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반복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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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09.05.13]


가라타니 고진는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 특히 <만엔원년의 풋볼>에 대해 말하면서 우선 그의 소설에는 고유명이 없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엄밀히 말해서 고유명이 없다기 보다는 등장인물이 어떤 타입명을 가진다는 얘기. 그러니까 형인 미쓰(密)는 내향적이고 비행동적인 타입의 이름이고 동생인 다카(鷹)는 폭력적이고 행동적인 타입의 이름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작품인 <죽은 자의 사치>에도 타입명이 나오는데, 그건 사르트르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조금은 심각하면서도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자는 대자존재이고 죽은 자는 즉자존재(사물)이다. 대자존재는 항상 무엇인 바로 그것이 아니라, 무엇이 아닌 바로 그것인 존재형태"이며 그러므로 대자존재란 본래 이름이 없고 이름은 그저 "타자에 의해 강제로 대자존재를 사물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107) 결국 고유명을 가진다는 말은 대자존재인 사람을 사물화한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흔한 이름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근대문학의 특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타입명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소설 이전에는 일반적이었다. 18세기 영국소설을 중심으로 <소설의 발생>을 얘기한 이안 와트는 그것을 유명론적 경향과 결부시키고 있다. "유명론(nominalism)이란 보편 또는 개념이 실체라는 실재론(realism)에 대해, 개물(개체)만이 실체이고 개념은 그로부터 추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고"이고 그것은 결국 "문학에서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것(*유명론)은 철학상의 리얼리즘(*실재론)을 부정함으로써 태어난 것"(107)이라고 할 수 있다.


"흔한 고유명은 개체individual를 보여준다."(109) 근대리얼리즘에 있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개(個)가 항상 어떤 일반성(보편성)을 상징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에게 있어서 근대문학 전반의 구조를 의미한다. "근대문학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을 '상징'한다고 하는 하나의 신념인 것이다."(110) 이러한 사실은 발터 벤야민이 <독일비극의 기원>에서 괴테가 한 다음의 말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이 보편적인 것을 위해 특수한 것을 구하는가, 혹은 특수한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보는가는 대단히 다르다. 전자로부터는 우의(알레고리)가 생겨나고, 그 경우 특수한 것은 보편적인 것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후자 쪽은 본래 문학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거나 지시하는 것 없이 특수한 것을 표현한다. 이 특수한 것을 생상하게 파악한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ㅡ또는 나중에야 비로소 아는 것이지만ㅡ보편적인 것을 동시에 손에 넣는 것이다."(109-110)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인지) 근대에서는 알레고리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다. 말하자면 "'보편을 생각하고 지시하고 있는' 타입의 작품"(110), 즉 우의적인 작품은 문학 비평에서 평판이 나쁠 수밖에 없고 타입명을 사용하여 이미 그 속에 보편을 담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오에 겐자부로 역시 비평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 위 글을 인용하며 <독일비극의 기원>에서 주목한 점은 근대에 폄하되어온 알레고리의 의의이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의 관심은 "상징적 사고의 자명성이 확립한 후(*일본근대문학의 시기)에만 출현하는 알레고리적 작가(*오에 겐자부로)에 있다."(111)


상징적 소설에서, 특수한 것이 일반적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소설에서의 고유명이란 그것 자체의 고유한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전에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개(個)에 붙여진 임의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근대 리얼리즘은 "고유명을 이용하면서도 실은 고유명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111) 이런 고유명은 역사적인 사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왜냐하면 "사실로서의 개체로 이루어진 역사라는 사고에는 그것이 일반성과 연결된다는 암묵적인 신념이 전제"(113)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112)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역사가도, 근대소설가도, 거기에서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미 그 사건 속에서는 "일반성으로 해소되는 것을 거부하는 단독성(특이성)singularity이 결여되어 있다."(113) 그것은 이미 그 속에 어떤 알레고리적 의미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일회적인 사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113)


