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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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주 잠깐 서예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다. 당시에 다녔던 대부분의 학원이 그랬던 것처럼 서예학원도 딱히 내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부드러운 붓으로 새하얀 종이에 글씨를 쓰는 일은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곤욕이었던 것은 하루에 한자 5자를 외우는 일이었다. 一이 '하나'고 二가 '둘'이고 三이 '셋'이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었지만, 左가 '왼'이고 右가 '오른'이라는 데에 이르면 결코 납득하기 쉽지 않았고, 외우기는 더욱 어려웠다. 선생님은 5자를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 않으셨는데, 어려서부터 외박을 즐기지 않았던 나는 곧 깔끔하게 학원을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 아무래도 집에 못가는 것보다야 학원을 안가는 게 나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서예'와의 짧은 인연은 금세 끝나버렸지만, 학원에 다니던 당시에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이었다. 가기 싫은 학원을 버티다버티다 마지못해 늦게 갔었는지, 혹은 도대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한자를 외우는 게 만만치 않아서 늦게까지 붙잡혀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학원에 사람이 많지 않았던 어느 늦은 저녁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이 커다란 종이를 책상에 널찍하게 펼쳐놓으시고는 거기에다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부드러운 붓을 아무렇게나 일그러지도록 거칠게 다루자 바위가 생겨났고, 다시 붓을 부드럽게 가다듬고 바위에서부터 우아하게 올려치자 난이 생겨났다. 또 한쪽 여백에 알 수 없는 한자를 몇자 적으셨고, 마지막으로 붉은색 낙관을 힘주어 찍으셨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어린 내 눈에도 정말로 근사해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독자에게 친절하지는 않은 이 책 <화인열전>의 매력 역시, 단연 '그림'에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굳이 그림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 듯한, 8명의 화인들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한 내용은 상당한 지적 만족감을 주고, 더욱이 이러한 내용이 좀 더 그림을 '잘' 감상하는 데에 유용한 지식을 전해주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령, "절파(浙派)풍의 전통과 남종문인화풍과 진경산수적 요소가 뒤섞인 최득의작"이라는 설명을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겸재 정선의 <득의산수>라는 그림을 보며 그 몽환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가볍게 감탄하는 정도야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요컨대, 아는 만큼 보기 이전에, 본 대로 느껴도 좋다는 의미다.

사실, 이 책에서 아쉽다고 여기는 부분은 오히려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저자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에서 소나무는 단원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그린 것으로 확신하며 그 작품을 사제 간의 합작품으로 흐뭇하게 여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소나무 그림이 강세황이 노년에 그린 것이라며, 과연 60대 노필의 선비화가다운 품격이 살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오주석은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에서 그림 우측 상단의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는 글씨가 훼손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표암'이라는 글씨가 그림의 값을 올리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 현재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화인열전>에서 빈번히 드러나는 저자의 성급한 추측과, 아는 대로 혹은 믿고 싶어하는 대로 보려는 듯한 태도에는 상당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지금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즐기는 바로써 보건대, 비록 삼공(三公)의 벼슬 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 오히려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권 p288) 

<병암진장첩>을 두고 김이도가 쓴 화첩의 발문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바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글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발문을 인용하며 <병암진장첩>이 또 다른 <삼공불환도>(단원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예단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김이도가 쓴 글의 진의는 "삼공의 벼슬 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쪽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내 마음대로 풀이하자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스스로 흡족해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 그림은 삼공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을 만한 좋은 그림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말 꼬리 잡는 듯하기는 하지만, 책 속에서 단원의 그림에 대한 찬사 후 "이래야 단원이지."라는 저자의 감탄이 "이것이 단원이구나." 라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다.

