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로미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남의 이름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건 분명 초딩이나 할 법한 짓이지만, 그게 비극의 주인공 줄리엣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조금쯤 다르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름 따위,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개뼉다귀 같은 이름이라도 상관없지만, 하필, 이름이 다른 무엇도 아닌 '로미오'라는 게 유일하고도 중대한 문제가 될 때도 있는 법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로미오'라는 이름 자체가 문제인 건 전혀 아니다. '로미오'를 둘러싼 가문과 환경과 배경 등,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그 이름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데 근간을 이루어온 모든 것이며, 또한 누군가를 사랑할 때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그 이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을 택했고, 그들의 이름이 지닌 모든 것을 감내하고자 했으며, 그리하여 죽었다. 하지만 너무 심란해할 필요는 없다. 이 비극은 이름이 지닌 무게로 인한 필연이었다기보다는, 그냥 운이 좀 많이 나빴을 뿐이다.

만약 이름의 무게가 필연적으로 비극을 잉태한다면, 브라질의 유쾌한 로맨틱 영화인 <로미오와 줄리엣 결혼하다>는 필경 비극으로 끝나야 마땅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브라질 축구 클럽 팔메이라스의 팬으로 운명 지워진 줄리엣이(심지어 이름조차도 아무렇게나 지어진 것이 아니라, 팔메이라스의 전설적인 선수들의 이름을 조합하여 지어진 것이다!), 역시 운명이 코린티안스(팔메이라스의 라이벌)의 팬으로 점지한 로미오와 결혼을 한다니, 그게 어디 눈곱만치나 행복하게 끝날 일이겠는가. 하지만 이미 제목에서 결론을 내 버리는 이 영화는 결국 해피엔딩을 추구한다. 비극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데서 짐작되듯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이 지닌 무게도 역시나 무거웠지만, 그들은 그 무게를 받아들이려고 했고, 그리하여 결혼에 골인했다. 그렇다. 이 희극은 운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경우다.

이미 대충 영화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를 알고 있고 결과 또한 안다면, 이제 관건은 '축구'라는 소재를 이용해 영화가 원작을 어떤 식으로 변주하는가에 있다. 영화는 축구의 라이벌 구도를 적절히 배합하고 실제 축구경기장의 모습을 차용하면서,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꽤나 흥미롭게 재구성한다. 물론 당연히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할 법한, 사랑을 선택하면서 서로의 이름이 지니는 무게를 감당하려고 하는 연인의 노력만큼은 빠지지 않아서 각각 팔메이라스와 코린티안스의 열성팬인 줄리엣과 로미오가 상대팀을 인정하려는 모습은 이 영화의 가장 큰 흥밋거리다. 이를테면, 한눈에 반한 연인 줄리엣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을 팔메이라스 팬이라고 속이며 팔메이라스 엠블럼이 선명한 줄리엣의 침대에 몸을 누이는 로미오의 모습이라든지, 이미 로미오의 거짓말을 아는 줄리엣이 팀에 대한 충성과 연인이 사랑하는 팀에 대한 증오로 번민하는 로미오에게 코린티안스 엠블럼이 새겨진 콘돔 하나를 건내는 모습 등. 서로의 이름을 둘러싼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두 연인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줄리엣의 절절한 애원에 대한 유쾌한 변주로도 손색이 없다. "단지 저와의 사랑만을 맹세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케퓰렛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쓰지 않을 거에요."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기에 라이벌 팀마저 기꺼이 품는다고 하여도, 그들의 사랑은 더 큰 시련과 필연적으로 마주한다. 영화는 팔메이라스의 열혈팬인 줄리엣의 아버지와 코린티안스의 팬임을 숨긴 로미오 사이의 긴장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늘어놓다가 모든 것을 일거에 터뜨려버린다. 그동안 예비사위를 자못 마음에 들어 하던 예비장인은 일변하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 영화가 비극과 다른 결말을 향하는 건 앞서 말했듯 역시 운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걸로 뭔가 좀 미진하다고 생각한다면 영화의 엔딩과 함께 나오는 내레이션을 한 번 음미해 볼 만하다. 대단히 감동적이라거나 끝내주게 멋진 문구는 아니지만, 나름 그럴 듯해 보이는 그 문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사랑으로 초래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사랑이란, 자신의 이름이 뿌리 내린 공고함에서 벗어나 상대의 이름 뒤에 자리한 상이한 모든 것들을 용기 있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변화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결국 평화와 행복은 그 과정 끝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사랑의 결실인 셈이다. 