모든 역사 속에는 고유명(사건)이 존재한다. 이런 사실에서 알레고리적인 작가가 집착하는 것은 상징적인 사고를 통해 일반화(또는 반복)되지 않는 그 사건의 일회성+특이성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보편적인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이런 일회성+특이성으로 인해 그 작품은 되려 비역사적으로 보이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인 다니엘 디포는 화자에 지명이나 특정 연호를 부여함으로써 그 작품을 더욱 리얼하게 만들고 있다. "디포는 이런 '세부'의 집적이 리얼리티를 낳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113)고 그것은 곧 "신은 세부에 머문다"는 사고, 즉 명확히 상징적인 사고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고유명은 지시작용 이외에 다른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 하이쿠 작가인 마츠오 바쇼의 사실성은 근대리얼리즘에서의 사실성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는 어떤 개물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다른 풍경이나 역사나 그밖의 것들을 연결하고 있다. 어떤 것을 말하며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실성은 알레고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상징적인 사고에서는 어떤 표현이 끊임없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부정"(114)되며 그 고유명은 단지 어떤 개물을 지시하는 기호로 간주될 뿐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거부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고유명이다.


"<만엔원년의 풋볼>에서 구체적인 지명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114) 고작해야, 지방도시라든지 시코쿠(四國)이라는 공간적 특징 정도. "이러한 지명의 배제는 작품을 알레고리적인 것으로 만"(115)드는데, 즉 '골짜기마을'이 지명 그 자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의 우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현재의 시점과 백 년 전의 시점이 겹쳐지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특정한 시점을 넘어서는 초역사적인 구조가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얼핏 이런 구조는 "마이크로코스모스와 매크로코스모스 사이에 동심원적 조응이 존재하는 것처럼"(115,116) 보이게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만엔원년의 풋볼>이 알레고적이라고 한 이유는 골짜기마을(마이크로코스모스)와 우주(매크로코스모스) 사이의 어긋남, 혹은 현재와 백 년 전 사이의 불일치 때문이다. 그런 어긋남 혹은 불일치를 통해, 즉 일회성+특수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만엔원년의 풋볼>은 무엇보다도 '역사'를 포착하려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1960년 6월의 정치행동'이라는 특정한 사건을 알레고리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에는 특정한 시점을 지시하는 기호로서의 고유명을 배제함으로써 시공(時空)의 특정성에서 벗어나 있기도 하지만("'1960'년이라는 특정 시점은 '만엔원년(1860년)과 겹치고, 또 '1945년'과 겹침으로 그 특정성(고유성)을 박탈당한다"(118)) 동시에 그것을 고집한기도 한다. 이런 양의성을 통해 오에 겐자부로가 고유명을 진정으로 집착하는 동시에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가라타니 고진이 "그를 알레고리적인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이다."(118)


본 글에 앞서 가라타니 고진은 서력과 연호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서력으로 '1960년'이라고 말하면, 이 해는 세계적인 신좌익 운동의 발단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지만, '쇼와 35년'이라고 하면 메이지 이래의 모든 문제를 집약하는 결절점(結節点)으로 드러나게"(119)되는 것이다. '1960년 6월'에서 출발한 다카시가 아메리카에서 시코쿠 골짜기마을로 귀환하며 '만엔'과 메이지'라는 연호의 세계를 살아가기 시작하는 건 그러므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만엔원년'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백 년 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45년'이나 '1960년'이라는 단어가 지정하는 담론공간('피폭'이나 '신좌익'으로 '상징'되는 공간)이 배제해온 공간, 그러나 여전히 존속하는 공간(이를테면 '쇼와 20년' 혹은 '쇼와 35년'의 공간)에 사람을 이행시키는 기능을 한다."(119,120) 오에 겐자부로는 고유명을 사용함으로써 동시에 고유명(이 전제적으로 상징하는 것)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오에 겐자부로가 '나'라는 화자를 사용한고 그것이 오에에게 고유명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만엔원년의 풋볼>에서 '나'는 작품 기저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감' 그 자체이다. 작가 자신에 가까우면서 동시에 "시대의 풍속을 체현하는 화자"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나'가 "특정한 개체이면서 끝없이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처럼 어긋나며 중층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나'라고 쓰든 '그'라고 쓰든 그것으로 자동적으로 일반성과 연결되어버리는 근대소설의 구조와는 이질적"(121)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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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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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14]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주인공은 없다.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드리나 강 위에 세워진 다리다. 터키 제국 시대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400여 년 동안 그 다리를 건넜고 그 다리 주위에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팩션'이나 '역사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념을 배반한다. 구성적으로도 단순히 에피소딕하거나, 피카레스크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11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석조 다리(*드리나 강의 다리)가 이야기 구성의 구심점을 역할"(481)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다. 이 소설은 대단히 잘 읽히는 문장임에도, 위와 같은 구성상의 이유로 그리 녹록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학교 국어(혹은 문학) 수업 시간에 뻔질나게 배우는 소설의 구성(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위적인 수법인지, 사실 그것은 (오직) 소설의 재미나 감동과 관련된 문제이지 소설의 작법이나 소설의 가치와는 대단히 무관하다는 사실을 <드리나 강의 다리>를 읽고 있는 동안 또한 알 수 있다. 소설은 아쉽게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61년 '조국의 역사와 관련된 인간의 운명을 철저히 파헤치는 서사적 필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480) 작가 이보 안드리치가 노벨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스웨덴 한림원의 저 평가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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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54
에프라임 키숀 지음, 이용숙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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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05]


