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년쯤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즐거움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확실히, 이 책은 동화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이었으며, 동시에 현인의 말씀처럼 깊이 있고 현묘했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결국 '자아의 신화'를 찾아 나선 양치기 산티아고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가 마침내 찾아낸 보물이 무엇이었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런 의문과 갑자기 찾아든 슬럼프가 맞물려, 나는 산티아고의 여정을 다시 따라가며 용기를 얻고 싶었다.

불행히도, 나는 기대했던 어떤 위로도 받지 못했다. 산티아고의 여정은 여전히 흥미로웠지만, 그가 찾은 보물은 내게 아무런 감흥을 남기지 못했다. 사막, 바람, 해, 그리고 하늘과 만물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산티아고는 내게 너무도 낯설었다. 용기를 시험하는 연금술사의 칼 아래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의 절대적 영역에도 발을 드리운 산티아고가 사막의 사령관과 탈영병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간절히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돕는 온 우주의 이치는,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마크툽) 말과 상충되며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미, 나는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내가 바라는 소소한 일상, 이를테면, 60마리의 양을 가진 양치기도 좋고,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팝콘장수라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그런 삶은, 단지 길들여졌기에,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일 뿐일까?

결과적으로 산티아고는 자신의 모든 바람을 손에 넣었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던 안달루시아 평원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양들을 떠나서,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로 향했지만, 만물의 언어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다시 처음 꿈을 꾸었던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사막의 여인을 잠시 기다리게 했지만, 그녀는 사막의 여인으로서의 기다림을 기꺼이 선택하고, '자아의 신화'를 이룩한 산티아고와의 재회를 꿈꿀 뿐이다. 그리고 먼 곳을 돌아 마침내 다다른 익숙한 장소에서 산티아고는 보물을 비롯한 모든 것을 얻는다. 허나 이런 결과론만으로 충분한 것인가?

보물이라고는 해도, 실상 이 책이 말하는 '자아의 신화'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를 말하는 것일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자아의 신화'를 찾아 나서는 산티아고의 여정은 결코 간단하고 쉬운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힘겨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산티아고가 의외로 자신이 본래 있던 가까운 곳에서 발견한 것이, 금화와 같은 물질적 보물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보물을 찾아낸 산티아고에게서 나는 실망감마저 들었고, 아마도 이것이 내가 이 책의 결말을 잊어버렸던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것들과 사랑하는 것들을 떠난 '자아의 신화'는 아무래도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기에는, 희생을 강요당한 것들의 가치가 영 눈에 밟힌다.

자아를 찾아 나서는 동화 같은 산티아고의 여정은, 내게 뜻밖의 혼란스러움을 남긴다. 분명 5년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자아의 신화'에 대한 이 명쾌한 이야기가 내게는 왜 이렇게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걸까?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이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p14~15)

어쩌면, 이 책의 저자인 파울로 코엘료가 바란 것은,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만 '호수의 자각'은 아니었을까? 요컨대, 나르키소스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호수처럼, 독자들이 산티아고의 여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반드시 '자아의 신화'라는 거창한 아름다움에만 주목하기보다는, 좀 더 허름해 보이더라도, 여전히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소한 일상에 가치를 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그것이 지금 내가 바라는 모습이라면 더욱더.

분명, 나는 나르키소스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호수처럼, 이 책을 통해 내 모습을 바라보았음에 틀림없다. 과거에 가졌음직한 모험적이고 환상적인 꿈은 가슴 한구석에 밀어놓고, 좀 더 현실적이고 소박한 일상을 추구하는 내 모습과 나는 대면한 것이다. '산티아고의 신화'가 내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과는 이제 다름을 인지한 까닭이다. 5년쯤 전이라면 맹목적으로 꿈꾸었을지도 모를 '자아의 신화'는, 이제 더 이상 내게 익숙하고 소중한 일상보다 무조건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꿈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p95)

산티아고의 꿈은 더 이상 나의 꿈은 아니다. 단지 그것뿐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양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양치기의 꿈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고, '메카'로의 순례를 꿈꾸면서도 그것을 이루고 나면 삶의 이유가 사라질까봐, 꿈을 간직하며 사는 크리스털 상점 주인의 바람도 비겁한 변명은 아니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고, 다만 다를 뿐이다. 그것이 5년 후에 다시 읽은 이 책에서 내가 느낀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5년간의 내 변화를 대변하는 것이리라.

내 지난 기억과 다른, 이 책의 새로운 느낌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제 충분히 만족스럽다. 여전히 이 책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은 좀 더 나중의 기쁨으로 남겨두어도 좋을 것이다. 5년 후, 혹은 10년 후의 내가 또 어떻게 변하고, 또 다시 읽은 이 책에서 무엇을 느낄지 유쾌하게 기대하며, 나는 여기에, 지금의 내 모습을 이렇게 새겨둘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