뭐 물론, 운이 아주아주 나쁘다면 그저 명복을 비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음을 잊어선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늘 사랑한다면 그 공간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사랑은 불을 녹이고 얼음을 태웁니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폭풍으로 변화시켜서 바다가 넘치고 집이 무너지고 나면 평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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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완결판 - 못다한 이야기>를 보기에 앞서 나는 내 나름대로 마음의 무장을 했다. 제목에서부터 언뜻 짐작되는, '국가'로 귀결되는 다분히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감정들에는 결코 내 마음을 쉽사리 내주지 않을 참이었다. 태극기가 자랑스레 휘날리고, 애국가가 감동적으로 울려 퍼지고, 함께 얼싸안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혹 영화가 비추기라도 할 양이면, 나는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서 기꺼이 냉소해주리라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물론, 딱히 '국가'가 밉다거나, 그런 감정들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단지 너무나 노골적인 듯한, 그래서 애초부터 이미 어떤 정형화된 '국가'의 이미지를 연상케하는 제목을 지닌 영화가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관객에게도 또한 마찬가지의 이미지를 강요하는 데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 태극기가 나왔고, '어글리 코리아'를 말하는 미국 선수들과의 싸움이 있었고, 한국 대표팀을 소리 높여 응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정작 그 한가운데에 있는 '국가대표'는 지레 짐작했던 '국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엄마를 찾기 위해, 군대를 면제 받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또 감독의 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이 국가대표가 된 순간, '국가'와 '국가대표'가 지니는 견고하고 답답한 이미지들은 우수수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국가대표라면 마땅히 지니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사명감과 애국심을 '국가대표'의 선수들은 누구도 지니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이 '국가대표'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차 보였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국가대표'가 그 각 '개인'의 선수들을 감당하기에 버거웠다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한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선수들이 순수하게 국가대표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대표 역시 선수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전략적으로 급조된 스키점프 대표팀은 유치 실패 이후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전혀 기대를 받지 못하던 스키점프 대표팀이 의외로 활약을 하자 갑자기 자랑스러운 한국팀으로 변모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쉬움 속에서 귀국할 때 그들을 반기는 건 위로와 격려가 아닌, 오직 승자에 대한 환호와 대비되는 씁쓸한 무관심일 뿐이다. 국가대표와 선수들은 그렇게 서로를 배반하기 일쑤고, 그래서 국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선수'들과 선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랑스러워할 만한 대한민국'일 때만 의미가 부여되는 '국가대표'의 조합은 다분히 공고화된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영화는 수시로 전복되는 이미지들을 무심한 듯 내어 놓는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국가'나 '국가대표'를 향한 감정들이 철저히 논리와 이성의 영역 밖에 놓여 있음을 조용히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대표'를 둘러싼 감정들의 찰나적이고 급작스러운 면모에 대해 날을 세우기보다는, 외려 한 발 물러나 오직 감정의 영역에서만 걸음을 옮기며 단지 감정을 분출해내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듯 보인다. 