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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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이 선선한 어느 오후, 야외에서 바비큐를 즐긴 사람의 바비큐 맛 예찬은 조금쯤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비록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바비큐의 '맛'일 뿐일지라도, 거기에는 '야외'라는 공간이 가져다 준 행복감이 적잖이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 책 <제주걷기여행>에 대한 나의 평가 역시 조금쯤 가려 듣는 것이 나을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완도에서 제주도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 책을 제주도, 좀 더 정확하게는 '제주올레'와 도저히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아닌 게 아니라, <제주걷기여행>은 '제주올레'와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저자 서명숙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고 돌아와 자신의 후반부 인생을 '제주올레' 길을 만드는 데에 바치기로 결심하였고,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현재진행형의 과업에 얽힌 만만치 않았던 여정과 그 중간결과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단순한 여행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신념과 노력에 대한 감동적인 보고서이고, 동시에 '제주올레' 길을 포함하고 있는 제주에 관한 가장 내밀한 안내서이며, 또한 '걷기'라는 지극히 여유롭고 인간다운 행위를 향한 예찬서이기도 한 셈이다.

<제주걷기여행>이 '제주올레'에서 비롯된 만큼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단연 '제주올레' 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제주올레'를 통해 저자가 오랜 세월 반목하던 동생과 화해하고 동생이 가장 든든한 동지가 된 사연, 길을 찾아내고 잇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도움의 손길들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선하고도 감동적이다. 해병대의 병사들이 동원되어 4코스 조른모살 해안의 평탄화 작업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만만한 게 군인이지.'라며 잠깐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그 길을 '해병대 길'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그 길로 인해 그곳을 지나다니기 편해진 인근의 해녀 할망들이, 감사의 표시로 4코스 개장행사 때 유죽을 올레꾼들에게 대접했다는 이야기에 금세 가슴이 짠해졌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잔잔한 바다를 바라다보곤 했다.

사실 이 책을 '떠난 길' 위에서 급히 사게된 것은, 그저 이제 내가 곧 걸을 '제주올레'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측면이 컸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이 책은 '제주올레'에 대한 안내와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코스가 정해지고 연결되는 과정에 관한 소소한 감동들을 아울러 담아내고 있었고, 하기에 제주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 내가 걸을 코스를 선정하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제주올레의 시작이자 말미오름과 알오름의 목장을 경유하는 1코스에 대해 읽으면 1코스가, 불운했던 천재화가 이중섭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2코스에 대해 읽으면 2코스가, 또 김수봉의 노고가 깃든 수봉로와 제주의 전통적인 배 '테우'가 있다는 3코스에 대해 읽으면 3코스가, 그러다가도 송악산 절경을 둘러 볼 수 있는 6코스에 대해 읽으면 6코스가 못내 걷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1코스와 6코스를 걷고 돌아와, 나는 이 책을 마저 읽었다. 저자의 산티아고 순례기도 꽤 흥미로웠고, 제주도와 얽힌 사람 이야기와 먹거리 이야기도 나쁘지 않았다. '제주올레'를 걸은 사람들이 겪은 치유와 변화의 과정을 소개하는 부분은, 솔직히 여느 때의 나라면 어쩐지 너무 특별한 케이스를 골라 과장된 광고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직접 '제주올레'를 경험한 후의 나로서는 그게 그저 과장된 광고가 아니라 실제로 '제주올레'를 경험하며 느낀 행복의 한 유형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저자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려는 간절한 진심의 발로라는 것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 역시, 이제 '제주올레'와 이 책의 강력한 신봉자가 된 것이다.