다소 비판적 입장에서 이 리뷰를 썼지만, 여전히 나는 <화인열전>이 흥미롭고 의미 있는 좋은 책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아는 만큼 보는 것' 만큼이나 '보는 대로 느끼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능호관 이인상' 편의 부제,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 오로지 '아는 자'만이 감상할 수 있는 그림만이 과연 훌륭한 그림인 것일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비록 左가 '왼'이라는 것조차 모를지라도, 그저 '근사하다.'는 유치한 감상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분명, 아는 만큼 좀 더 볼 수 있는 여지가 커지리란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지(無知)'와 '과신(過信)'의 사이에서 솔직한 '자신의 느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건 다만 '모르는 자'의 변명일 뿐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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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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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읽으며 누나에게 넌지시 '개를 훔치는 방법'을 묻자, 이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대답이 맥없이 따라 나온다. "개를 찾는다. 개와 친해진다. 개를 훔친다." 재미없게도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따라한 게 명명백백한 이 대답은, 그러나 또 재미없게도 틀린 대답이 아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개를 훔칠 수 있단 말인가. 11살의 초등학생인, 이 책의 주인공 조지나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녀가 자신의 보라색 노트에 직접 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1단계: 적당한 개를 찾는다." 이 정도면 '완벽한 방법'의 1단계로서 역시 부족함이 없다.

조지나가 하필 개를 훔치려고 하는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어느 날 고물차 한 대만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 아빠 때문에 조지나가 집도 없이 고물차에서 생활하게 되었다는 게 그 근본적인 이유다. 맥도널드에서 씻고 학교에 갔다가 다시 고물차로 돌아와야 하는 삶을 사는 초등학생의 고뇌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법. 그런 힘겨운 나날이 계속되던 중, 개를 찾아주면 500달러를 사례금으로 주겠다는 오래된 전단지 하나가 조지나의 눈에 띈다. 500달러라면 집을 얻을 수 있는 돈이다(라고 조지나는 믿는다). 그래서 조지나가 당장 그 개를 찾아 나서게 되었느냐? 천만의 말씀. 이미 11살에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저술하는 조지나의 비상한 머리는 '전단지를 보고 개를 찾는다.'의 순서를 살짝 바꾼다. 즉, '미리 개를 찾고(훔치고) 곧 나올 전단지를 발견한다.'는 것으로. 그러니까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탄생배경이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방법'도 현실에서 실행하다보면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가령, 고작 3단계로 이루어져 있을 뿐인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만 해도 실제로 실행한다고 가정하면, 우선 코끼리의 크기에 맞는 냉장고가 있어야 하고,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을 수 있는 인력 혹은 장비가 필요하다. 게다가, 어쩌면 코끼리에게 미리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은 물론, 불가피하게 코끼리 몸의 일부를 절단해야 한다면 당연히 신체포기각서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지나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무려 9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 어려움이 오죽하겠는가. 더군다나 나도 어렸을 때 뭔가를 훔쳐봐서 아는 바지만, 어린 나이에 뭔가를 훔친다는 건 정말로 쉽지 않다. 그러니까 개를 훔친다는 것은, 냉장고 문을 열어 코끼리를 집어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셈이다.

