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 1 - 무량 스님 수행기
무량 지음, 서원 사진 / 열림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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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한국인 목사님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파란 눈의 스님도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온갖 영어가 쓰인 티셔츠를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걸치면서도, 정작 한글이 쓰인 옷을 입은 외국인에게 관심의 눈초리가 집중되듯이, 파란 눈의 스님은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십상인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더해, '왜 사는가'라는 선문답 같은 제목은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을 한층 더 가중시킨다.

물론 이런 호기심만으로 이 책을 읽기에는 '왜 사는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가 제법 부담감을 안겨주지만, 다행히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다. 숭산 스님이 미국에서 많은 제자를 키워낼 수 있었던 이유를 서양인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저자는, 역시 마찬가지 방식, 즉 상대를 존중하고, 보다 합리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명쾌하고 분석적이어서 쉽게 읽히는 편이다.

그런데, '쉽다'라는 것이 깊이의 '얕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 종종 '쉬운 것'이 가장 명확한 이해에 다다르는 첩경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저자의 쉬운 설명은 다소의 아쉬움을 남긴다. 과연 서양의 합리적 방식이라는 것이 동양의 종교를 받아들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인지 의문이고, 혹 진리를 지나치게 분석하고 설명하는 와중에 그 진의가 퇴색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고, 결정적으로 이 책은 미국에 한국식 사찰을 짓는 과정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원적 의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종교적 해석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오히려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 예일대를 졸업한 Erik Berall이 숭산 스님을 만나 한국 불교에 귀의하여 무량이 되는 과정과, 캘리포니아 주의 모하비 사막에 전 세계의 수행자들이 모여들 수 있는 태고사를 짓는 과정은 사뭇 진지하고, 진정으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자신의 고민과 소망, 그리고 부족함마저도 전혀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오직 할 뿐'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한다. 또한 파란 눈의 스님이 우리에게 낯선 것 이상으로, 저자에게도 낯설었음이 분명한 동양의 종교와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통해서 내부에 사는 우리가 결코 알기 힘든 '외부의 시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왜 사는가?' 마치 독자에게 던지는 듯한 이 화두는 분명 저자에게도 여전히 안고 가야할, 현재진행형인 화두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는 저자도 명쾌한 해답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직 모를 뿐'의 마음가짐을 말하는 무량 스님의 솔직함, 그리고 그의 치열한 고민과 실천적 수양 앞에서는 그런 화두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百覺이 不如一行"이라고 했으니, 실상 백 가지 화두조차도 그저 '오직 할 뿐'의 마음으로 하는 무량 스님의 삽질 한 번만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오직 할 뿐'인 실천이야말로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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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 이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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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권을 보면, 내가 어릴 때 도대체 왜 부모님께서 재미없는 TV뉴스에 열을 올리셨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정치에 관한 한 나는 아직도 꽤 문외한인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비도덕적이면서 비이성적이고, 게다가 비상식을 넘어 비정상으로 치닫는 소식에 다소의 혈압 상승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가난한 휴머니즘>에서 한 정치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조금 슬프기도 하지만, 좀 더 따뜻하고, 훨씬 유쾌하다.

