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문학동네, 2010년, 1판 2쇄.


1982년 발표된 루마니아 출신 작가 헤르타 뮐러의 단편 소설집인 이 작품은 그녀의 데뷔작이다. 발표 당시 검열 당국에 의해 강제적인 편집과 삭제가 이루어졌고, 이후 독일에서 다시 출판되었을 때에도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2009년 뮐러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뒤 이 책에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고, 문학동네를 통해 한국에 소개된 이 책은 세개의 단편을 되살린 복원판을 토대로 번역되었다.


중편 정도에 해당하는 표제작 “저지대” 가 책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고 짤막한 단편들이 앞뒤에 배치되어 있는 형식이다. 이 데뷔작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강렬하고, 더 직관적이며, 더 시적이고 극단적이다. “저지대” 에는 흔히 말하는 서사 구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상관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그리 큰 호응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대단히 초현실적이며, 그러한 단어들을 통해 당시 루마니아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 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 역시 분위기와 흐름은 비슷하다. 각 문장은 굉장히 함축적으로 씌어 있어서 한번 읽어서는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는지 언뜻 알아 차리기 어려울 정도다. 당시 극심했던 검열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짐작할 수도 있지만, 책의 뒷편에 함께 자리한 노벨 문학상 수락 연설을 읽어 보면 그녀가 사용한 단어들과 문장들이 결코 그러한 현실적인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녀의 다른 작품 <숨그네> 의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녀는 새로운 낱말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작품속에서 창의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익숙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을 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고 다시 이를 이용해 상이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문장들을 병렬시켜 독특한 세계관을 창조한다. 예들 들자면 집안일에 찌든 어머니의 성긴 표정과 하늘 위를 떠다니는 어린 소녀의 심리 상태를 마치 동시에 한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양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이 작품에서 천착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당시 사회상에 대한 강한 비판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잔뜩 짓눌렸던 일반 대중들의 삶과 그 삶속에 깊이 자리잡은 어떤 공동 무의식같은 것을 발견하고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단편들에서 간접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묘사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단편들은 당시 루마니아 사람들의 건조한 일상을 그녀만의 언어를 통해 묘사하는 데에 치중한다. 그들의 삶은 단순히 절망적이고 신경질적이며 고단하다는 정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느껴진다. 단순히 억압당하는 피지배자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지치고 힘든 내면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타인에 대해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서로간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결핍된 모습에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한 사회내에 존재하는 인간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뮐러의 작품이 강렬한 이유는 작중 화자의 시선이 종종 초현실적인 모습을 띄며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황홀하게 비추기도 한다는 점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문장들이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는 말이 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받아 들이기 힘든 묘사들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다. 이 기묘한 체험은 희망이 전혀 없는 한 동네에 문학적 묘사를 통해 희망의 힘을 불어 넣는 기능을 한다. 일종의 기적과 같은 체험이다. 비록 현실은 여전히 고단했고 뮐러는 결국 루마니아에서 독일로 망명했지만, 최소한 그녀가 쓴 글안에서 그녀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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