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공 스기하라 군은 책의 포문을 열면서 말한다. 이 책은 자신의 연애를 다룬 것이며 무슨무슨 '주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음... 이 책은 분명 연애 소설이 맞다.

단지 연애의 대상이 같은 또래의 소녀만은 아니었던 것.
그 때문에 스기하라 군의 연애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하다.

 
난 소설의 힘을 믿지 않았다. 소설은 그저 재미있기만 할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책을 펼치고 덮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용 도구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정일이는 늘 이렇게 말한다.

"혼자서 묵묵히 소설을 읽는 인간은 집회에 모인 백 명의 인간에 필적하는 힘을 갖고 있어."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소리였다.

"그런 인간이 늘어나면 세상은 좀 더 좋아질 거야." 

 
- 본문 85페이지


 

나는 소설의 힘을 믿는다. 재미없는 소설들도 많지만, 어떤 소설은 한 인생을, 한 세상을 바꿀만큼 힘이 있다. 분명하다. 혼자서 묵묵히 소설을 읽는 인간이 늘어난다면 이 세상은 좀 더 좋아질 것이 분명하다.

 
"이런 어둠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어둠을 모르는 인간이 빛의 밝음을 얘기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니체가 말했어. '누구든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래도록 나락을 들여보다 보면 나락 또한 내 쪽을 들여다보는 법' 이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조심하라구."

아버지가 내 등뒤에 있는 유리창 쪽을 보면서 말했기 때문에 유리창에 참고서가 붙어 있나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참고서는 붙어 있지 않았다. 깊은 밤의 어둠이 들러붙어 있을 뿐이었다. 
 

-본문 108 페이지


 

이 구절처럼 이 소설은 골 때린다. 겨우 초등학교만 나오고도 독학으로 마르크스와 니체를 읽고 이해한 아버지. 사춘기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끝내 '빌어먹을 영감탱이'로 치부해버린다. 링에서 한 번도 쓰러진 적 없는 전직 권투선수 아버지. 그 불패의 사나이는 언젠가 자신의 손에 의해 무릎끓고 말리라 각오하면서. 물론 25전 1패로 아들의 불패 신화를 깨뜨린 것은 아버지였고, 무릎 끓은 것은 아들이었다.

 
아버지에게 도전 해 그렇게 작살나게 얻어 맞은 날. 그 날은 공권력에 의해 아버지의 사업체 중 하나를 빼앗긴 날이기도 하다. 또, 북에 있는 삼촌이 돌아가신 날이기도 했다. 북에 있는 동생의 불행에 죄의식을 느끼며 18년간 끊은 술을 다시 드신 아버지. 차라리 아버지의 피를 볼 망정 그의 눈물은 결코 볼 수 없었던 아들. 그래서 그 들은 눈물을 보지 않으려 피를 튀기며 싸웠다.

 
또한 그 날은 소소한 다툼으로 집을 나갔던 어머니도 돌아오신다. 결국 아들은 어머니의 빗자루 몽둥이로 한 참을 더 맞아야 했다. 감히 아버지에게 손을 대다니. 아버지는 말한다. "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이야" 

스기하라 군의 연애 소설은 이렇게 골 때린다. 

"상관없어. 너희들이 나를 재일이라고 부르든 말든,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불러. 너희들, 내가 무섭지? 어떻게든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지? 하지만 나는 인정 못해. 나는 말이지. '사자'하고 비슷해. 사자는 자기를 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지. 너희들이 멋대로 이름을 붙여놓고 사자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다고 흥에 겨워서 이름을 불러가며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봐. 너희들의 경동맥에 달겨들어 콱 깨물어 죽일 테니까. 알아, 너희들이 우리를 재일이라고 부르는 한, 언제든 물려죽어야 하는 쪽이라구. 분하지 않냐구. 내 말해두는데, 나는 재일도 한국인도 몽골로이드도 아냐.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좁은 곳에다 처박지 마. 나는 나야. 아니, 난 내가 나라는 것이 싫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잊게 해주는 것을 찾아서 어디든 갈 거야. 이 나라에 그런 게 없으면, 너희들이 바라는 바대로 이 나라를 떠날 것이고. 너희들은 그렇게 할 수 없지? 너희들은 국가니 토지니 직함이니 인습이니 전통이니 문화니, 그런것들에 평생을 얽매여 살다가 죽는 거야. 제길 나는 처음부터 그런 것 갖고 있지 않으니까 어디든 갈 수 있어. 언제든 갈 수 있다구. 분하지? 안 분해? 빌어먹을,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지. 빌어먹을..."

 

본문 261 페이지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눈물까지 날라 그러네.

빌어먹을!


내게 의미있는 독서였다.
접해보지 못했고, 별 관심도 없었던 재일동포 사회.
거기에 낙인된 '주홍글씨'를 처음으로 선명히 보았고,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아팠다.

형식면에서 더 의미있는 만남이었다.

때론 신랄하고 냉소적이며, 암울하고 분통터지는 이야기들.


그런대도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웃고 있었다.

세상에... 자신에게 도전한 학생을 '너를 유명하게 해주마'라는 말과 함께 재떨이로 쓰러뜨리는 스기하라 군. 어찌 박수를 치지 않겠는가. 경찰서에 끌려간 아들을 죽일 듯 패서 '빨간 줄'을 면하게 해 줬으니 고마워하라며 씨익 웃는 아버지 앞에서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을 더욱 진지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 한 것이 '유머감각'이라는 것. 유머감각은 여유있는 마음에서 나오고, 그 여유는 나르시즘을 벗어난 건전한 자기애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요즘,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는 빛나는 유머감각의 초절정에 있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 준 고마운 글이다.

 

 

2006년 9월, 서울역에서 구포역가는 무궁화호 1호실 9번 좌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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