그러나, 그래서 결국 조지나가 '완벽한 방법'을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후반부에 슬쩍 등장하여 함축적인 대사를 별로 상관없다는 듯 툭툭 내뱉는 무키 아저씨의 말을 빌자면,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중요한 법"이고,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이다. 조지나가 '완벽한 방법'을 실행하는 와중에 드러나는 이런저런 문제점들은 계속해서 세부적인 '규칙'들로 보완되지만, 그렇게 '완벽한 방법'에 다가가면 갈수록 조지나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할 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직 고약한 냄새가 나는 자취를 남기지 않았던, 마구 휘저어대지 않았던, 그녀가 개를 훔칠 마음이 없었던 그때로. 그리하여 마침내 조지나의 명저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9단계: 절대로 개를 훔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라도 결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어렸을 때 괴도 루팡을 동경했던 나로서는, 이 책이 조지나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바탕으로 "절도는 계획적으로"라는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내주고, 더하여 조지나가 세계적인 대도(大盜)로 성장까지 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 책이 결국 이른바 '바른생활' 버전으로 끝날 것이라는 건 책 뒤표지에 언급된 몇몇 이력, 예컨대 '무슨 무슨 대학 올해의 책'이라거나 '미국 학부모 및 교사 단체 선정 올해의 책' 등을 보면 일찌감치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그 당연한 '바른생활' 이야기를 오로지 바르게만 이끌어 가지 않는 과정에 있다. 어느 누구도 도덕 선생님처럼 "개를 훔쳐서는 안 된다."고 설교하지 않고, 엄마나 친구들도 조지나에게 마냥 따뜻하고 친절한 조언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은 영악하면서도 착한 조지나가 무키 아저씨의 따뜻한 배려 아래 스스로 '바른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이 책은 기발한 착상으로, 퍽이나 유쾌하면서도 흥미롭게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딱히 흠을 잡기 어려운 이 책에서 다소의 아쉬움을 느끼는 건 분량이 약간 적은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의 주 타깃 층에 내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순전히 비유를 들어 말하기 위해 아이들과 아이를 둔 부모를 '개'로 상정하자면(맹세하건대 이때의 '개'에는 전혀 나쁜 의미가 없다), 이 책은 '개'의 마음에 들 만한 '거의' 완벽한 책이긴 한데, 다만 내가 '개'가 아니라고나 할까. 물론, 나도 언젠가는 '개'를 둔 '개'가 될 확률이 높으니 그때쯤에는 이 따뜻하고 바른 이야기를 좀 더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르겠으나, 불행히도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까지는 '괴도 조지나' 쪽이 좀 더 마음에 들고, '완벽한 방법'으로 훔치려던 건 '개'였을 뿐이고, 나는 그저 '늑대'였을 뿐이고. 뭐, 그렇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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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3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3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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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인터넷에서 '스티븐 제라드 빌딩'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내용인즉슨, 두바이에 세워지는 주거 전용 빌딩에 리버풀의 세계적인 축구선수 스티븐 제라드가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기로 했고, 그 대가로 고급 아파트 한 채를 받기로 했다는 것. 뭐, 고작 닳지도 않는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가 아파트 한 채라는 게 꽤나 부럽고, 제법 레어 축에 끼는 내 이름은 아무도 빌려가지 않는 현실이 유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큰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스티븐 제라드라는 이름 자체는 별 게 아니라지만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간단한 게 아니고, 무엇보다도 스티븐 제라드는 내가 좋아하는 축구선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기사를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조금씩 읽어오던 <지식e-시즌3>에서 '두바이의 꿈' 편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

"이곳이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악몽입니다. 사람들은 과연 누가 이 건물을 지었는지 기억이나 할까요?" (p264)