이 책은 카리브 해의 가장 작은 나라, 아이티의 대통령이었던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쓴 9통의 편지를 모은 것이다. 아이티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로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아리스티드는 세계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원조를 강요하는 선진국들의 오만과 기만, 그리고 세계화의 맹점을 폭로한다. 그리고 동시에 가난함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는 아이티 민중의 존엄과 사랑을 소개하면서, 부유한 엄지손가락과 가난한 새끼손가락이 함께 주먹을 꽉 쥐는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편지에는 무슨 대단한 정책 수단이나, 탁월한 경제 성장의 방편 따위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 번의 대통령 당선 이후, 네 번 모두 군사 쿠데타로 물러나야 했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아리스티드의 고결한 정신은 가히 지도자의 덕목으로서 새겨들을 만하다. 또한 아이티의 어려운 민중들을 부유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존엄으로써 그들을 대하는 모습은 그가 왜 아이티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이런 아리스티드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아이티 국민들이다. 아리스티드가 망명지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반대하며, 그의 복귀를 닭에서 나온 달걀이 다시 닭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유한 어느 의원의 말에, 아이티 국민들은 온 나라에 벽화를 그리며 아리스티드의 복귀를 환영했다. 그리고 이 재치 있고 열정적인 아이티 국민들이 그린 벽화에는, 손가락 하나가 달걀을 닭 속으로 다시 밀어 넣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결국 훌륭한 지도자와, 재치와 열정을 갖춘 국민은 닭과 알의 관계처럼 선후를 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현재 우리에게 정말로 절실한 것은, 대단한 지도자나 정책보다도, 그저 국민의 '손가락 하나' 일런지도 모르겠다. 작금의 정치 상황은 매우 보기 싫지만, 그저 싫다고만 해서는 결코 달걀을 다시 닭 속으로 넣을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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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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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에 의하면, 나치즘 치하의 독일군에 의해 수용소 생활을 하고, 끝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후 삶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끔찍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다시는 수용소에서의 일을 입에 담지 않으려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으로 수용소에서의 삶을 떠올릴뿐더러, 결코 그 일을 세상이 잊기를 바라지 않는 부류이다. 이런 이분법 하에서, 프리모 레비는 후자의 사람으로서 극적으로 수용소를 벗어난 후, 수용소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책을 저술한 이유는 단지 독일군의 잔인함과 만행, 그리고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생활에 대한 고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인간의 삶이라고 부르기 힘든 수용소 생활에 대한 기록은 비참함과 괴로움, 그리고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것을 오직 독일군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돌려버리는 것에 저자는 그리 동조하지 않는다. 나치즘과 당시의 독일군은 이제 사라졌지만, '수용소'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수용소가 느닷없이 나타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논리적인 귀결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오늘날에도 형태를 달리하며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경계한다. 그리고 그 논리적인 결과물의 대전제, 즉 '타인에 대한 적대감'이 어떤 자극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표출될 때,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는지에 주목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재앙의 씨앗'을 한시도 무방비하게 놔두어서는 안 될 것을 경고한다.

'타인에 대한 적대감'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확대될 수 있을 듯하고, 이는 '지나친 자기애'와도 그리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이 이 중 어느 쪽으로 부터든 쉽사리 자유로울 수 없음이 명백한 이상, 나치즘과 수용소는 특이한 인종의 우연한 산물이 결코 아닐뿐더러, 여전히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극적인 귀환 후, 세상에 '수용소'의 진정한 의미를 알리고자 노력했던 프리모 레비가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도, 어쩌면 결코 떨쳐내지 못한 '재앙의 씨앗'에 절망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일제 치하의 식민지배에 고통 받았던 우리 민족의 역사는 나치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의 경험에 좀 더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마치 일제의 잔인함을 혐오하듯이 독일의 나치즘을 증오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또 다른 '적대감'의 하나이고, 이는 오히려 좀 더 근원적인 위험에 대한 인식을 막는 견고한 방어벽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제와 나치즘은 분명 비판 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그러한 '수용소'를 만들어낸 인간 내면의 의식이 보다 중요한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치즘의 수용소'가 아니라, 다만 '인간의 수용소'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비참한 일들은 인간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인간의 일이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보편적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 '재앙의 씨앗'이 분출한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절대로 인간이 한 일이라고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절망적인 것이다. 이런 모순 속에서 끝내 '인간'으로서 남고자 한다면, 프리모 레비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인간'의 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스한 집에서 / 안락한 삶을 누리는 당신. /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얼굴을 만나는 당신.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 평화를 알지 못하고 /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없이, / 기억할 힘도 없이 / 두 눈은 텅 비고 한겨울 개구리처럼 / 자궁이 차디찬 이가. /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당신에게 이 말들을 전하니 / 가슴에 새겨두라. /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 잠자리에 들 때나, 깨어날 때나. / 당신의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주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 집이 무너져 내리고 / 온갖 병이 당신을 괴롭히며 /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외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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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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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쯤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즐거움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확실히, 이 책은 동화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이었으며, 동시에 현인의 말씀처럼 깊이 있고 현묘했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결국 '자아의 신화'를 찾아 나선 양치기 산티아고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가 마침내 찾아낸 보물이 무엇이었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런 의문과 갑자기 찾아든 슬럼프가 맞물려, 나는 산티아고의 여정을 다시 따라가며 용기를 얻고 싶었다.