가령, 길러준 엄마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순간에도 낳아준 엄마를 찾으러 돌아다닌다든지, 역할이 모호한 말썽쟁이 딸과 끝내 모질게 인연을 끊어내지 못한다든지, 골프채를 휘두르며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던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든지 등, 영화는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거나 혹은 관객을 정교하게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 대신, 순간적인 감정의 향연들로 관객을 웃기고 울리고 감동시킨다. 그 감정들은 단계를 거쳐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찰나적으로 소비되고 곧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영화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과장되고 극대화된 감정의 분출이고, 그런 이유로 영화는 '비판' 대신 '배설'을 선택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선택은 영화 속에서 비 내리던 어느 날,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의 선택과 사뭇 닮은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약에 취해 거리를 돌아다니고, 절망에 채여 비틀거리던 그 순간,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는 하나같이 스키점프가 주는, 아찔한 속도감과 하늘을 나는 듯한 쾌감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거기에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국가에 대한 사명감도, 현실에 대한 냉철함도 없이, 그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만이 넘쳐날 뿐이었다. 물론 그러한 그들의 선택과 나아가 영화의 선택은 관객에게 충분한 감정적 고양을 선사하지만, 마치 스키점프 선수가 하늘을 나는 순간이 영원일 수 없듯이, 고양된 감정은 끝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키날이 대지를 디딛는 순간, 애써 외면했던 논리와 이성과 현실을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고, 하늘을 나는 듯한 짜릿함도 점차 사그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의 분출을 끝낸 영화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한 관객을 총총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듯하다. 시원한, 그러나 조금쯤 허랑한 기분을 안긴 채. 이제 쇼는 모두 끝났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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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명절을 쇠러 할머니 댁에 갔다가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갑자기 어쩐 일인지, 시골에 위치한 할머니 댁에도 드디어 MBC ESPN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혹 주말에 할머니 댁에 올 일이 있더라도 EPL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곧 나는 이번 시즌부터 EPL 중계권이 SBS SPORTS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아, 이런 시방새!). 대단히 불행한 일이지만, 할머니 댁에 SBS SPORTS 채널은 나오지 않았고, 꽤나 불합리하기는 해도 그 실망감은 고스란히 SBS를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아, 이런 시방새!). 뭐, 물론 그게 SBS의 잘못은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SBS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시방새'라는 비속어로 종종 통용되어 왔는데, 축구팬이 그 비속어에 진심으로 동감하게 된 것은 SBS SPORTS 채널이 EPL 중계권을 획득하게 되면서 부터가 아닐까 싶다. 물론, EPL을 반드시 MBC ESPN만이 중계해야 되는 것은 아니고, 사실 어떻게 보면 비록 중계권료의 상승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SBS SPORTS 덕분에 그나마 EPL을 시청할 수 있게 된 국내 축구팬들로서는 오히려 SBS SPORTS에 고마워할 법도 하지만, 드디어 시작된 SBS SPORTS의 EPL 중계가 축구팬의 입맛을 맞춰주지 못하면서 축구팬들의 불만이 고조된 것이다. 그러니까 축구팬의 입장에서 보자면, SBS SPORTS 중계에 실컷 불만을 쏟아내면서도 외면하지 못하는, '적과의 동침'이 시작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SBS SPORTS는 EPL 개막전부터 제대로 헛발질을 했다. 애초에 방송해주기로 했던 경기가 현지상태로 문제가 생기면서 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후 다른 경기로 대체한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SBS SPORTS는 이후에도 이청용의 데뷔전을 놓친다든지, 혹은 이청용이 결장한 리그 하위팀들의 대결을 보내주느라 많은 이슈를 낳았던 맨체스터 시티와 아스날의 경기를 재방송으로 미룬다든지 하는 식으로 헛발질을 거듭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청용의 2호골이 터진 볼튼의 생중계 대신 일찌감치 박지성의 결장이 예고된 리버풀과 맨유의 경기를 생중계 했는데, 그래놓고 이청용의 2호골이 터지자 어지간히 다급했던지 리버풀과 맨유의 경기 중 그 장면을 잠깐 보여준 것은 물론 자막으로 수차례 이청용의 2호골 경기를 재방송한다고 광고를 해댄 것은 가히 자책골이라 할 만했다. 