미리 밝혔듯, 이 책에 대한 내 객관적ㅡ그래봤자 어차피 주관이 섞인ㅡ평가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제주올레'를 걸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행복감이, 진실로 '제주올레'의 길 위를 풍요롭게 감싸고 있었다고는 단호히 확언할 수 있다. 책 속에서 양희은이 이미 명쾌하게 결론내린 대로, '제주올레'는 정말이지, "죽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때가 되었든 '제주올레'는 필경 다양하되 한결같은, 평화롭고 넉넉한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놀며 쉬며 걸으려는 사람들을 기꺼이 반겨 맞아줄 것이다. 그러하니, 그 '죽이는 길'로 언제고 꼭 떠나 보시기를. 그리고 그 '죽이는 길'로 떠나는 와중에, 아마도 이 책은 대단히 유용하고도 즐거운 동행이 되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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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탱이 2008-10-2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죽이는 길'을 관광버스를 타며 다녔으니...잘 봤어요^^

Fenomeno 2008-10-21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다시 찾을 이유가 생긴 셈이지요. ^^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17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 지음, 김운찬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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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내가 책을 읽는다는 건 대체로 '오독'을 의미하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특히나 심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어야겠다.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는 본문만 따지자면 70여 페이지에 불과한 얇은 책이지만, 가장 집중이 잘 된다는 화장실에서 주로 읽었음에도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에, 과연 내가 지금 읽는 게 한글인지를 의심했던 적이 수차례일 정도였다. 하기는 이 책은 움베르토 에코가 스포츠, 특히 축구에 대해 여기저기에 썼던(분명 이탈리아어로) 글들에 대해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라는 이름조차 어려운 영국 사람이 기호학적 해석을 곁들여 분석했고(아마도 영어로), 이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니 어렵지 않다고 느끼는 게 비정상인지도 모르겠다(라는 건 어디까지나 오독에 대한 나의 변이다).

변명은 이쯤 해두고 기꺼이 오독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일단 움베르토 에코에게 있어 축구가 그리 우호적인 대상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아니, 엄밀히 말해 축구는 그저 축구 그 자체일 뿐이지만, "축구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이 행하는 것들이 지니는 미묘한 차이와 과잉"에 대해 에코는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다시 말하면, "스포츠는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축구는 스포츠다. 그러므로 축구는 좋은 것이다."로 끝나는 삼단논법과 달리, 에코는 스포츠로서의 축구가 아니라 축구가 매체에 의한 재현을 통해 사람들에게 지각되고 소비되는 양태와 관련되는, 즉 하나의 기호로서의 축구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다.

에코의 비판은 특히 훌리건이라고 칭할 만한 열성적인 팬들에게 신랄해지는데,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축구장을 찾는 팬들을 대리만족을 위해 매주 성교하는 커플들을 정기적으로 보러가는 관음증 환자에 비유한다. 그들에게 축구를 대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그들은 좌절된 섹스광처럼 축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에코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팬"과 "안티팬" 사이에 서로 '교감적 말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결과로 그들 사이의 대화는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능을 전혀 가지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한편, 스포츠를 직접 몸으로 즐기지 않는 팬들은 스포츠를 말함으로써 자신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고 혼동하며 무책임을 전제로 하는 '스포츠 잡담'에 손쉽게 참여하는데, '스포츠 잡담'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능을 가지지 못한 채 '공허한 논의'로 귀결되기 일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무용한 '스포츠 잡담'이 "정치적 논쟁에 대한 가장 손쉬운 대용품"이 되는 데 있다. 팬들은 재무부 장관이 하는 일을 판단하거나 의회기록을 검토하는 대신, 코치가 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거나 운동선수의 기록을 검토하는 데 집중하면서 '민주적 논쟁'에 참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결국 이것은 실제 정치적 부분에 시민이 개입할 가능성을 낭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축구는, "인민의 아편"처럼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축구ㅡ다른 프로 스포츠도 포함해서ㅡ에 대해 지니는 에코의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축구팬을 자처하는 한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록 에코가 '팬'과 '훌리건'을 구분하고 축구의 장점도 마지못해 인정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에코는 축구의 밖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 시절 자신의 축구 실력이 형편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는 에코의 고백이 순전히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축구를 제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겉보기와는 반대로, 팬이 된다는 것은 대리 만족이 아니며, 구경을 하느니 직접 축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닉 혼비의 말을 에코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축구팬의 입장에서 에코와 이야기하는 것 역시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다.

