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현의 소속팀인 풀럼이 어제 울산을 찾아왔다. 사실 설기현은 지난 시즌 풀럼의 팀 운영에서 거의 배제되었다시피 했고, 풀럼도 지난 시즌 막판까지 가는 치열한 강등경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을 뿐인 팀이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설기현이라는 '이름'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는 '간판'은 결코 간단히 무시해버릴 만한 게 아닐 터였다. 게다가 지난 시즌 막판에 특히 빛을 발했던 지미 불라드의 플레이를 나는 꼭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러 영국에 직접 가지는 못할지언정, 그 프리미어리그 팀이 이곳 울산까지 와주었는데 보지 않는다는 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될 게 명백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어제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 외적인 불만
먼저 경기 외적인 부분을 좀 지적하자면, 어제 경기의 입장료 체제는 거의 우롱에 가까웠다. 나는 풀럼이 울산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3만원으로 책정된 VIP석을 사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알아보니 VIP석은 본래 일반석 중에서 1층을 그저 VIP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본래 VIP석은 R-VIP석이라고 해서 5만원에 팔았는데, 도대체가 VIP석이면 VIP석이고, ROYAL석(아마도 R의 의미가 이게 아닐까 싶다)이면 ROYAL석이지 ROYAL-VIP석은 또 뭐란 말인가. 그래놓고 본래 골대 뒤편의 좀 더 싼 서포터석은 역시 일반석 가격을 받는다는 건 정말로 짜증나는 일이다. 나는 이걸 알고 그냥 일반석을 사서 들어갔는데, 아마도 모르고 으레히 일반석을 사셨을 아저씨들이 일반석 1층으로의 접근이 안내요원에 의해 제지되자 그 분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을 나는 몇 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좌석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좌석에는 하나 같이 먼지가 잔뜩 쌓여 있어서 도저히 그냥 앉는다는 게 불가능했다. 다행히 주변에서 신문지를 건네주셔서 신문지를 깔고 앉았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물론, 요즘은 집에서도 하루만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먼지가 제법 쌓인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건 내가 볼 때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최소한 R-VIP석이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을 창조해낼 아이디어라면, 좌석에 앉은 먼지(라기보다 모래에 가까운)를 해결할 방법쯤은 손쉽게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현영민과 이진호의 분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단 울산의 초반은 나쁘지 않았다. 3-5-2 전형으로 경기에 나선 울산에서는 현영민과 이진호가 가장 돋보였는데, 이미 러시아 무대를 통해서 유럽리그를 경험했던 현영민은 경기 내내 자신감 있는 태도로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고, 결국 멋진 크로스로 전반 20분쯤 이진호의 선취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던지 한번은 울산진영에서 상대 공격수를 상대로 두어 번 개인기를 보이기도 했는데, 그러자 관중석에서 바로 무시무시한 질책이 쏟아졌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뭐, 개인적으로는 그리 화낼 것까지는 없어 보였지만.
이진호의 경우에는 골도 골이려니와 움직임이 좋았다. 과감하게 풀럼 수비진을 돌파하기도 하고, 동료들에게 공을 내주기도 했고, 수비 가담도 괜찮아 보였다. 후반에도 한 차례 김영삼의 크로스를 멋진 다이빙 헤딩슛으로 처리했는데, 비록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고, 그게 아니라도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긴 했었지만, 확실히 칭찬할 만한 움직임과 마무리였다. 게다가, 선취골 이후 텀블링 세리모니는 팬들에게 확실한 서비스를 선사하면서 환호를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울산의 문제는 언제나 선취득점 이후이다. 3명의 미드필더를 이용해 중원을 장악하려 했던 울산은 전반에는 대니 머피의 유연함에, 그리고 후반에는 그와 교체해서 나온 지미 불라드의 역동성에 밀려 크게 수적 우위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는데, 그건 특히 공격적인 면에서 그러했다. 기껏 울산이 역습 찬스를 맞았더라도 중원에서 공격진으로 적극적으로 오버래핑을 나가주는 선수가 없어서 울산의 역습은 언제나 허망하게 날려버리기 일쑤였다. 특히, 그나마 공격의 첨병 역할을 부여받았던 브라질리아는, 이진호와 투톱을 이룬 루이지뉴와 동선이 겹치면서 공격에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공격의 부진은 필연적으로 울산의 위기를, 풀럼의 기회를 야기하게 마련이다.