물론, SBS SPORTS로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대에 열리는 경기를 일제히 생중계해 줄 수는 없거니와, 또한 축구팬들의 선호가 각기 다른 만큼 모든 축구팬들이 만족할 만한 편성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 축구팬들이 느끼기에 기본적으로 SBS SPORTS에는 축구팬들의 대체적인 선호와 현재 EPL의 이슈를 짚어내는 능력 혹은 짚어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듯하다. 특히 다른 것은 공교로운 일로 치부하더라도, 이청용의 2호골을 요란하게 광고해댄 것은 '조삼모사'의 전형으로서 SBS SPORTS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청용의 2호골을 알려주어서 다음에 녹화중계 되는 볼튼 경기의 관심은 한결 높아졌지만, 정작 해당경기에서 이쳥용의 2호골이 터진 초반 이후에는 이청용의 골에 대한 기대가 사그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요컨대 축구팬들은 이쳥용이 2호골을 넣은 이후 약 70분 간 결코 그가 골을 더 넣지 못할 것임을 일치감치 알게 되었다는 뜻이고, 이건 심각한 스포일러가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SBS SPORTS는 이래도 불만을 토하고 저래도 불만을 토해내는 축구팬들의 바람이 마치 하늘의 달을 따달라는 요구처럼 터무니없이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달을 따주는 일은 실상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잠시 달과 관련한 옛날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옛날에 어느 왕국에 어린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왕에게 하늘의 달이 예쁘니 그 달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공주를 끔찍이 사랑한 왕은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달을 가져올 방도를 논의했으나 신통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한 신하가 재치를 발휘해 공주에게 가서 직접 물어 보았다. 공주에게 달의 크기를 묻자, 공주는 밤에 자기 방에서 보면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쯤 된다고 했고 곧 그러한 크기를 지닌, 달 형태의 보석을 만들어 주니 공주가 기뻐했더라는 게 바로 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거나, 혹은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이 조금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에서 SBS SPORTS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확하다. 바로, 잘 모르거나 어렵거든 물어보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교훈을 적용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SBS SPORTS에게도 유,무형의 이득을 안겨다 줄 수 있다. 이를테면, 방송 편성표가 작성되는 일주일 전에, 일주일 후에 열릴 경기 중 축구팬들이 생중계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경기를 자사 홈페이지에서 투표를 하도록 한다면 SBS SPORTS는 축구팬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축구팬들의 바람을 직접적으로 들어주면서 축구팬들의 호감을 얻어 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구중계 중의 자막은ㅡ스포일러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ㅡ이러한 내용을 홍보하는 유용하고도 충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결국, 관건은 달이라도 가져다 달라는 듯한 축구팬들의 바람이 '미션 임파서블'이라기보다는, SBS SPORTS에게 축구팬들을 만족시켜줄 의지와 관심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물론, SBS SPORTS가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는다 해도 축구팬들이 SBS SPORTS를 외면하기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SBS SPORTS가 '국가대표 스포츠 채널'을 자처하고자 한다면, 혹은 MBC ESPN과의 비교열위에서 도약하고자 한다면, 또한 '시방새'라는 비아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축구팬들이 바라는 '달'을 가져다주기 위해 좀 더 관심과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적어도 축구팬들이 바라는 달이 지구에서 약 38만 4400km 떨어진 '진짜' 달이 아닌 한, 저 하늘의 달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니까 말이다. 뭐, '시방새'가 꼭 마음에 든다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모쪼록 '시방새'가 축구팬에게만은 '파랑새'가 되기를 조금쯤 바란다. 그리고 혹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국어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아 정확하지는 않아도 '시방새'가 별로 칭찬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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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기억력이 3초라는 금붕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종종 마치 금붕어라도 된 마냥 온갖 낚시에 번번히 걸려들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내 경우에 이런 일은 대개 인터넷에서 스포츠 기사, 특히 축구 기사를 읽을 때인데, 나는 제목을 보고 그 제목이 기사 내용과 별 상관이 없으리라고 확신하거나, 혹은 독특하고 흥미를 끄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사 내용은 허섭하기 이를 데 없으리라고 짐작하면서도, 어김없이 그 기사 제목을 클릭하고 곧 후회할 때 그렇게 느끼곤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고 보면 역시, 먹이를 먹은 사실을 잊고 끊임없이 주는 대로 먹이를 받아 먹다가 배가 터져 죽는다는 금붕어와는 사정이 다른 듯도 하지만, 인식하든 못하든 던져주는 떡밥을 언제나 날름날름 받아 먹는다는 데에서 나는 근본적으로 금붕어와 다르지 않은 기분이고, 말할 것도 없이 그 기분은 과히 유쾌한 것이 못된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금붕어로 만들 가능성이 높은 많은 기사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그 기사 제목에는 '박지성'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갈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박지성 "테베스는 여전히 좋은 친구">라거나 <맨체스터 더비, 박지성의 운명은>이라거나, <웃음 터진 박지성> 등의 식으로. 물론, 개중에는 흥미로운 기사도 있을 테고, 또 그러한 제목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다(언급한 기사 제목은 그저 '박지성'이 들어간 제목을 임의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박지성이 웃음이 터졌고, 테베스는 여전히 박지성의 좋은 친구고, 박지성의 운명을 점쳐 보겠다면야 뭐 어쩌겠는가. 여전히 그런 내용들은 축구팬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고, 기사의 제목이 실제로 그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면 문제 삼을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때는 기본적으로, 궁금하지 않으면 안 보면 그뿐이다, 라는 말이 유효할 테니까.