그러나, "축구경기가 열리는 일요일에 과연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에코의 물음은 축구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와 애정의 크기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기억되어야만 하는 경구다. 왜냐하면, 사실상 에코의 질문에서 방점은 '축구경기'가 아니라 '혁명'에 찍혀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축구팬과 안티팬 사이의 접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축구가 그저 축구가 아니라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축구가 모든 것이 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는 한은 말이다. 그러므로, '예외적 승인'으로서 인정되는 아편(물론, 축구가 아편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의 효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아편의 폐해를 경계해야한다는 당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구경기'의 뒤에 가리어지는 '혁명'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축구팬은 축구에 악의적이기까지 한 움베르토 에코와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뭐, 썩 내키지는 않겠지만.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 (중략) 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    

ㅡ김용택 <팔유팔파 中>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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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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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누구나 그런 '순간'들을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다. 진실을 말하는 대신 거짓을 말했던 순간, 용기가 필요했을 때 비겁하게 돌아선 순간, 우정을 외면하고 의리를 저버렸던 그런 순간들을. 그 중 어떤 순간들은 너무도 사소해서, 혹은 의식하지 못한 채 쉽게 잊혀져 버린다. 하지만 또 어떤 순간들은 끝내 잊혀지지 않고, 언제나 화인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며 때때로 뚜렷한 기억으로 떠올려지곤 한다. 그리고 그때 그 기억이 야기하는 건, 돌이킬 수 없는 회한과 부끄러움과 고통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부유한 가정의 아들 아미르와, 그 집 하인의 아들 하산은 각기 편부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아미르는 수니파인 파쉬툰인이고 하산은 시아파인 하자라인이지만,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 둘 사이에 그런 것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즐거웠던 어린 시절은 어떤 한 '순간', 정확히는 1975년 겨울의 어느 날, 연날리기 대회 때 일어난 아미르의 배신으로 인해 비틀어져 버리고 만다.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할게요."라던 하산의 순수한 우정을 아미르는 한순간 외면해 버린 것이다.

이후, 실 끊어진 연처럼 표류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아미르는 바바와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고, 거기서 만난 소라야와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바바)의 친구이자 어린 시절 자신을 깊이 이해해주었던 라힘 칸에게서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고, 아미르는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십수 년만에 돌아온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미르는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과 마주한다. 부족한 것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아프가니스탄이 유일한 세계였던 아미르에게 낯선 아프가니스탄은 마침내 '진실'을 보여준 것이다. 더불어 바바가 숨겨야 했던 '진실'까지도.

사실 이 책 <연을 쫓는 아이>의 배경인 아프가니스탄은 조금은 낯선 곳이지만, 정작 내용은 그리 낯설지 않다. 역자도 지적하듯이, 아프가니스탄인인 저자는 아프가니스탄의 아름답고 정겨운 소소한 일상과 풍습은 물론이고, 그 속에 자리한 부당한 편견과 비참한 현실 등 모든 것을 솔직하게, 그러나 한결같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소설 속에 생생히 묘사해 놓았고, 이로 인해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의 선명한 이미지를 수시로 구현해내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의 어떤 한 순간에 저지른 과오로 인해 고뇌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는 누구나 지니고 있을 법한 어두운 기억과 공명하며 조금은 무감각해진 상처를 살며시 건드리는 한편, 그러한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덕분이다.

