수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따뜻한 척 하지만 그건 위선일 뿐이고, 사실은 측은함과 동정심이 저변에 깔려 있는 계급적인 시선이다. 단편들을 읽다 보면 “내가 뉴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인도인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에 진학하지 못하면 쓰레기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마치 상위 10%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다행히도 낙오되지 않은, 역시 중산층 이상의 뉴요커들일 것이다. 혹은 그러한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거나,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안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어짜피 자신들은 줌파 라히리, 혹은 그녀의 분신들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할테니까 말이다. 이건 라히리 본인이 부수고 나올 수 없는 한계이고, 그녀는 아마도 앞으로 계속 이런 식의 글들을 써내려 갈 것이다.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고 책은 잘 팔려 나갈 것이다. 내가 이 단편집의 많은 부분에 공감했다면 당장 서점으로 가서 영문판을 구입해 번역본과 비교해 읽으며 “번역 진짜 엉망이군” 하며 하나 하나 조목 조목 따져볼 것이다.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집 (어제 서점에서 그의 단편집들을 모아 놓은 Collection 을 발견했다) 을 주문해야 겠다. 이 사람이야 말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옳은” 시선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은 남아프리카 출신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1950년작이다. 영어 원제는 <THe Grass is Singing>. 남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메리라는 한 여자가 서서히 붕괴해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도리스 레싱의 첫 장편이자 출세작이기도 하다. 그녀는 1962년작 <황금 노트북> 으로 20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한두마디로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또 그만큼 대담하다. 하나 하나 짤막하게나마 건드려 보고자 한다.


소설은 메리라는 한 여인이 살해당한 현장에서 시작한다. 소설의 첫 장은 이 여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묘사하는 데에 할애된다. 타자성. 주변들의 시선은 메리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이끄는 중요한 기제다. 그녀는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는 성인 여성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그녀를 조급하게 만들고, 결국 그녀로 하여금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결혼을 하게끔 만든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타자의 시선때문에 강요받게 되는 여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타자성은 소설의 뒷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하게 묘사된다. 찰리 슬래터 부부는 메리와 그녀의 남편 리처드의 유일한 백인 이웃이자 메리 부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자성이 구체적으로 발현된 실체이기도 하다. 슬래터 부인은 메리의 오만한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찰리는 메리때문에 리처드가 파멸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슬래터 부부의 메리에 대한 이러한 혐오감은 주변 백인 사회에도 자연스럽게 전파되고, 메리는 육체적인 죽음전에 이미 사회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메리가 정신적으로 붕괴되는 중요한 원인들중 하나는 리처드의 경제적 무능함이다. 그는 땅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경제적인 이득으로 바꾸는 능력은 거의 없는 인물이다. 메리는 그의 가난함을 증오하고 혐오하지만 여성이 가진 남성에 대한 사회적 열위때문에 적극적으로 남편에게 항의하지 못한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흑인 하인들에게 풀기 시작한다. 어쨌든, 리처드는 땅을 사랑하지만, 결코 땅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이 일방적인 구애가 비극의 원천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는 땅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에게 닥친 가난은 불행의 결과라고만 믿었다. 그는 매우 보수적이고 철저하게 전통을 따르는 전형적인 남성이다. 그는 메리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해야 했기에 메리를 찾아 냈다. 전형적인 남성성에 대한 공격적인 분위기가 이 소설의 다른 한 축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사랑한 ‘땅’ 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땅, 대지, 혹은 자연 그 자체는 이 소설의 다른 주인공이다. 소설의 무대이자 소설속 주인공들이 삶을 결정짓는 절대자이기도 하다. 메리는 땅을 혐오한다. 그녀는 그 땅에 사로잡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리처드를 증오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계절이 없는” 도시에서의 삶에서 멀어지게 한 땅 그 자체에 분노한다. 그녀는 건물안에 틀어 박혀 타이핑하며 돈을 벌고 수백편의 영화를 보며 중독적으로 소설을 읽는 삶을 사랑했지만 결코 그러한 삶속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잃게 된 이유가 남편이 사랑하는 대지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러한 자연에 대한 반감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이끄는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흑인 역시 싫어했기 때문인데, 이 소설에서 흑인은 자연 그 자체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리는 남편과 땅에 대한 증오를 풀 대상으로 흑인 하인들을 택한다. 그녀는 하인들을 신경질적으로 대하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며, 습관적으로 하인들을 갈아 치운다. 그녀는 흑인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늘 멸시하고 무시하는데, 정작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 그녀의 정신이 거의 붕괴되어 가는 시점에서는 흑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녀의 마지막 하인인 모세는 건장한 체구를 가진 남성으로 원초적인 매력을 뽐낸다. 그는 교회에서 교육받았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알며, 파멸해 가는 메리를 돌봐 주려고 한다. 메리는 흑인에게 돌봄을 당한다는 것 자체를 수치스러워 하며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만, 결국 모세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그토록 혐오하는 흑인, 혹은 대지 그 자체에 굴복당한 후의 메리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가치조차 상실하게 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또다른 주제는 계급문제다. 백인과 흑인간의 계급뿐만이 아니라 남아프리카 사회 내부에서의 백인간의 계급 문제까지 건드린다. 찰리 슬래터 부부는 성공한 백인 사업가이고, 이들이 무너져가는 리처드에게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유는 “같은 백인이 흑인 수준의 가난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이다. 리처드는 항상 찰리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지만, 결국 그토록 사랑하는 땅을 포기하면서까지도 찰리의 제안을 받아 들이는 건 그가 태생적으로 백인이기 때문이다. 백인 사회에서 살아 남아 생존하기 위해서는, 생명과도 같은 땅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도리스 레싱은 이 모든 – 어찌 보면 – 거대한 이슈들을 한 여성의 인생에 대한 짤막한 묘사를 통해 정확하고도 직선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이 모든 주제들은 어떻게 한 여성이 붕괴되어 갔는지를 설명하는 도구들이기도 하다. 메리가 붕괴되는 과정은 작품의 마지막 장을 남겨 놓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대략 이런 이런 과정을 통해 이런 식으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라는 정도로만 기술될 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장은 그 전까지의 서술 방식과 매우 다른 형식으로 쓰여진다. 마치 위타세라쿤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초현실적인 그녀 내부의 시선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읽는 내내 섬뜩한 느낌까지 들 정도로 그녀가 정신적으로 파멸한 상태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몇 문단에 이르러 흑인 하인 모세의 시선으로 갑자기 바뀌는데 여기서 약간의 심리적인 반전이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이 소설의 주인공은 대지 그 자체이고, 이 소설의 제목은 <풀잎은 노래한다> 임을 상기하자.


또하나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소설은 앞서 기술한 대로 1950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영국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부여된 것은 1928년이다. 1948년 시작된 아파르트 헤이트는 1993년에 이르러서야 종말을 맞이했고, 1967년 전까지 미국의 남부 17개 주에서 다른 인종간의 결혼은 법적으로 금지된 상태였다. 미국에서조차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건 90년전이다.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최근까지도 상당히 불평등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겠지만. 도리스 레싱은 영국에 정착한 뒤 공산당에 가입했고 헝가리혁명 이후 당을 탈퇴했다. 두번의 이혼을 경험했고 레싱이라는 성은 두번째 남편의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녀는 200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