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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 - 듣도 보도 못한 쁘띠 SF
이선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8년 5월
평점 :
(...)지구의 사람들은 눈으로도 다른 사람을 때릴 수가 있었다. 뾰로통한 입술로도 날카롭게 찌를 수 있었다. 희지는 왜 본인이 이혼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 <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 P.113
지구에서는 어린이는 똑똑해야 TV에 나오고 어른은 멍청해야 TV에 나와.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해. 내가 TV에 나오잖아. 그래서 난 멍청하게 굴기로 작정했지. 그런데 이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내가 멍청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진짜 멍청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야.
- <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 P.250
위기에 빠진 라비다인에게 '힘내'라고 활기차고도 우렁찬 목소리로만 위로를 건넨다는 것은 라비다인의 고막만 아프게 할 뿐이다. 위기에 빠진 불쌍한 라비다인을 더 불쌍하게 만드는 것이란 뜻이다. '힘'은 '내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힘이 없어서 힘이 없는데, 없는 힘을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란 말인가(...)
- <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 P.256
#1. 조곤조곤하고 차분한 문체가 마치 동화책이라고 읽어주는 듯 포근하지만 한 구절 한 구절 현실을 잘 비꼬아 놓아서 우리 나라 소설 이라고 생각하기 조금 어려운 맛이 있었던 SF 소설. 은하계 어딘가에 지구 말고도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이 무수히 많을 것이며 그 생명체들이 가진 기술력은 어마무시할 거라는 가정에 기반한 SF 소설로 "라비다"라는 가상의 행성(어쩌면 실제할지도 모르는)이 "행성감기"에 걸리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딘가 포근한 듯 날카로운 어조로 풀어주는 책이었다. 표지가 메르헨틱하고 귀여워서 이게 SF소설이라고? 싶었는데 SF소설이라고 해서 다 어딘가 음침하고 기괴하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준 책이었다.
#2. 부끄러움이 많아 겸손과 양보,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라비다인들이 살고 있는 행성 라비다. 그들은 소군이라고 하는, 무오나무의 열매였다가 다 익어 땅에 떨어지면 소군이라고 하는 동물이 되는, 그러다 조심스럽게 붙잡아 껍질을 벗기면 회색빛이 도는 먹거리 소군이 되는... 어쨌든 소군이라는 걸 주식으로 삼고 있었다. 평화주의자들만 사는 순한 행성인지라 라비다인들은 그저 자연히 나무에서 떨어져 들판을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소군을 주워다가 껍질을 벗겨 먹을 거리로 가공해서 먹고 살았었다. 그러던 어느날 라비다 행성이 행성감기에 걸리면서 소군들은 땅에 떨어지는 걸 거부하게 되었고, 식량난을 우려한 라비다인들이 억지로 나무에서 따거나 억지로 껍질을 벗기면 덜 익어서 맛이 떫은 소군이 되었다. 점점 먹을 것이 줄어들어갔고, 결국 라비다인들은 육체공유법(한 사람의 육체에 두세 명분의 뇌를 함께 담는 것)을 실시하게 된다. 라비다 행성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던 농업 사령관 띵은 지구의 농촌 드라마 <농사의 전설>의 열혈한 팬이었는데, 어느 날 <농사의 전설>의 출연진들을 모셔와 농사법을 배워 지금의 식량난을 타개할 방안을 마련하고 그들을 라비다 행성으로 초대하기 위해 지구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띵과 띵이 하는 모든 것들을 몰래 카메라 쇼 같은 걸로 착각한 <농사의 전설> 출연진들은 자진해서 띵의 우주선에 올라 라비다 행성으로 자진 납치를 당한다. 하지만 사실 <농사의 전설>이라는 건 다만 농촌 드라마에 불과하고 당연히 그 출연진들은 그저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연기자들일 뿐이라 소군농장에서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알지 못해 우왕좌왕 하기만 하게 된다.
#3. 나름 스포일러 없는 줄거리를 늘어놓자면 이러하고... 라비다 행성과 라비다인, 소군에 대한 설정은 정말 동화 같기도 해서 재미있었다. 하지만 시점이 지구로 넘어와 <농사의 전설>의 출연진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부분에서부터는... 으음... 실제의 연예계 뒷모습도 이렇겠지? 하고 알고 있었으면서도 실감하지는 못했던 부분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서 마음이 좀 심난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이야, 막장요소란 막장요소는 다 모았잖아? 가 진실한 감상이었다. 지구인들은 너무 현실적이라서 불편했고, 라비다인과 데리다인은 너무 동화적이라서 웃겼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작품 전체적인 배경이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게 은은하게 드러나서 어? 이 부분은 이런 걸 비꼰 건가? 하는 깨달음을 찾는 맛이 있어 끝장까지 술술 읽어내려갔다. 분명 현실을 비판하고 비꼬고 있는 소설인데 워낙 은은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메르헨틱해서 쉽게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단순 SF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어딘가 껄쩍지근한... 현실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한국형 SF소설이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