불행히도, 나는 기대했던 어떤 위로도 받지 못했다. 산티아고의 여정은 여전히 흥미로웠지만, 그가 찾은 보물은 내게 아무런 감흥을 남기지 못했다. 사막, 바람, 해, 그리고 하늘과 만물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산티아고는 내게 너무도 낯설었다. 용기를 시험하는 연금술사의 칼 아래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의 절대적 영역에도 발을 드리운 산티아고가 사막의 사령관과 탈영병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간절히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돕는 온 우주의 이치는,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마크툽) 말과 상충되며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미, 나는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내가 바라는 소소한 일상, 이를테면, 60마리의 양을 가진 양치기도 좋고,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팝콘장수라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그런 삶은, 단지 길들여졌기에,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일 뿐일까?

결과적으로 산티아고는 자신의 모든 바람을 손에 넣었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던 안달루시아 평원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양들을 떠나서,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로 향했지만, 만물의 언어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다시 처음 꿈을 꾸었던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사막의 여인을 잠시 기다리게 했지만, 그녀는 사막의 여인으로서의 기다림을 기꺼이 선택하고, '자아의 신화'를 이룩한 산티아고와의 재회를 꿈꿀 뿐이다. 그리고 먼 곳을 돌아 마침내 다다른 익숙한 장소에서 산티아고는 보물을 비롯한 모든 것을 얻는다. 허나 이런 결과론만으로 충분한 것인가?

보물이라고는 해도, 실상 이 책이 말하는 '자아의 신화'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를 말하는 것일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자아의 신화'를 찾아 나서는 산티아고의 여정은 결코 간단하고 쉬운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힘겨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산티아고가 의외로 자신이 본래 있던 가까운 곳에서 발견한 것이, 금화와 같은 물질적 보물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보물을 찾아낸 산티아고에게서 나는 실망감마저 들었고, 아마도 이것이 내가 이 책의 결말을 잊어버렸던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것들과 사랑하는 것들을 떠난 '자아의 신화'는 아무래도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기에는, 희생을 강요당한 것들의 가치가 영 눈에 밟힌다.

자아를 찾아 나서는 동화 같은 산티아고의 여정은, 내게 뜻밖의 혼란스러움을 남긴다. 분명 5년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자아의 신화'에 대한 이 명쾌한 이야기가 내게는 왜 이렇게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걸까?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이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p14~15)

어쩌면, 이 책의 저자인 파울로 코엘료가 바란 것은,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만 '호수의 자각'은 아니었을까? 요컨대, 나르키소스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호수처럼, 독자들이 산티아고의 여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반드시 '자아의 신화'라는 거창한 아름다움에만 주목하기보다는, 좀 더 허름해 보이더라도, 여전히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소한 일상에 가치를 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그것이 지금 내가 바라는 모습이라면 더욱더.

분명, 나는 나르키소스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호수처럼, 이 책을 통해 내 모습을 바라보았음에 틀림없다. 과거에 가졌음직한 모험적이고 환상적인 꿈은 가슴 한구석에 밀어놓고, 좀 더 현실적이고 소박한 일상을 추구하는 내 모습과 나는 대면한 것이다. '산티아고의 신화'가 내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과는 이제 다름을 인지한 까닭이다. 5년쯤 전이라면 맹목적으로 꿈꾸었을지도 모를 '자아의 신화'는, 이제 더 이상 내게 익숙하고 소중한 일상보다 무조건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꿈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p95)

산티아고의 꿈은 더 이상 나의 꿈은 아니다. 단지 그것뿐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양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양치기의 꿈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고, '메카'로의 순례를 꿈꾸면서도 그것을 이루고 나면 삶의 이유가 사라질까봐, 꿈을 간직하며 사는 크리스털 상점 주인의 바람도 비겁한 변명은 아니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고, 다만 다를 뿐이다. 그것이 5년 후에 다시 읽은 이 책에서 내가 느낀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5년간의 내 변화를 대변하는 것이리라.