 에프라임 키숀이 쓰고 이용숙이 옮겨 마음산책에서 출간된 <행운아 54>를 보았다. 제목에 소설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54살 먹은 약간은 찌질한 보통의 중년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 번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괴한 방식으로" 대박(행운)을 맞는 사건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 이 소설의 전반부를 볼 때만 해도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키득키득 웃겨서 이런 유머가 끝까지 유지된다면 동네방네 이 책을 추천하고 다닐 테야, 즐거운 마음으로 상상했으나 오늘 본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머의 세기가 약해서 아쉬웠다. 그리하여 소설가 김종광이 책 뒤표지에 쓴 추천글, "그대가 일상에 지쳐 잠시나마 꿈꿔보던 바로 그것! 의뭉스러운 작가가 큰 웃음판을 벌여놓고 대중심리와 미디어산업을 강력히 풍자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확 풀어줄 한바탕 해소였으니까. 주의 사항! 이 소설을 공공장소에서 읽지 말라. 배꼽빠진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조금 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 에프라임 키숀이 구사하는 유머는 언어유희라기보다는 대체로 어떤 상황에 대한 역설적인 장난이다. 그러므로 재미있는 부분을 발췌해봤자 소설 맥락을 모르고 보면 단순히 진지한 이야기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게, 유머는 설명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니까. 이 소설을 보며 떠오른 다른 소설은 하진의 단편 "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다"이고, 떠오른 다른 작가는 커트 보네거트. 자, 어쨌거나 이제 에프라임 키숀을 맛봤으니 그의 다른 책들을 찾아 봐야지.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번역되지 않은 그의 다른 책들도 꾸준히 출간해줬으면 좋겠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별로 두꺼운 책도 아니고 그닥 꼼꼼히 보지도 않았는데 오탈자가 좀(서너 개 정도?) 눈에 띄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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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1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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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19]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장르의 소멸"과 책 말미에 부록처럼 실려 있는 몇 가지 외국어본 후기들을 함께 읽었다. 이로써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읽기는 우선 끝이 났다. 하지만 모든 끝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시작을 동반한다. 물론 다 읽었다고 해서 그것을 진정으로 다 읽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옮긴이 후기에 따르면 "장르의 소멸"은 원래 책에는 없던 내용인데 91년에 영어 번역본이 나올 때 처음으로 씌어진 챕터라고 한다. 그러므로 80년에 출간된 기존의 책과 91년에 쓴 이 챕터 사이에는 11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고, 그 간격에는 물론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적·비평적 전개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 그런 사정을 미리 앍고 읽는다면 이 챕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근대문학(19세기 근대소설)은 끝이 났고 그 말은 곧 근대문학 이외의 다른 장르가 회복되었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르의 소멸"이라는 챕터 제목은 곧 "장르의 회복"이라는 제목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챕터는 크게 소세키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장르에 대한 이야기(+사생문)와, 유머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쓴 바흐친과 프로이트에 대한 이야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소세키는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다양한 장르의 픽션을 썼다. 여기서 말하는 장르란, 노스롭 프라이가 <비평의 해부>에서 분류해둔 네 가지 픽션 장르, 즉 노벨, 로망스, 고백, 아나토미를 말한다. 90년대까지도 소세키의 작품은 초기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마지막 작품인 <명암>으로 발전해간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서양의 19세기적인 소설>(*근대문학)을 규범으로 삼고, 그것을 지향하여 모든 장르가 해소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번역되는 novel은 사실 "온갖 다양한 종류의 것을 넣을 수 있는 형식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제까지의 모든 장르를 탈구축하는 형식"(228)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그러므로 소설이 픽션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픽션도 아닌 것이다. 모든 장르를 탈구축한다는 면에서, 사실은 정련된 형태 자체가 불가능한 장르이다. 따라서 소세키의 작품이" 이른바 <근대소설>다운 <명암>을 향해 성숙해 나아갔다는 식의 견해는 근본적으로 옳지 않"(229)은 것이다.