물론, 이런 문구를 보고 새삼스레 '스티븐 제라드 빌딩'이라는 이름이 터무니없이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정작 그 건물을 짓느라 고생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못내 궁금해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냉정한 현실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아니 최소한 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팍팍한 삶보다는 이름 있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접하게 되는 쪽을 차라리 더 선호하고, 이는 비록 가닿을 수는 없을지언정 여전히 꾸고 싶은 '꿈'의 한 자락을, 이른바 '스티븐 제라드 빌딩'이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렇지만 적어도,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가는 초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두바이의 꿈' 속에, 힘든 노동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그저 소박한 바람만을 가질 뿐인 '노동자의 꿈'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알아야만 했다. 3일에 1층씩 올리는 '버즈 두바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임금은 4달러. 그들은 각자의 소박한 '꿈'을 좇아 '두바이의 꿈'에 동참하기 위해 빚을 내어 '기회의 땅' 두바이를 찾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참담한 현실과 냉혹한 무관심일 뿐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그저 누구나 마다하고 싶은 '악몽'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소위 '기사'라는 건 기본적으로 읽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기사'는 모든 '사실'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것만을 다루려는 경향이 있는 한편, 때로는 사람들에게 읽혀지기 위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실'을 드러내는 듯하면서도 '진실'을 교묘히 가리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e>는 그러한 '기사'와는 대척점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설령 누구나 읽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아야만 할 '사실'에, 오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사실'에 <지식e>는 천착하는 것이다. 예컨대 <지식e-시즌3>에서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제라드 빌딩'이 아니라 이름 없는 누군가의 소박한 '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현실을, 권위와 명성을 자랑하는 '노벨상'이 아니라 풍자와 철학이 담긴 '이그노벨상'을, 자랑스러운 한국인 리더인 UN사무총장 반기문의 삶이 아니라 '아시아의 슈바이처'라 불린 WHO사무총장 이종욱의 삶을 담담히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지식e>는 언제나 '진실'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 1권과 2권을 읽었을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지식e-시즌3>에서 드러내주는 '진실'들을 접하면 어쩐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뭇 감상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감정일 터이고, 그렇기에 "이 시대의 아방가르드와 함께 나이를 먹고, 몇 달에 한 번씩 출간되는 발간물을 보는 재미가 최소한 환갑까지는 갔으면 좋겠다."는 우석훈의 이 책에 대한 '찬미'처럼,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저 이런 책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렇다면 아주 조금쯤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인터넷에서 넘치는 '기사'의 홍수가 가져다주지 못하는 <지식e>의 진실한 '아픔'과 '슬픔'과 '분노'가, 그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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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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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에게 "하루씩 걸러서 다녀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아버지가 있다면, 나는 우리 아버지와 바꾸자고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텐데, 정작 그런 아버지를 둔 초딩 우에하라 지로에게 아버지는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물론, 프리라이터랍시고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한다거나, 케첩과 미제국주의를 '주적'으로 간주하며 요란을 떤다거나, 가끔 우악스러운 힘으로 레슬링 기술을 걸어오는 것쯤은 차라리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연금독촉을 나온 세무 공무원에게 국민연금 따위는 못 내겠다고 동네가 떠나가라 큰소리로 항변한다거나, 가정방문을 온 담임선생님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와 기미가요 제창의 부당함을 지적한다거나, 심지어 국민 따위는 관두겠다고 말하는 아버지란 확실히 초딩이 쉽게 감당할 만한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아니, 어디 초딩뿐이겠는가. 과거 혁공동(아시아 혁명 공산주의 동맹)의 전설적인 투사였으며, 좌익 진영의 내홍에 염증을 느껴 홀연히 동맹을 빠져 나온 이후에는 좌익과 우익 모두 탐탁지 않게 여기고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는, 심지어 국가가 감당하기에도 결코 만만치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체제에 빌붙은" 공무원을 보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줄을 모르고, 특히나 경찰을 향해서는 "국가의 개들"이라며 노골적인 적개심을 감추지 않으며, 더욱이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지르겠다."는 발언조차도 서슴지 않는 그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위험천만한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두고서도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초딩의 무기력함은, 실은 반국가,반자본주의를 맹렬히 주창하는 우에하라 이치로가 국가와 자본주의의 거대함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함과 사뭇 닮아있다. 대단한 소설을 내겠다는 그의 야심은 우익의 압력에 가로 막히고, 185cm에 이르는 당당한 체격과 가라데 능력도 모든 경찰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걸핏하면 "남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내뱉지만 '남쪽'에 가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아 보이거니와, 설사 간다고 하더라도 과연 '남쪽'이 '이곳'과 얼마나 다를지 그저 의심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지로네 가족이 '남쪽'으로 떠나게 되면서 상황은 일변한다. 