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삶으로 사람은 인생의 반을 채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은 아마 인간에게 먹는 일련의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게 만듦으로써 일상을 채워나가길 원한것일까. 엄마로서 그런 일상을 보내는 작가의 글에 하루의 소소한 식사가 담긴다. 무엇을 먹고 사는 행위에 오늘을 산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새삼스레 다시 바라본다. 엄마가 정성스레 준비해준 밥을 꼭꼭 씹어내듯 작가의 문장을 나는 되새김질하듯 눈으로 받아들인다. 그 속에 따스하게 담긴 사랑과 애정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나는 오늘의 영양분을 듬뿍얻고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기운을 얻는것이다.
원제인 “안락사에 이른 일본인”을 오해하게 할만큼 “조력자살”이라는 타이틀의 범위가 조금은 어긋나보였다. 작가 자신이 한 챕터를 할애하여, 조력자살이라는 용어의 뜻을 suicide 에서 death 로 순화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할 정도로 언어의미에 큰 조심성을 드러내는데 비하여 역자의 의도는 작가의 의중에 세심함을 더하지 못하였다. 책을 읽으며 나에게는 안락사의 개념 자체가 사람들에게 화두되지 못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만큼 작가가 경험한 현실이 더 무겁고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죽음을 얘기하지 않는 현실에서 늘 잘 살아갈 생각만할 뿐이었지, 잘 죽어야 하는 고민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 모두에게 언급해서는 안되는 터부가 되었음을 느낀다. 사람들은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가. 자살이 주는 불쾌한 사건을 개인적인 사생활로 치부할 뿐 우리는 정면으로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려 시도하였던가? 그들이 선택사항에서 배제된 항목으로 안락사를 택하지 못함은 분명 의도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삶에 대한 배신감을 던진다. 삶을 마주하는 것과 동일하게 죽음을 마중하지 않으면 과연 인간으로써 어떤 의미로 시간을 보낼수있을까. 이 책을통해 나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녀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간 죽음을 경험했다. 쉬이 느낄수 없는 삶의 무게에대해 고민하고 앞으로 어떤 것을 생각할지, 그리고 타인의 존재와 남겨진 삶과 이어진 관계에 대해 나는 어떤자세를 취해야할지 고민과 질문이 뒤섞인 마음이 가득했다. 잘 살아가는 것 이상으로 잘 죽음을 맞이하는것 무엇보다 내게는 크게 다가온 삶의 의미로 되새길 필요를 느꼈다.
작가의 성품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과연 내가 생에서 언제 1923년생의 어른과 대화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겠는가. 조금 더 살아보았기에 인생이 어떠했다는 얘기를 전해주려던 작가는 삶을 덤덤히 전했다. 그것은 정의도 아니고 교훈도 아니며, 지침도 아니었지만 나는 스스럼없이 그렇게 살아간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에 앞으로 남은 나의 생을 빗대어보게 된다. 이미 작가는 작고한지 오래되었으나 그의 글은 여전히 살아남아 현재를 사는 사람을 만난다. 거창한 미래를 예견하고 눈앞의 목적에 현혹되어 온 마음을 쓰는 현실로 부터 벗어나서, 나는 진정으로 차분한 마음가짐을 챙긴채 스스로를 다독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재차 마음을 다잡는다.
글이 난해해서 쉽게 읽기어렵다는 타인의 후기를 들었다. 직업인으로서의 디자이너는 어떤 생각을 하고있는지 일을 마주함에 있어, 하루를 채우는 생활에 있어 나는 작가를 통해서 문득 나의 모습을 빗대어 보게 된다. 자신을 잃지않고 나를 믿고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은 결코 특정직업에 한해서 어려운 일은 아닐터. 그렇기에 조금은 타인에게 날카롭게 파고들며, 때로는 예민하고 세심한 어려운 존재로 보일 수도 있겠다. 작가의 글도 그러했다. 스스로를 지켜내기위해, 내가 온전히 나로써 존재하기위해 최소한으로 막아내는 방어막처럼 나는 그의 글을 읽었다. 우리는 아마 똑같은 한국말을하고 소통을하는데, 말의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고있는 의도와 정서, 감정의 균형은 사람에 따라 미묘하고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것처럼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애매한 경계에 있어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지키고자한 오늘에 아마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은 아닐런지.
대단한 사람이 대단한 삶을 살며 대단히 과분한 조언을 해준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지 아닐지는 본인들이 처한 상황에 빗대어 세심하게 살펴보면 될터이다. 자본주의 삶에서 숫자로 서열화한 우월성을 부정할 길은 없으나, 맹목적인 탐닉에 빗댄 목적성이 내게는 꺼림직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것을 보면 나는 아직 분명한 내 길을 감지할 수 있나보다. 타인의 조언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타자의 삶이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듯이 모든 상황이 단편적으로 평가절하 될수 없을 터이다. 다만 그 상황이, 해결책이 내게 동일하게 적용될지 아닐지는 내가 결정함에 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