하지만 그야말로 낚시가 분명해 보이는, 그저 축구팬들의 클릭을 얻는 것으로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기사와 그 제목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런 기사들은 축구팬에게 어떤 유용하고 흥미로운 정보를 전해 주기는커녕, 제목을 보고 기사를 선택한 축구팬들의 기대를 야멸치게 배반하면서 그저 화를 돋우기만 하기 일쑤다. 구체적으로 최근 박지성이 출전시간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던 와중에 나온, 소위 낚시성 기사들에 대한 기억을 대충 더듬어 보면, 주중에 A매치가 없었던 덕에 체력을 아낄 수 있었던 박지성이 선발 출전할 확률이 높다던 기사나, 박지성이 지난 경기에 쉬었기에 이번에는 선발 출전할 확률이 높다고 어느 영국 기자의 발언을 소개한 기사나, 또는 이번에야말로 체력을 아낀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 선발 출전할 것이라고 구단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기사 등을 들 수 있겠다(여기에는 당연히 주관이 개입된다). 물론, 줄곧 박지성이 선발 출전할 것 같다고 설레발을 치던 기사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박지성이 전혀 선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기에 해당 기사가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러한 기사들이 기사로서의 자격에 미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잘못이라는 얘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조금 극단적이지만, 가령 맨유의 축구경기를 가위바위보 시합으로, 박지성을 '바위'라고 가정 해보자. 가위바위보의 주체인 퍼거슨 감독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가위'와 '바위'가 있다." 그러면 반드시 어느 기사에는 <퍼거슨, 우리에게는 '바위(박지성)'가 있다>는 제목과 함께, '바위'가 선발 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담긴다. 그리고 어느 영국인 기자나 구단 관계자가, 퍼거슨 감독이 '바위'를 사용한 적이 드물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바위'를 낼 것이라고 말하면 또 어김없이 그 발언을 인용한, <'바위(박지성)', 선발 출전 할 듯>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곤 하는 식이다. 이런 기사들은 당연히 알맹이가 빠져있고, 더욱이 선발 출전에 대한 근거로는 심히 터무니없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람에게 '바위'가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바위'를 몇 번 연속으로 안 내었다고 다음번에 꼭 '바위'를 내란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당연히 축구는 가위바위보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언젠가 반드시 나오게 마련인 '바위'와는 달리, 매번 계속해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선수가 있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누구도 퍼거슨 감독의 의중을 명확히 알 수 없음은, 이미 작년 모스크바에서도 절실히 증명된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박지성'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의 범람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러도 대답 없는 허경영의 이름과는 달리, 박지성의 이름은 그저 한 번 제목에 가져다 쓰는 것만으로도 축구팬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음이 명백하니, 읽히는 것을 지상과제로 하는 기사가 박지성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기사가 읽혀야 의미가 있다고 할 때, 그 기사는 그것을 읽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 또한 마땅히 성립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기사의 제목이 때로는 '박지성의 웃음'일 수도 있고, 혹은 '박지성의 친구관계'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박지성의 운명'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작 '기사'가 그 제목에 걸맞은 내용을 오롯이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저 누군가의 말 한 마디를 따와서 추측으로 일관하는 기사나 혹은 전혀 실제 내용과의 관련성이 적은 기사에 '박지성'의 이름을 마구 갖다 붙인다면, 그것은 축구팬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박지성에게도 대단한 민폐가 아닐 수 없다(나는 박지성의 안티팬 중 최대 30%는 낚시성 기사에 낚여 금붕어가 되는 일을 반복하다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분명 선발 출전하리라는 기사에도 불구하고 박지성이 경기에 나오지 않으면 괜스레 짜증이 나고, 아주 가끔은 그 짜증이 박지성에게로 향할 수 있으니).

