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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ㅣ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평점 :
Praise be A.L
34년만에 시녀이야기의 후속작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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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핸드메이즈 테일로 더 잘 알려진 원작의 시녀이야기는 눈이 가려진 채 허허벌판에 서있는 것 같은 공포와, 숨 쉴 때마다 위험수준의 초미세먼지를 들이키듯 천천히 목이 졸리는 기분으로 마지막 장을 닫게 됩니다. 이후에는 큰 숨을 몰아쉬고 드러누울 만큼 힘들었습니다. 미드 핸드메이즈테일 보다 책이 훨씬 더 갑갑함이 느껴지지요. 그래서 책보다 미드를 선호하시는 분들이 많은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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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이야기로 3~40년 전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그렸던 작가님은 길리어드 번성후의 이야기에 대해 오랫동안 답이 없으셨어요. 그냥 독자들에게 그 선택권을 넘기신게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증언들을 읽은 지금은 독자들이 던지는 질문들 속에서 빠르게 변하는 사회,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변해야 하는 것, 변해서는 안되는 것, 거기에 작가님이 세상과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오래 고르고 채우기 위해 시간이 그만큼 걸리신게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테드창의 신작은 16년 걸렸는데... 시녀이야기의 후속작은 34년 걸렸네요. 텀 긴 책이 제 취향인가요? ㅎㅎ) ⠀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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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을 읽기 전에 시녀이야기를 읽으시기를 (강하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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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시녀이야기의 후속작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이유는, 세계관을 공유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시녀 이야기에서 전체주의 신성국가 길리어드가 번성하고 유지되었다면 『증언들』 에서는 흔들리고 부서지고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또한 두 작품을 하나로 보기에 출간 시간차가 너무 큰 것이 아닌가 우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34년 간극은 가상 국가의 흥망성쇠를 보는 독자에게 오히려 현실감을 줍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작품인 시녀이야기와 자신이 태어난 후 만난 『증언들』. 어떤가요 머리 위로 느낌표 하나가 떠오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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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이야기 속 미완의 길리어드 역사가 『증언들』로 완성되기에 시녀이야기와 『증언들』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결말이 독자분들 마음에 드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길리어드가 존재했던 시대의 사람들의 증언 속에서 어림짐작할 뿐이니까요. 역사는 과거에 있고 우리는 현재에 살아서 진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순서가 뒤바뀐 사실을 진실로 믿기도 합니다. ( 13차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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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은 총 27개의 소주제로 71개 챕터와 마지막 심포지엄형식의 짤막한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성설명을 굳이 리뷰에 넣는 이유는 각 챕터별 화자인 리디아, 아그네스, 데이지의 이야기가 스토리에 따라 작가의 의도대로 배열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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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아주머니’(Aunt) 는 길리어드 체제 밖에서 나고 자란, 전문직 여성이지만 길리어드체제에 순응한 인물입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기에 죽어서나 세울 수 있는 석상을 살아있을 때 세운 인물이구요. 홀수챕터의 화자를 담당합니다.
아그네스 제미마 는 길리어드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지만 외부세계로 나갑니다.
데이지는 길리어드에서 태어났으나 ‘시녀’였던 어머니와 아버지로 인해 외부세계에서 배우고 자란 인물로 길리어드 안으로 들어가는 인물입니다. 아그네스와 데이지는 거울로 서로를 보듯 닮았지만 전혀 다른 두 인물로 짝수 챕터를 번갈아가며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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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리디아-아그네스-리디아-데이지-리디아-아그네스-리디아-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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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어드 안과 밖을 다 경험한 리디아가 중심을 잡고 안쪽의 인물 아그네스, 바깥쪽의 인물 데이지가 있습니다. 흡사 나무의 큰 줄기와 작은 가지들을 보는 듯해요. 세 인물은 책의 2/3지점까지 교차점이 없습니다. 대화도 만남도 공유점도 없어요. 그럼에도 각자의 위치에서 의심하고 고민하며 더 나은 지점을 찾아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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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18 리딩룸에 이르러서야 주요 세 인물과 베카가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후부터는 리디아의 챕터와 아그네스+데이지 챕터가 번갈아 구성됩니다. 이 챕터의 배열은 길리어드 안/밖, 혹은 과거/미래, 힘의 이동-아그네스와 데이지가 한배를 탄 인물들-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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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에도 여러 장치를 해 놓은 작가님이니 스토리와 문장에서는 두말 할 필요가 없겠지요.