소설 속 아미르의 여정은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을 넘나들며 장대하게 전개되고, 그에 걸맞게 책 분량은 꽤나 두툼한 편이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촘촘하게 연결되면서 어떤 부분에서도 방만하다거나 불필요한 느낌은 없고, 지루할 틈도 전혀 없다. 아주 어린 시절 아미르와 하산의 기억부터, 하산이 가장 좋아했던 '로스탐과 소랍' 이야기, 아내 소라야와의 결혼 과정, 그리고 아미르와 소랍(하산의 아들)의 만남까지 모든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곳곳에 부여된 암시와 의미를 찬찬히 따라가는 재미가 실로 기대 이상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용기'와 '치유'를 통해 '속죄'의 길로 나아가는 아미르의 인간적 '성장'에 거듭 감탄하고, 한없이 감동받으며, 적잖은 위로를 받게 된다.

어쩌면 어린 시절 아미르가 저질렀던 한순간의 배신은 그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바바의 거짓이 얽혀 있었고, 파쉬툰인과 하자라인의 뿌리 깊은 갈등이 설켜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유일한 한 가지는, 적어도 아미르는 그가 과오를 저질렀던 그 '순간'의 기억을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했다는 것이고, 바로 그런 이유로 아미르는 그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반면, 언젠가 하산이 이야기했던 '꿈'에 나오는 '괴물'은 '자신'의 대척점에서, 그러한 '순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과오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잔인하고 난폭한 아세프 같은.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과오'로부터 '회한'을 이끌어내는 것이야 말로, 실 끊어진 '연'을 향해 달려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연'을 손에 넣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적어도 마음대로 표류하는 '연'을 되돌리려는 '치유'일 테니까. 그리고 '괴물'이 아닌, '자신'이 되기 위한 '용기'일 테니까. 그리하여 '치유'와 '용기'로서 '연'을 좇아 천 번이라도 달린다면 '연'은 언제고 다시 날아오를 것이라고, 이 책은 가르쳐주는 듯하다. 마치 "삶이 언제나 계속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그러므로, 모든 것을 '용서'하라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결국 신이 용서할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신은 네 아버지와 나, 그리고 너 역시 용서할 것이다. 너도 그렇게 할 수 있길 바란다. 할 수 있다면 네 아버지를 용서하렴. 원한다면 나름 용서하렴.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을 용서하거라.  (p45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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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어제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올림픽 축구경기에서 나는 어차피 질거라면 내심 통쾌하게 지기를 바랐다. 그것은 이번 올림픽 축구 대표팀을 두고 "사상 최초로 메달권에 도전하는 올림픽 축구대표팀"이라고 말하는 게 나는 내내 불만이었고, 어제 MBC 축구 중계진의 편파적 멘트가 심히 불편했으며, 무엇보다도 어제 한국팀이 보여준 축구란 게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상, 이번 올림픽 축구 대표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소위 말하는 '드림팀'이 아니거니와, '역대 최강의 팀'과도 거리가 멀며, 더욱이 예선전을 통해 대단한 전력을 보여준 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메달권" 운운하는 유일한 이유는, 지금껏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역사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니까 딴은 틀린 말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그건 8강 토너먼트 진출도 버거운 현실에서 실로 섣부른 전망이자,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기본적인 성급함에 더해, 어제 MBC 중계진의 중계 역시 꽤나 불만이었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MBC의 강모 해설위원은 틈만 나면 상대선수를 깎아 내리는 악취미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본 대부분의 경우 그의 발언은 '화'를 불러왔다. 어제도 그는 비야레알 소속의 로시를 두고 "그리 빠르지 않아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선수"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로시는 한 발 빠른 움직임으로 이탈리아의 선제골을 넣었다. 게다가 비교적 공정해야 할 캐스터도 거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가령, 상대선수가 우리선수의 공을 뺏어서 우리선수가 넘어지면, "아, 반칙을 불지는 않습니다. 살짝 발을 건 것도 같은데요."라며 은근히 편파판정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을 했는데, 이런 건 정말이지 비겁하고 치사한 중계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제 보여 준 한국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는 그게 이탈리아의 기술적인 우위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가 싶어 자못 씁쓸하기조차 했다.