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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ㅣ 아시아 문학선 16
백남룡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4월
평점 :
(...) 은폐된 기생충, 카멜레온 같은 사람들, 식객들, 건달뱅이들이 국가와 집단과 인민의 리익을 해치는 범죄자로 자라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사회에 위험성을 줄 수 있는 부정의 검은 싹을 제때에 밝혀내야 한다.
- <벗> P. 151
#1.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초판본 디자인 같은 느낌이 드는 표지의 백남룡 작가의 소설 <벗>. 우정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첫장은 이혼을 청구하러 인민재판소의 판사인 정진우를 찾아 온 채순희(도 예술단의 성악배우, 중음가수)와 그의 남편 리석춘(강안기계공장 선반공)의 갈등으로 열렸다. 순희는 더 이상 남편 석춘과는 살 수가 없으니 리혼 시켜 달라며 진우를 조르지만 진우는 리혼문제는 문건만 가지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인민반(거주지 생활을 담당하는 최소 단위)과 직장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린다는 말로 순희를 달래 돌려 보낸다. 인민재판소... 도 예술단... 인민반... 단조롭게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낯설어서 꼭 외국 소설을 읽고 있는 것도 같고, 정말로 옛날 한국 소설을 읽고 있는 것도 같았다.
#2. 우리 나라에서 이혼은 이제 큰 흠도 아니라고 한다. 물론 이혼 재판에서 이기려면, 그래서 더 많은 위자료와 양육권을 얻어내려면 주변인들의 도움이 필요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당사자들만의 사정을 가지고 갈라서느라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떄문에 이혼 당사자들만의 이야기 뿐 아니라 그들의 이웃들, 직장 동료들의 의견도 중요하다는 북한의 이혼 절차가 퍽 흥미로우면서도 영 마뜩찮았다. 한 공간에서 밤낮으로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 건 부부 두 사람인데 주변인들이 뭐라고 그 둘이 갈라서야 하네 마네를 판단해준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야기는 그들의 이혼 문제를 맡은 판사가 다름 아닌 정진우라는 데에서 차별점이 생겼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3. 아이러니컬하게도 진우 역시 그렇게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의 가장은 아니다. 싱싱한 남새(채소) 먹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은 고향을 위해 남새연구소에서 20년이 넘게 연구를 하고 있는 아내 한은옥과의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들 사이에 이미 부부 이전의 사랑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처음에는 사랑으로, 그 다음에는 의무감과 의리로, 그리고 나서는 만성으로. 그들의 20년 넘은 부부의 연은 그렇게 근근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4. 결과적으로 순희와 석춘의 이혼 문제를 진우가 맡은 것이 순희와 석춘, 그들의 아들 리호남에게는 물론이요, 진우와 은옥에게도 좋은 일이 되었다. 진우는 순희와 석춘 부부 사이의 문제를 단순히 가수가 된 순희의 허영심 문제로 보지 않고 석춘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석춘에게 진심으로 설명하며 변화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순희에게도 석춘에게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정말 본인에게는 티끌만큼의 문제는 없었던 것인지 돌이켜 볼 수 있도록 설득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여지를 주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의 일에 접근하면서 자기 자신과 아내 은옥의 사이의 관계와 정, 의리에 대해서도 새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료주의에 관한 비리를 밝혀내고 그 일의 관계자를 개화시키기까지 했다. 이쯤 읽고 보니 정진우라는 사람이 꼭 정의의 수호자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5. 백남룡 작가의 <벗>이라는 작품이 프랑스에서 최고로 인기 좋은 한국 소설이라고 한다. 이 세상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북한만의 생활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부부 관계의 사랑과 의리에 대한 그의 다정한 접근법 때문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그 인기 비결을 추측해본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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