여느 아이들의 아버지와 같은 평범한 아버지를 원하는 지로의 바람과 여느 국민들과는 달리 국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치로의 바람은, 급작스럽게 떠나서 안착한 '남쪽의 섬'인 이리오모테 섬에서 잠시 충족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남쪽 섬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빈 집의 수리를 도와주고 가재도구와 음식을 나누어주는 등,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서 살아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이것은 지역 유지인 상라 어른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외국인 베니의 존재는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두 거대한 축이 한 '개인의 삶'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국가와 자본주의의 거대하고 교묘한 시스템은 평화롭고 여유로운 남쪽의 섬조차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잠시나마 평온한 생활을 영위하는 듯하던 지로네 가족의 삶은, 이리오모테 섬에 리조트를 건설하려는 건설회사와 맞부딪치면서 다시 급격하게 요동친다. 국가와 자본주의를 등에 업고 법과 규칙을 주장하는 건설회사의 횡포에 우에하라 이치로는 분연히 맞서고자 하지만, 그것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은 우에하라 이치로 자신은 물론, 초딩인 지로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길 수 없는 싸움에 기꺼이 나서며, 우에하라 이치로는 이렇게 말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p245)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과 제도를 끊임없이 밀어붙이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미친 소'를 먹이기 위해 광고조차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 하고 싶은 말까지도 통제하려는 '국가'를 현실에서 수시로 마주하는 게 일상이고 보면 "나도 남쪽으로 튀고 싶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지만, 실은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남쪽'으로 가는 방법을 몰라서도, '남쪽'이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어서도 아니다. 기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어린 시절, 일찍 일어나고 서로 돕는 '새나라의 어린이' 따위는 기필코 마다하고 싶어 하면서도, 여전히 '헌나라의 어린이'가 아닌 '새나라의 어린이'로 남을 때 느꼈던, 그러한 '안도감'의 연장선 위에서 이루어지는 '두려움' 혹은 '체념'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라는 지로의 엄마 사쿠라의 말은, 그래서 '위안'으로 족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위안'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 책의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는 우에하라 이치로라는 과격한 인물을 등장시켜서 '국가'와 '자본주의'를 비롯한 사회체제에 대해 다분히 비판적 면모를 보여주고, 더하여 마치 일찍 일어나고 서로 돕고 거짓말을 안 하고 쌈을 하지 않고 몸은 튼튼한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애국가를 부르며 국가와 자본주의에 '긴박'된 삶을 살면서 '안도'하는 사람들을 향한 비판도 잊지 않지만, 오로지 우에하라 이치로만이 '정의'가 아님은 초딩인 우에하라 지로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에하라 이치로의 거침없는 행보가 의미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삶'에 대한 가능성과 신뢰 그 자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의문을 품었거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잊지 말고 가슴 속에 간직해주세요.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여 정의의 편에 서는 사람이 되어주세요."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에서 드러나듯, 그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각 '개인'의 선택에 대해 지지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그러니까, 오직 '새나라'만이 유일한 선택은 아니고, 반드시 '새나라의 어린이'여야 할 필요도 없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헌나라의 어린이'라도 괜찮다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라는 우에하라 이치로의 말을 곱씹으며 문득 생각해보았다. 만약 이런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면 나는 과연 '헌나라의 어린이'가 될 수 있었을까? 글쎄,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랬다면 적어도, '초등학교 6년 개근상' 따위를 받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뭐, 꼭 '개근상'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6년 내내 단 한 번도 학교를 빼먹은 일이 없는 '초딩의 삶'이란 꽤나 재미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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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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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이 선선한 어느 오후, 야외에서 바비큐를 즐긴 사람의 바비큐 맛 예찬은 조금쯤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비록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바비큐의 '맛'일 뿐일지라도, 거기에는 '야외'라는 공간이 가져다 준 행복감이 적잖이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 책 <제주걷기여행>에 대한 나의 평가 역시 조금쯤 가려 듣는 것이 나을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완도에서 제주도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 책을 제주도, 좀 더 정확하게는 '제주올레'와 도저히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아닌 게 아니라, <제주걷기여행>은 '제주올레'와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저자 서명숙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고 돌아와 자신의 후반부 인생을 '제주올레' 길을 만드는 데에 바치기로 결심하였고,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현재진행형의 과업에 얽힌 만만치 않았던 여정과 그 중간결과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단순한 여행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신념과 노력에 대한 감동적인 보고서이고, 동시에 '제주올레' 길을 포함하고 있는 제주에 관한 가장 내밀한 안내서이며, 또한 '걷기'라는 지극히 여유롭고 인간다운 행위를 향한 예찬서이기도 한 셈이다.

