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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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요커들 사이에서 가장 핫하다는 인도계 미국인 줌파 라히리의 최신작 <Unaccustomed Earth> 의 한국어 번역본을 읽었다. 한국에서 만난 친구분이 추천겸 선물을 해주셨고, 그래서 끝까지 읽었다. 다른 말로 하면 만약 선물을 받지 않은 책이었다면 끝까지 읽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이유는 단지 번역때문이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참 성의가 없다. 번역은 직역이 아니다. 그런거라면 대학생 정도면 누구나 번역 시장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영어를 능숙하게 한다고 해서 번역을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언어 능력은 기본이다. 문학은 언어가 아니다. 번역은 문학의 일부이고, 때문에 기본적인 문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하며 문장력 또한 뛰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번역은, 원서를 읽는 이와 번역본을 읽는 이가 번역의 차이로 인해 다른 해석을 할 여지를 없애야 한다. 이건 치열한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단순히 문장 by 문장으로 옮긴다고 해서 번역 작업을 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단편집의 한국어 번역본은 그런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단순한 문법에서의 실수나 어처구니없는 역주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아무튼, 번역에서 느껴진 분노를 잠시 뒤로 접어 두고 이 책 자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이 단편집은 꽤 읽을 만 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트랜디한 베스트셀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미덕들은 모두 가지고 있을 뿐더러, “오바마 시대” 에 어울리는 시대성과 사회성까지 갖추고 있다. 이 단편집의 키워드를 나열해 보면 조금 더 명확히 보인다. 인도계 이민 2세, 뉴잉글랜드, 보스턴, 인종간 결혼, 부모와 자식, 형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MIT, 박사 학위 이상의 전문직… 이 책은 영민하다. 타겟 독자층이 명확하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들을 유려한 필체로 풀어낸다. 현대 사회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관계들에서 오는 정의내리기 힘든 불명확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몇몇 단편은 눈이 부실 정도다. 특히 처음 두 편, “길들지 않은 땅” 과 “지옥-천국” 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관찰자적인 시선에서 한 사람의 마음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지점을 에리하게 잡아 내고 그 지점에서 감동을 이끌어 내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내가 동의하는 부분은 여기까지다. 이 단편집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그건 이 소설이 의도한 불편함은 아니었다. 난 이 단편집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줌파 라히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녀는 바나드 대학을 졸업하고 이민 2세의 신분으로 문학을 전공하기 위해 보스턴 대학에서 8년동안 수학하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하버드, MIT, Tufts, Boston College 같은 명문대학들이 즐비한 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그가 가질 수 밖에 없었을 열등감과 컴플렉스가 단편집 여기 저기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엄청난 교육열과 놀라운 적응력으로 미국내에서 중국인 사회와 함께 확고한 하나의 계층으로 자리잡은 인도인 사회, 그 중에서도 명문대에 자녀들을 진학시키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산층 이상의 인도인 가정을 배경으로 삼는 그녀가 바라보는 “낙오된” 자들에 대한 시선은 대단히 보수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따뜻한 척 하지만 그건 위선일 뿐이고, 사실은 측은함과 동정심이 저변에 깔려 있는 계급적인 시선이다. 단편들을 읽다 보면 “내가 뉴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인도인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에 진학하지 못하면 쓰레기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마치 상위 10%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다행히도 낙오되지 않은, 역시 중산층 이상의 뉴요커들일 것이다. 혹은 그러한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거나,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안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어짜피 자신들은 줌파 라히리, 혹은 그녀의 분신들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할테니까 말이다. 이건 라히리 본인이 부수고 나올 수 없는 한계이고, 그녀는 아마도 앞으로 계속 이런 식의 글들을 써내려 갈 것이다.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고 책은 잘 팔려 나갈 것이다. 내가 이 단편집의 많은 부분에 공감했다면 당장 서점으로 가서 영문판을 구입해 번역본과 비교해 읽으며 “번역 진짜 엉망이군” 하며 하나 하나 조목 조목 따져볼 것이다.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집 (어제 서점에서 그의 단편집들을 모아 놓은 Collection 을 발견했다) 을 주문해야 겠다. 이 사람이야 말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옳은” 시선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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