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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마리오네뜨
권지예 지음 / 창비 / 2002년 1월
평점 :
2008년 어느 날 EBS 라디오 독서실로 권지예의 단편 <섬>을 만났다. 다른 글들도 꼭 읽고 싶어 책을 주문해둔지 1년 반. 2009년이 가기전 뒤늦게 후다닥 읽고 이제야 리뷰를 쓴다.
첫 작품 <고요한 나날>은 '훈련된 작가' 답지 않게 문장의 완성도도 떨어지고 소재도 줄거리도 진부해서 다소 실망을 안겨주었다(6인 병실에서 만난 다양한 인간군이 흥미롭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역시 완전 새롭진 아니다). 하지만 그 다음 작품부터 이어지는 일종의 '파리 연작'은 내가 단 번에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말았던 이유를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파리야 여행삼아 두 번 다녀온 게 다이고, 그나마 미술관 위주로 돌다보니 파리 구석구석에 대한 추억이 많지도 않다. 게다가 불어도 할 줄 모르고, 지극히 현실적인 내가 딱히 '파리의 낭만'에 동요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시 갈 수 있고, 또 다시 가고 싶은 파리는 강력한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곳이다. 어렵게 불어를 배워서라도, 그 우중충한 겨울비를 맞으면서도 꼭 한 번 살고 싶은 곳인 것이다. 어쩌면 이루지 못한 그림 공부 대한 꿈과 미련이 파리에서라면 어느 쪽으로라도 결판이 날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 때문일까.
이 책의 중단편들이 내 마음을 끌어당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파리'라는 공간적 배경 때문이었다. 권지예 작가가 8년 파리 유학의 경험과 그 전후의 삶을 단편 소설이라는 틀 속에 담아 놓은 이 소설집은 내게 일종의 대리만족 같기도 하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자전적 경험의 예지몽 같기도 했다. 나도 스위스에 8년쯤 살고나면 이런 소설집 하나를 쓸 수 있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막힌듯 정체하면서도 끊임없이 꿈틀되고 유형하는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다양한 화자를 오갈 수 있는 작가의 열린 관점도 마음에 들었다. 때론 잔잔하고 감성적으로, 때론 도전적이고 열정적으로 풀어내는 문체도 좋다. 결코 진부한 해피엔딩을 말하지 않는, 그러나 희극도 비극도 아닌 스토리텔링도 좋다(첫 번째 수록작만 빼고). 무엇보다 내 창작욕을 자극해서 좋다.
마리오네트처럼 보이지 않는 줄에 얽혀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는 서울 아내와 파리 남편, 정육점 붉은 빛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섬뜻한 칼 날처럼 차갑게 사라져간 여자, 금을 넘어 사랑한 대가와 이중의 기만,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물귀신, 동시에 모든 것을 갖고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 끝내 내 것이 아닌 훔쳐 본 사랑, 잔혹한 혈혼극에서 쾌감하는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 변화무쌍한 삶의 스팩트럼에서 반사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짧지만 묵직한 이야기들, 가볍고도 묵직한 캐릭터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200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