전체주의 신정국가인 길리어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종교(특히 변질된 성서해석), 권력을 위해 행해지는 수많은 불합리, 숨겨진 폭력성, 미성년자를 추행하는 의사, 아동성애자인 권력자, 아내살해, 아버지의 불륜 등 순수와 미덕 뒤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악행을 이야기합니다. 생각 없이 지나친 단어 하나, 단서 하나가 모두 의미 있었고, 사람과 사물에 지어진 이름까지도 실제 역사에서 차용해 의미를 격상시키기도 했으며, 가상의 국가임에도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암투까지. 치밀하고 유기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입니다. (리디아가 내부에서 벌이는 일들을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머리싸움 체고시다)
그래서 시녀이야기 속 정적이고 무거운 느낌과는 다르게 긴장감과 속도감이 있어요.
『무사히 날아가라 내 은빛 비둘기들, 내 파멸의 천사들이여. 안전하게 착륙하기를.』
다르게 태어나고 다르게 자라온 다른 위치의 여러 여성들이 연대하고 고민하고 움직이며 이야기 사이사이 생기는 균열들은 가속화시킵니다. 균열을 증폭시키고, 외부로 은빛 비둘기들을 보내며 길리어드를 무너뜨리게 하는 힘은 내부의 리디아에게서 시작됩니다만 리디아는 이 균열이 자신을 부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디아는 ‘눈’을 피해 적기 시작합니다. 발견되어 진실을 알릴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증언들을 리디아는 이런 심정으로 적었을 겁니다.
『나는 흔들린다, 나는 흔들린다.
그러나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 -p.451
어느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나 물으신다면, 인간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행하는 방법과 순응의 과정을 그린 11.<베옷> 챕터와 마지막 27.<작별> 챕터입니다. 둘 다 리디아의 이야기네요. 네. 저는 리디아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어요. 시작을 여는 미래의 주인공이 아니라 끝을 스스로 선택한 과거와 현재의 주인공.
작가님과 리디아가 겹쳐 보여서 더 슬펐습니다. 작가님이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어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참 울었어요 . 무릎에 머리 베고 잔혹동화보다 더 잔혹한 논픽션을 옛날 이야기인 냥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눈 뜨면 사라질 할머니의 손길 같아서요.
but now I must end our conversation. Goodbye, my reader. Try not to think too badly of me, or no more badly than I think myself.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대화를 마쳐야 한다. 안녕히. 나의 독자들. 나를 너무 나쁘게, 아니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주기를.』
In my end is my beginning, as someone once sad.
『나의 최후는 곧 나의 시작이다.』
성공하던 실패하던 자신의 끝을 알고 있음에도 세상의 시작을 위해 움직인 리디아의 기록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베카...베카... 당신의 선택도요. 아...베카..
스포일러 없이 리뷰를 쓰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까요. 매 번 리뷰를 쓰고 있음에도 새롭습니다. 담담하게 쓰고 싶었는데, 역시 쓰면서 울컥하는걸 보니 이 책을 빠져 나가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2020년 결산에서도 만나겠지요. 아직 1월인데 이미 정해진 기분.
작가님.. 장수하세요. 꼭요.
스몰토크.
1. 붉은 드레스와 하얀 모자는 사실상 이 책 안의 이미지에 없어요.
책을 덮고 나면 시녀 이야기의 표지 색이 왜 네이비와 그린인가, 사은품이 왜 담요였는가 내지의 네온색 포니테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릎을 탁 치실거에요.
2. 세상의 모든 불합리를 작가의 눈으로 적은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성에 관한 문제는 ‘페미니즘문학’이라고 따로 이름이 붙여지는군요. 직장문제, 폭력문제, 전쟁문제, 불평등한 경제문제, 모두 다 문학 안에서 섞이는데, 왜일까요.
3.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고서 문체가 강해서 거부감이 든다고 하시는 분은 이 직선적이고 꾸밈이라고는 하나 없는 언어를 읽으시면 큰일나시겠어요. 이 책을 쓰신 분이 여든이 넘은 여성분이란 사실만 잊지말아요.
4. ‘여성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지옥’ 이라는 타이틀로 이 책이 소개된 글을 읽었습니다. 웃기도고 슬프지만 ‘여성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아는 적당한 현실’ 로 고쳐주고 싶었습니다.
4.살아 생전 애트우드 여사님을 뵐 수 있을까요. 뭐 한국 오신다고 해서 제가 막 프리토킹으로 이야기 할 능력은 없고요 일단 눈물먼저 쏟고 시작할거에요 ㅋㅋㅋㅋㅋㅋ 말 못해.. 돈 크라이..ㅠㅠ
5. 이제 미친 아담 시리즈만 남았습니다. 그건 하반기에 읽을게요. 1월도 다 안지나갔는데 벌써 지쳤어요. 대신 71개의 챕터니까 2일에 하나씩 원서 필사를 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왜냐면 이 책을 읽으면서 원서는 뭐라고 쓰였을지 궁금해 비교하며 읽었거든요.
재미있는 표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곰탕전쟁의 원 표기가 watched-pot-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