내 지난 기억과 다른, 이 책의 새로운 느낌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제 충분히 만족스럽다. 여전히 이 책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은 좀 더 나중의 기쁨으로 남겨두어도 좋을 것이다. 5년 후, 혹은 10년 후의 내가 또 어떻게 변하고, 또 다시 읽은 이 책에서 무엇을 느낄지 유쾌하게 기대하며, 나는 여기에, 지금의 내 모습을 이렇게 새겨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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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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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 특강>이라는 부담스러운 제목과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미술'이라는 낯선 분야는 이 책을 읽는 것을 망설이게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 책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어려운 설명을 배제하였고, 강연의 내용을 그대로 책으로 가져와 독자와의 거리를 더욱 좁혔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읽히는 편이다. 게다가 저자의 재치있는 설명과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이 책을 매우 흥미롭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책을 읽고 난 뒤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비할 바 없이 놀라운 경험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책을 읽는 내내 신경 쓰였던 단 한 가지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지니는 위험성이다. 우리 문화에 대한 저자의 자긍심과 그에 바탕을 둔 설명을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것이 오직 진실인 양 맹신된다는 것은 꽤나 유감스러운 일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배움에서 비롯된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객관적 시선임을 강조하지만, 그 자신 역시 그저 일정한 지식을 갖추고 있을 뿐인 한 개인임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화가들이 오직 저자의 일방적 견해에 의해 매도되어 버리는 것에는 쉽게 동의하기가 힘들다.

저자가 소개하는 일화 가운데는 중국 그림에 대해 탁월한 식견을 가진 한 외국교수가 나오는데, 저자는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고, 한편으로는 조금 분통터지는 일이었다고 술회한다. 짐작컨대, 바로 그것이 그 외국교수의 아는바 한계일 터이고, 이는 곧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의 위험성, 혹은 한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의 저자 또한 안다고 자부한다면, 역시 그 명제의 한계로부터 쉽사리 자유로울 수 없음이 분명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러한 한계에 대해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일화는 분명한 교훈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거리를 지나치던 선생님이 군고구마 장수가 써놓은 어설픈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오래 쳐다보시고는, 그것이 가슴에 사람의 따뜻한 정감이 느껴지는 '진짜' 글씨이고, 자신의 글씨는 그저 장난친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짤막한 일화가 김홍도의 '송하맹호도'가 세계제일의 호랑이 그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저자의 설명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은, 아마도 '아는 것'에 구애되지 않는, 즉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한계를 뛰어넘은 선생님의 지극한 경지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 진부해보이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잘 모르던 분야나, 혹은 별 관심이 없던 분야마저도 몇몇 사실들을 알게 되면 전혀 새롭게 보이고,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을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말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말을 맹신하여 아는 것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거나, 혹은 그렇게 해서 보게 된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그로인해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더 많게 될 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가 간과하는 '한국의 미'와 이를 감상하는 방법에 대한 매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오로지 우리 것만이 최고라는 식의 편협함과 맹목성에 빠질 위험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지만, 아주 가끔은, 멋모르는 어린 아이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직시하듯, 미술을 대할 때도 순수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때로는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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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g19915115 2008-05-08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입니다..우리 글, 그림, 문화에 관한 글들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지적도 옳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 남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것만이 최고라는 '편협함과 맹목성'을 가질 만한 안목도 없는 이들이 주변에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고흐 전시회에 가보았습니다. 엄청난 인파에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밀려 나왔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그림 보여주려는 부모님이 무척 많더군요....일년에 한두번 하는 간송미술관 전시회에는 고흐의 그림 못지 않은 높은 수준의 작품들이 걸려 나오는 데도 찾는 이가 뜸하더군요..이 무엇입니까...편협함과 맹목성을 꼬집기 전에,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누군가 목놓아 얘기한다면 그 용기와 지성을 보다더 칭찬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주석 선생이 돌아가시고나서 앞으로 그 일을 그이만큼 누가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Fenomeno 2008-05-08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말씀하신대로, '우리 것'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시고자 애쓰신 오주석 선생님의 가르침은 저 역시 진정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너무나도 일찍 돌아가신 만큼, 그 분에 대한 아쉬움 역시 더욱 크기도 하구요. 그래서 이 어줍잖은 글을 쓰고나서는 혹 이 글이 너무 한쪽 면(위험성)만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혼자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지적한 '위험성'은 이 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에 대한 경계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주석 선생님의 견해에 대한 이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함이 더 큼에도, 제 부족한 글이 그 점을 드러내지 못해서 스스로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용기와 지성에 대한 칭찬'을 이렇게 댓글로나마 거론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무척 다행스럽습니다. 적확한 지적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