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IN 안데스 - 태양의 길을 따라 걷다 Culture Travel 2
우석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터였을까.

막연히 중남미 여행을 꿈꾸면서 중남미 관련 서적들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그 중남미 여행의 꿈이란, 흔히 그렇듯이 멕시코 일대의 아즈텍 문명이나 페루의 잉카 문명에 대한 예찬에서 비롯되었다.

 

중남미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원주민을 잔인하게 학살했으며, 원주민 문화를 말살한 포루투갈과 스페인을 위시한 유럽열강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은 나의 '낭만주의적 관점'에 불을 댕겼다.
(그 역시 '타인의 고통'을 나르시스적으로 바라보는 부끄러운 관점임을 인지하면서도 말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대륙을 극심한 가난과 빈부격차, 부정 부패와 테러, 전쟁으로 몰고간 열강의 이해관계와 소수의 자본주의자들의 횡포에 이를 갈기도 했다.

 

과히 '남미 문화 전문가'라 할만한 우석균의 또 다른 남미 문화 기행서,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는 라틴 음악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읽다 말았지만, 잉카의 뿌리와 흥망, 흔적을 추적한 안데스 기행서 <잉카 인 안데스>는 술술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아 깨달았다.
잉카제국 역시 소수 민족을 정복하고 학살하고 차별한 강자의 역사였을 뿐이라는 것을.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자신을 강화하고, 역사의 동인도 권력에의 의지라고.

결국 잉카 후기의 팽창은 절대군주의 권력을 탐하여

정복에의 의지를 불태운 잉카 군주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그 과정을 통해 인류를 구제할 초인이 탄생하기를 고대했지,

잉카 군주들처럼 비정상적인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을 예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저항하는 이들을 점점 더 무참하게 죽였다.

이제 국가 재정은 대단히 튼튼했다.

한꺼번에 몇만 명쯤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잉카 군주들은 결코 초인이 아니었고,

잉카의 최전성기는 다른 종족들에게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야만의 시대였던 것이다.

과연 그 시대에 잉카에게 시달리던 종족들은 무엇에서 희망을 보았을까?

-본문 153쪽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잉카 문명을 비롯한 중남미 역사, 문화에 무지했는가도 동시에 절감했다. 그 대가로 나의 근거 없는 '낭만주의적 예찬'은 산산조각 났다.
 
그와 함께 나는 남미 여행 목적이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점검해보았다.

 

 

바로 이런 일들이 안데스 여행에서 겪는 가장 큰 불편합이다.

구두닦이에게 구두를 못 닦아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생기고,

단돈 300원에 머리 뚜껑이 열린 내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가 속물처럼 느껴지는 일을 겪는데

어찌 여행이 쾌적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심적인 부담에 비하면 치안, 교통, 숙소 문제는 그야말로 하찮은 일인 것이다.

- 본문 37쪽

 

 

물론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라틴 문화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치안이나 교통, 숙소 문제는 '동양 여자'인 나에게 가장 큰 골치거리다.

그럼에도 가장 오래도록 나를 괴롭힐 문제는 작가의 언급처럼 분명 '나의 속물 근성'을 날 것으로 마주할 상황임을 불보듯 뻔했다.

 
중남미 고대 문명이나 원주민 문화에 대한 환상, 그들을 학살하고 정복한 유럽 열강들에 대한 적개심이 공격받고 상처 입은 마당에 내가 중남미를 여행하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애시당초 그 먼데까지 가서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풍경은 에콰도르의 회화나 벽걸이 융단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한 그림에는 원주민들도 흔히 등장하지만 단지 풍경의 일부로 삽입되었을 뿐이다.

그들의 진정한 모습이나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뒷모습만 그려진 경우도 허다하고, 얼굴을 그려 넣어도 표정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오랫동안 식민 시대를 그리워해 온 나라에서

원주민의 희로애락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169쪽

 

 

나 역시 그러한 풍경을 사진에 담아 오려는 것일까?

남들 하기 힘든 근사한 경험 했다고 시덥잖은 후일담이나 늘어놓으려고?
나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여행에 대한 회의감에 소름끼치도록 몸서리쳤다.

 

 

마지막으로 마추삐추에 올랐을 때 나 역시 다른 것을 보았다.

수백미터 아래를 흐르고 있는 강물이었다.

밤 사이 내린 장대비에 온통 황톳물이 되어 버린 강물,

한참 저 아래를 흐르면서도 격정적인 용틀임이 선연했던 그 강물.

원주민들은 그렇게 사납게 요동치며 흐르는 강을 '야와르 마유'라고 부른다고 한다.

'피의 강'이란 뜻이다.

 

성난 파랑이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오르며 황토색 물방울로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이

작열하는 햇빛에 고스란히 포착될 때 피를 흘리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래도 예전의 원주민들은 야와르 마유를 대하면서 비극적인 감정을 품지는 않은 것 같다.

그 빗빛 물을 보고 전투의 치열함이나 격렬함 혹은 전사의 용맹이나 패기 등을 연상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지나온 안데스의 역사도, 또 오늘의 안데스 현실도 결코 그러한 연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추삐추에서 바라본 황톳빛 강물은 차라리 원주민들의 분노와 절망과 서러움이 담긴 피눈물 같았다.

그들의 피눈물은 너무 진해서 도무지 및바닥을 들여다볼 수 없고,

그 핏물이 내지르는 섬뜩한 통곡 소리는 도대체 장장 몇만 리를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런 강물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비록 처절한 아우성의 끝간 데를 알 수 없고,

한 맻힌 피눈물이 얼마나 깊은 심연에서 솟아난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겠지만,

안데스 협곡에는 피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느껴보길 바랄 뿐이다.

-에필로그 297쪽

 

 

나는 작가의 바람대로 '그런 강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끄럽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피의 강물'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밖에 여행의 목적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정확한 여행 일정과 구간은 정해지지도 않았지만)

여행의 목적과 의미는 여행을 하면서 찾는 것이지, 여행 이전에 계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기변명을 주지하면서 말이다.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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