풀럼의 반격, 그리고 설기현
4-4-2 전형으로 나선 풀럼은 전반에 다소 고전했다. 울산의 강력한 수비에 막혀 공격의 활로를 열어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진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주장 완장을 차고 나온 대니 머피의 유연한 움직임은 칭찬할 만했다. 밑으로 내려와 볼을 받아주고, 적극적으로 공격적인 전진패스를 시도하는 머피의 움직임은 울산의 횡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와 비교되어 전반의 유이한(하나는 물론 골) 볼거리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확실히 리버풀이라는 세계적 클럽을 거친 선수로서의 내공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풀럼의 반격은 후반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드디어 설기현이 투입되었고, 대니 머피를 대신해서는 지미 불라드가 투입되었는데, 지미 불라드는 대니 머피와는 또 다른 움직임으로 울산을 괴롭혔다. 한 박자 빠른 패스, 정확하고 날카로운 패스, 그리고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무장한 지미 불라드는 결국 수비진을 파고드는 사이먼 데이비스에게, 그야말로 아름답기까지 한 긴 패스를 선사했고, 울산 수비진을 한순간 '얼음'으로 만든 이 기가 막힌 패스를 사이먼 데이비스는 머리로 잘 처리해서 동점골을 만들어 냈다. 이후에 지미 불라드는 설기현에게 또 한번 그림 같은 패스를 연결했고, 설기현도 침착한 터치를 통해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잡았지만, 뭔가 보여주리라고 단단히 마음먹었을 설기현은 발에 너무 힘을 주어서 공은 골대 위로 붕 뜨고 말았다.
"내가 틀렸음을 증명해보라."며 호지슨 풀럼 감독에게 기회를 부여 받은 설기현에게 어제의 경기는 장,단점을 나름 보여준 경기였다. 두 번째 골에 관여했던 것처럼 설기현에게는 나쁘지 않은 돌파력과 괜찮은 크로스 능력이 있고, 무엇보다도 탄탄한 체구를 바탕으로 한 움직임은 공중전에서도 팀에 유용한 옵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간혹 무리한 돌파를 시도하고, 더욱이 그게 통하지 않을 때에는 오히려 팀에 악영향만 끼칠 위험이 있어서 설기현으로서는 자신의 장점을 어떻게 더 어필하고, 반면 단점을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장,단점에 앞서서, 좀 더 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그가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에 있어서 솔직히 좀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공격축구'에 대한 바람
경기는 결국 2대1로 풀럼이 승리했고, 이 경기는 대니 머피와 지미 불라드의 플레이를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전혀 표 값이 아깝지 않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울산이 보여준 소극적인 경기운영에는 불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내가 언제나 '재미있는 축구'를 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울산의 확실한 팬이 아니기에 굳이 '승리'에 집착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나름 화제성이 있는 경기였던 풀럼과의 경기에서도 대단히 적은 수의 '처용전사(울산 서포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확실히 울산 구단으로서는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흔치 않은 기회였을 프리미어리그 팀과의 경기에서도 울산이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솔직히 울산이 풀럼에 크게 밀릴 것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점점 더 울산은 공격하는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공격적으로 나선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그리고 항상 골을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실점만 는다면 오히려 비난의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겠지만, '수비축구의 명가'라는 울산의 명성(?)은 팬들에게는 결코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다. 울산의 김정남 감독은 시즌 개막 전에 "이제 울산도 공격축구를 하겠다."고 호언했지만, 정말로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인지 아무래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분명, 프로의 세계에 '승리'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대구의 장남석이 말한 바, '신나게 공격하는 축구'란 걸 나는 진심으로 울산에게서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디 울산이 '승리' 그 이상을 고민해보기를...
"대구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무한 공격이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신나게 공격하는 축구를 해본 적이 없다. 가끔 공격에만 치중하는 것이 수비수들에게 미안할 때도 있지만 한 골 더 넣어서 갚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구 장남석- <포포투>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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