<제주걷기여행>이 '제주올레'에서 비롯된 만큼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단연 '제주올레' 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제주올레'를 통해 저자가 오랜 세월 반목하던 동생과 화해하고 동생이 가장 든든한 동지가 된 사연, 길을 찾아내고 잇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도움의 손길들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선하고도 감동적이다. 해병대의 병사들이 동원되어 4코스 조른모살 해안의 평탄화 작업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만만한 게 군인이지.'라며 잠깐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그 길을 '해병대 길'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그 길로 인해 그곳을 지나다니기 편해진 인근의 해녀 할망들이, 감사의 표시로 4코스 개장행사 때 유죽을 올레꾼들에게 대접했다는 이야기에 금세 가슴이 짠해졌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잔잔한 바다를 바라다보곤 했다.

사실 이 책을 '떠난 길' 위에서 급히 사게된 것은, 그저 이제 내가 곧 걸을 '제주올레'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측면이 컸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이 책은 '제주올레'에 대한 안내와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코스가 정해지고 연결되는 과정에 관한 소소한 감동들을 아울러 담아내고 있었고, 하기에 제주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 내가 걸을 코스를 선정하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제주올레의 시작이자 말미오름과 알오름의 목장을 경유하는 1코스에 대해 읽으면 1코스가, 불운했던 천재화가 이중섭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2코스에 대해 읽으면 2코스가, 또 김수봉의 노고가 깃든 수봉로와 제주의 전통적인 배 '테우'가 있다는 3코스에 대해 읽으면 3코스가, 그러다가도 송악산 절경을 둘러 볼 수 있는 6코스에 대해 읽으면 6코스가 못내 걷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1코스와 6코스를 걷고 돌아와, 나는 이 책을 마저 읽었다. 저자의 산티아고 순례기도 꽤 흥미로웠고, 제주도와 얽힌 사람 이야기와 먹거리 이야기도 나쁘지 않았다. '제주올레'를 걸은 사람들이 겪은 치유와 변화의 과정을 소개하는 부분은, 솔직히 여느 때의 나라면 어쩐지 너무 특별한 케이스를 골라 과장된 광고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직접 '제주올레'를 경험한 후의 나로서는 그게 그저 과장된 광고가 아니라 실제로 '제주올레'를 경험하며 느낀 행복의 한 유형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저자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려는 간절한 진심의 발로라는 것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 역시, 이제 '제주올레'와 이 책의 강력한 신봉자가 된 것이다.

미리 밝혔듯, 이 책에 대한 내 객관적ㅡ그래봤자 어차피 주관이 섞인ㅡ평가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제주올레'를 걸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행복감이, 진실로 '제주올레'의 길 위를 풍요롭게 감싸고 있었다고는 단호히 확언할 수 있다. 책 속에서 양희은이 이미 명쾌하게 결론내린 대로, '제주올레'는 정말이지, "죽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때가 되었든 '제주올레'는 필경 다양하되 한결같은, 평화롭고 넉넉한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놀며 쉬며 걸으려는 사람들을 기꺼이 반겨 맞아줄 것이다. 그러하니, 그 '죽이는 길'로 언제고 꼭 떠나 보시기를. 그리고 그 '죽이는 길'로 떠나는 와중에, 아마도 이 책은 대단히 유용하고도 즐거운 동행이 되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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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탱이 2008-10-2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죽이는 길'을 관광버스를 타며 다녔으니...잘 봤어요^^

Fenomeno 2008-10-21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다시 찾을 이유가 생긴 셈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