명백하게도, 박지성의 이름을 부른다고 건강해지거나 예뻐지거나 살이 빠지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을 수 있더라도, 아마도 대개는 박지성의 이름을 부르면 즐겁고 행복하고 웃을 수 있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박지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박지성의 기사가 있고 그 기사를 읽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고, 이것은 박지성이 여전히 맨유나 혹은 다른 팀에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감히 박지성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고하노니, 그 좋은 이름을 한낱 떡밥으로 사용하지는 마시기를. 아무리 박지성의 이름의 효능이 막대하다고 해도 금붕어의 기분마저 좋게 해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려나 축구팬들이 금붕어는 아닐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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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까지 집결이란 것쯤은 물론 잘 알고 있지만, 그 시간에 정확히 가봐야 어차피 기다려야 될 것은 더욱 잘 아는 바라 결국 1시도 넘어서 슬슬 집을 나섰다. 날씨는 무진장 더웠고, 내가 아는 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뛰어난 기능성 옷인 '군복'은 그 망할 놈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발을 위한 신발이라고는 볼 수 없는 '군화'까지 사람을 힘겹게 하여 마음속으로 '이 신발'이랄지 '이런 신발'이랄지 하는 단어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중, 문득 신분증을 안 가지고 온 게 생각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 신분증을 챙겨 나와야만 했다. 신분증 따위, 어차피 본인 확인에도 별무소용인 형식적인 절차를 위한 것일 뿐이지만, 그 놈의 형식이 특히 중요한 데가 바로 '군'인 데야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집결 장소에 1시 25분쯤 도착하고 보니 놀랍게도 이미 인원파악까지는 마친 모양인데, 별로 상관은 없다. 그냥 소대장으로 선임된 예비군에게 좀 늦었다고 이름만 말하면 그뿐이다. 일단 첫 시간에는 신종 인플루엔자 때문인지 귀에다가 뭔 조그마한 기계를 들이 밀고는 체온을 재서 확인시켜 준다.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을 일일이 다 해주는데, 따분하긴 해도 화낼 필요는 없는 일이다. 딱히 날 생각해서 그리 해주는 건 아닌 듯해도, 어쨌든 해될 건 없으니까. 그런데 그걸 하고 나서 용지를 나눠주고 이메일과 연락처를 적도록 하는 데는 분명 화를 낼 필요가 있다. 이 짓은 훈련을 받으러 올 때마다 반드시 하는데, 바뀌지 않은 연락처와 이메일을 왜 1년에 몇 번씩 꼬박꼬박 적어줘야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가끔씩 오는 스팸 문자의 정보 획득 루트가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는데 한 30분쯤이나 걸렸으려나, 그게 끝나면 한 20분 가량은 쉰다. 물론, 이때 '첫 시간'과 '쉬는 시간'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양쪽 모두 더위 먹은 개처럼 헥헥거리며 그늘에 앉아 있기는 마찬가지니까.

해가 움직이며 그림자의 위치를 바꿔줌에 따라 예비군들도 집결지 건물 뒤편의 그늘로 이동했다. 이동도 역시 교육의 일환이기 때문인지, 이동 후에는 당연히 휴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날 들어 본격적이라 할 만한 교육이 한 15분쯤 진행되었다. 물론, 이 교육은 매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일 뿐인데, 어차피 듣는 쪽에서 매번 제대로 듣지 않아 항상 새로우니 그 점은 문제 될 게 없다. 잠도 안 오고 가만히 있기도 따분해서 오랜만에 대충 귀 기울인 바에 따르면, 북한군이 어느 쪽으로 침투할 것을 대비해서 우리 중대가 어쩌고, 또 몇 소대가 저쩌고 하는 이야기다. 유비무환이라 했으니 일단은 훌륭하다. 다만, 대체 내가 몇 소대인지도 매번 헛갈리는데,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뭐, 물론 이건 순전히 내 탓이겠지만.

잠깐의 교육 후 또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총기를 실은 차량이 도착하자 드디어 총기분출이 시작되었다. 이때 나눠주는 총으로 말하자면, 현역에서는 한 번도 만져볼 일이 없는 칼빈 소총. 과연 총알이 나가기나 할까 의심스럽지만, '군'에서는 이 녀석을 꽤 애지중지 하는 모양인지 나눠주는 데 30분쯤 소요되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줬다가 또 금세 회수하는 일을 꺼리지 않는다. 물론, 도대체 왜 굳이 훈련에 소용도 되지 않는 걸 악착같이 나눠주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예비군들은 의자나 베개 대용으로 사용할 뿐인데,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의자나 베개 대용으로도 그리 유용하지는 않다. 아무튼 예비군 훈련에서는 오로지 실내에서만 교육을 해야 할 때도 1시간 가량을 반드시 총기를 나눠줬다가 다시 회수하는 데 사용하고, 이것은 예비군 훈련의 '뻘짓'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식'과도 같다.