 쓰보우치 쇼요와 모리 오가이의 몰이상 논쟁에서 모리 오가이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소설은 역사적 발전 단계로 존재하고 그것은 곧 픽션 중에서도 19세기 서양 소설이 우위에 있다는 관점에 따른 주장이 된다. 하지만 19세기 서양 소설이 우위에 있다는 말 자체에는 소설 이외의 장르가 소멸해야한다는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오가이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쇼요와의 논쟁에서 이미 "<장르의 소멸>의 역사적 필연성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229) 하지만 오가이는 말년에 역사소설이라(고 불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장르의 픽션을 쓰게 되었고 이는 에도 이래의 사전(史傳) 장르를 회복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장르의 픽션을 통폐합시켜버리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반발하여 탄생된 작업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후 <우회>에 이르기까지 소설쓰기를 했다기보다는 사생문쓰기를 했다. 마사오카 시키에 의하면 "사생문은 리얼리즘이라는 의미의 <사생>이 아니라 모든 언어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시키의 제자들이 아니라 맹우(盟友) 소세키에 의해 계승"되었다. "근대문학의 내러티브는 <ㅡㅆ다(た)>라는 과거형에 의해 완성된다." 하지만 "사생문의 특징 중 하나는 현재형으로 씌어졌다는 것이다."(231) 또한 "<ㅡㅆ다>가 어느 한 시점에서의 회상으로 존재한다면, 소세키는 <ㅡㅆ다>의 거부에 의해 전체를 집약시키는 관점을 거부하고 있다."(232) 소세키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근대문학적 서술기법을 거부하고 사생문을 쓴 것이다. "사생문이 과거 시제 <ㅡㅆ다>를 거부하는 것은 근대 소설이 소거시키려 했던 화자를 보존시키는 일과 이어져 있"는데 왜냐하면 근대소설에는 <작가(화자)>가 중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에크리튀르의 영도(零度)>, 즉 중립적인 글쓰기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라는 종결 어미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반면에 "<다>를 거부하는 사생문은 화자를 회복"시키고 실제로 소세키의 소설에는 항상 화자가 존재한다. 소세키에게 사생문이란, 말하자면 어른이 아이를 보는 태도였고, 그는 "사생문의 본질을 세상에 대한 <심적 태도>에 근거해서"(233) 판단하고 있었다.


 고진은 소세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비인정(非人情)이라는 말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인정>(낭만파)도, <몰인정>(자연파)도" 아닌 것이다. (논리적인 비약으로밖에 볼 수 없지만) 고진은 이 비인정을 유머라고 말하고 있다. "유머는 화자 없이는, 즉 소세키가 말하는 <작가의 심적 태도> 없이는 나오지 않는 것"이고 결국 유머는 사생문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에서 시작된 글이 사생문이라는 어떤 서술기법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 이유는 결국 소세키가 "사생문을 <소설>로 향하는 싹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설>에 반하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었"(234)기 때문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사생문은 장르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다."(235)


 "장르의 소멸" 마지막 네 페이지는 사생문에서 파생된 유머(비인정)와 관련하여 바흐친과 프로이트의 이론을 말하고 있으나, 정신분석이나 신경증, 초자아 등에 대한 개념의 부재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문장을 뜯어가며 이해하기를 시도했으나 예약해둔 세 시간이 훌쩍 날아가버려 그만...)