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인 유벤투스에 적을 둔 지오빈코를 맞아 한국선수들은 시종일관 거친 태클로 그를 자극하려 했는데, 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그러나 164cm에 불과한 작은 키의) 선수가 거푸 쓰러지고 흥분해 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한국팀이 악당처럼 보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주장인 김진규가 그를 팔로 세게 밀쳐서 넘어뜨리는 장면이 압권이었는데, 그때조차 중계진은 김진규가 말려들면 안된다며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그런데, 그런 김진규가 나중에 쥐가 난 상대선수의 다리를 풀어주려고 하자, 그게 올림픽 정신이라고 칭찬하는 모습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면에서 뒤진 한국은 이탈리아에 0대3으로 완패했다. 하지만 낙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이탈리아 감독이 브라질을 피하기 위해 카메룬을 이기겠다는 발언을 한 것이 한국팀의 8강 진출에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 보는 기사도 있었다. 그리고 박성화 감독도 "온두라스를 상대로 다득점을 노리겠다."는 말로 화답했으며, 주장 김진규도 "아직 모든 것이 결정나지 않았다."며 8강 진출에 대한 의욕을 꺾지 않고 있다. 물론, 이탈리아가 카메룬을 잡는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온두라스에 몇 점차로 승리하느냐에 따라 8강 진출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탈리아의 승리와 한국의 승리를 가장 기본적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 기본 전제조차도 쉬운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막연한 낙관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이러한 막연한 낙관과 비교해볼 만한 좋은 예가 프랑스에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레퀴엠>은 프랑스 대표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포포투> 8월호 참조). 특히, <레퀴엠>의 편집장은 "프랑스가 우승하면, 내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극언을 하기도 했는데,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대로 프랑스의 우승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레퀴엠>은 1면 전체에 사과문을 게재했다고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레퀴엠>은 틀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당시 프랑스 국가 대표팀의 위태로운 행보에 대한 거침 없고 냉정한 평가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망이란 건 당연히 틀릴 수 있지만, 적어도 손가락 하나 정도는 걸 수 있을 만큼의 무게와 확신이 <레퀴엠>에게는 있었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까놓고 말해서, 내가 감히 내 손가락 하나를 걸고 한국 올림픽 대표팀의 성적에 대해 전망한다면, 나는 이전이라면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메달권 탈락', 그리고 지금이라면 '8강 진출 실패'를 선택하겠다. 그건 물론 틀릴 수 있고,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틀리기를 바라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내 손가락이 잘리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메달에 도전하겠다."고 말한 박성화 감독이 전적으로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의 도전적인 발언의 진의와, "메달 도전"이 당연한 듯 그것을 확대, 재생산시킨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태도에는 거기에 과연 '손가락 하나' 정도의 무게는 지닌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굳이 8강 진출에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한국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전망과 분석이 좀 더 현실에 기반하여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꿈'과 '희망'을 품는 것은 좋고 또 필요한 일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보다 객관적으로 우리의 전력을 재평가하는 일과, 그로부터 냉정하고 장기적인 앞으로의 전망과 비전을 끌어내는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 여전히 낙관적인, 근거 없는 장미빛 전망에만 의존한다면, 감히 내 손가락 하나를 걸고 말하건대(이건, 그러니까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무시무시한 발언은 아니다) 한국축구는 언제나 "사상 최초의 메달"만을 노려야 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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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기현의 소속팀인 풀럼이 어제 울산을 찾아왔다. 사실 설기현은 지난 시즌 풀럼의 팀 운영에서 거의 배제되었다시피 했고, 풀럼도 지난 시즌 막판까지 가는 치열한 강등경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을 뿐인 팀이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설기현이라는 '이름'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는 '간판'은 결코 간단히 무시해버릴 만한 게 아닐 터였다. 게다가 지난 시즌 막판에 특히 빛을 발했던 지미 불라드의 플레이를 나는 꼭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러 영국에 직접 가지는 못할지언정, 그 프리미어리그 팀이 이곳 울산까지 와주었는데 보지 않는다는 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될 게 명백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어제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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