총기분출이 끝나면 당연한 휴식을 취하고, 곧이어 자신의 근무지(?)로 투입되는 훈련(?)을 했다. 이 훈련은 소대장이 소대를 인솔하여 집결지 부근의 요소요소에 3-4명을 배치하는 게 요체인데, 달리 말하면 다 함께 모여서 앉아 있다가 몇몇으로 분산해서 앉아 있게 된다,가 이 훈련의 유일한 특이점이다. 그러고 보면 이 훈련에서도 알 수 있듯, 아마도 예비군 훈련의 목적이란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끈기와 진득함의 향상이 아닐까 싶은데, 이와 관련해서 예비군 훈련에서는 첨단장비ㅡ예컨대 DMB tv나 아이팟 따위ㅡ를 장착한 예비군들이 특히 강점을 보인다는 데에서 군의 첨단화가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를 새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군'에서 예비군에게 직접 그런 장비를 마련해주지는 않아서, 나는 2년 전쯤에 휴대폰 게임 하나를 다운로드 받으며 최소한의 무장을 하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나는 군 가산점 따위는 필요 없으니, 예비군에게는 휴대폰 게임 다운로드 무료 쿠폰이나 달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니까 대체 6시간짜리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서 한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휴대폰 게임만 죽어라고 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데, 물론 누구도 내게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서 휴대폰 게임 따위를 하라고 얘기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나는 추호도 호도할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그 흔한 휴대폰 게임 하나 다운로드 받지 않고 그럭저럭 살다가 순전히 예비군 훈련을 위해 요금을 지불하게 된 것도, 그렇게 접한 휴대폰 게임을 꽤 자주 심심풀이로 하다가 배터리의 소모를 진척시킨 것도, 무엇보다도 숫자 패드를 열나게 누른 탓에 숫자 패드가 약간 망가진 것도 나는 모조리 내 탓이라는 점을, 심히 불만이긴 해도 부인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끝끝내, 대관절 신성한 예비군 훈련을 왜 그따위로 받느냐고 추궁한다면, 나는 억울한 심정이 되어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지루함과의 이길 수 없는 싸움만을 강요하며,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게 하는 예비군 훈련에서 난들 달리 어쩌란 말인지. 진심으로 말하건대, 나는 끔찍하게 무의미하고 지루한 시간을, 열악한 장비에 의존하며 6년이나 꿋꿋이 버텨낸 스스로가 제법 대견할 따름이다.

ps1. 현재의 예비군 훈련이 지닌 문제점 때문에 예비군 훈련을 좀 더 강도 높게 개편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다면(나는 그 사람이 예비군이 아니라는 데 내 예비군 훈련 2년치를 기꺼이 걸 수 있다), 핵심을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은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예비군 제도가 필수불가결한 제도라면 몰라도 예비군 제도가 박정희 시대의 유산으로서 고작 30여 년 밖에 안 된 것이고 보면, 예비군 제도는 존폐 여부부터 새로이 따져봐야 마땅하다.

ps2. 예비군들은 다른 지역으로 출타 시에 동대에 꼭 연락을 하라고 하는데(이것은 비상소집 시에 지역 내에 있는 예비군들은 6시간 내에 집결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로 웃기는 노릇이다. 식구들에게도 말 안하고 어디 다른 지역으로 무시로 갈 수도 있는 판에 동대에다가는 꼬박꼬박 알리라니, 빈집털이범의 정보 획득 루트가 심히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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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8-3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말할 것도 없이 동감입니다. 끝난건지 일년 더 해야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간 경험한 바로 이건 쓸데 없는 시간 낭비, 돈 낭비입니다.

Fenomeno 2009-08-31 14:22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제 이 쓸데 없는 짓을 끝내서 한시름 덜었지요(사실은 자랑 페이퍼였다, 랄까요. ^^;). 뭔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면 싶지만, 이 정부 들어서는 무엇이든 그저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니 아마도 나중을 기약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