 80년에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쓸 당시에만 해도 스스로 자신의 비평이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 어떤 지점(네이션 혹은 세계화와 관련한 비평)으로 향하고 있는지 인식한 후에 다시 본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는 이미 그 지점에 대한 내용이 책속에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장르의 소멸" 챕터 뒤에 나오는 각종 후기 및 부치는 말은 주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쓴 글이다. 그러므로 그 글들에는 자신이 비평하는 지점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 대한 재해석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후기들을 보며 소세키가 영국에 가서 느꼈던 영문학에 대한 이질감과 유사한 종류의 이질감을 느꼈다.


 88년 문고판에 부친 글 중에는 다음과 같은 단락이 있다. "1980년대에 일본의 <근대 문학>은 결정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것은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내면>, <의미>, <작가 주체>, <깊이> 같은 관념들이 부정되고, 그들에 종속되어 있던 <언어>가 해방되었음을 뜻한다. 말을 바꾸면 근대 문학이 배척했던 장르들, 즉 <언어 유희>, <패스티시>, <로망스(SF를 포함한다), <새타이어>가 복권되었다는 것이다."(244) 몇 년 전에 가라타니 고진이 발표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글의 본질은 이미 88년에 완성된 것이다. 그가 문학 비평을 더이상 할 수 없는 이유는 발췌한 단락에 다 나와 있다. 현재의 (복권된) 문학으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비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학의 종언"이 현재까지도 논쟁적인 이유는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저자로서보다는 (네이션) 비평가로서 더욱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모종의 이질감을 느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옮긴이 후기를 보면 이런 가정을 더욱 확신할 수밖에 없다. 옮긴이는 가라타니 고진이 기왕 썼던 비평에 대한 인식을 지닌 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 대해서 후기를 적고 있다. 책 자체의 내용보다는 책 이후에 가라타니 고진이 행한 비평에 초점을 맞춰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었다. 막상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쓸 당시에는 그런 인식이 부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에게도, 가라타니 고진에게도, 이 책은 이미 전도(은폐)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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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 단편집 지만지 고전선집 128
모리 오가이 지음, 손순옥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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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28]


손순옥이 번역하여 지만지고전천줄에서 나온 <모리 오가이 단편집> 중 <무희>와 <마리 이야기>와 <아씨의 편지>를 읽었다. 모리 오가이의 소설을 읽게 된 첫 번째 계기는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내면의 발견"에서 언문일치와 관련된 작품으로 다뤄지기 때문이고, 두 번째 계기는 역시 같은 책 중 "구성력에 대해서"에서 쓰보우치 쇼요와의 논쟁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이다. 모리 오가이의 초기작들과, 역사소설로 거칠게 분류되는 후기작들 사이에 '이상'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몰' 되는가에 대해 "깊이"를 가지고 볼 생각.

오늘 읽은 세 편의 단편은 모두 그의 초기작이다. 모리 오가이가 독일에서의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화자는 모두 (대략) 젊은 남자지만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사람은 소녀라고도 불렸다가 아가씨라고도 불리는 10대 중후반의 (아마도) 독일 여자다. 세 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화자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도 대체로 외국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너무나도 일본적인 이유는 작가가 일본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독일 여자들의 내면에서 (당시) 일본 여자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특유의 애절한 정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일본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름만 외국인(독일인)이고 실제로는 일본인이라는 얘기다.

이 세 편의 소설은 모리 오가이의 초기 삼부작이라고 불리는데 역자 손순옥에 따르면 "초기 삼부작에서는, 개인의 진정한 사랑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당시의 일본 남성이나 또는 잘못된 사회제도 및 관습 등을, 외국 여성이긴 하지만 하나같이 여주인공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10p)고 한다. (이것을 고진이 말하는 '이상'이라고 봐도 괜찮을까.) 작가가 그런 것들을 지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주인공들이 일본인의 심성을 지녔음에도 외국인의 가면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바꿔 말해서 그런 것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 장치를 쓴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모리 오가이가 독일에서 정말로 경험한 것은 독일의 풍경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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